[20046월호]

대마도의 역사보존

선조의 체취 들린다

무서운 일본, 잊을수 없는 일본

/ 張洪烈 ( 장홍렬 한국기업평가원 원장, 전 경기지방공사 사장 )

필자는 지난 4월 초 연휴 23일을 이용하여 대마도 역사 탐방의 기회를 가졌다.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에 그저 놓여있는 단순한 섬이 아니었다. 우리 선각 조상들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역사의 뒤안길을 비춰주고 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일본 사람들은 기록을 남기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민족이다. 극한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꼭 남기려고 한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그러면서도 역사 왜곡을 서슴없이 하는 민족이기도 하다. 무서운 민족이다.

대마도에서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첫째는 대마 역사 민족 자료관이다. 나가사키현(長崎縣)에서 세운 자료관이다.

이 자료관에는 한반도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고고자료가 고문서와 고기록(古記錄)의 형태 그대로 소장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진기한 불상, 경전, 청자 등도 볼 수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 각종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조선통신사 행렬 그림 두루마리(부분) 진본을 직접 볼 수 있다. 비록 두루마리 부분 그림이지만 지금 보아도 대단한 장관을 이루는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당시 조선통신사의 면면은 조선 정부 최고의 관료와 학자, 문화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을 수행하는 화려한 악대(樂隊)는 물론 소동(小童) 무인(武人), 통역관 등 줄잡아 매회마다 300?500명에 이르는 대사절단으로 편성되었다고 하니 그 행렬의 장대함에 다시 한 번 역사의 현장에서 뿌듯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0년 동안 열두 차례나 이루어졌다. 조선통신사는 엄격한 쇄국정책하의 에도(江戶:현 도꾜)에 들어갈 수 있었던 유일한 외교사절 이었다고 하니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특별하다고 하겠다.

조선통신사 교류에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이 있다. 한국쪽의 9차 통신사의 제술관인 신유한과 일본쪽의 조선통신사 영접 실무 책임자인 아메 노모리호슈(雨森芳洲))이다.

아메 노모리호슈(1668?1755)는 대마도에서 일생을 마친 당시 일본의 조선국 담당 외교관이면서 교육자였다. 그는 한국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한반도와 중국과의 교류에 창구 역할을 했다. 특히 성의와 믿음의 외교를 중시하여 선린교류(善隣交流)를 앞장서 실천한 국제인이었다. 또 그가 저술한 교린수지(交隣須知)는 일본 최초의 한국어 학습교재로 메이지(明治)시대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그는 또 신유한과 남다른 교류를 가지면서 그의 외교 철학이 담긴 교류록을 남겼는데 그것이 유명한 해유록(海游錄)이라는 책이다. 서로 미워하지 말고 속이지 말며, 싸우지 말고 진실을 가지며 교류하는 것 이 성신(誠信)의 교류임을 강조했다.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인간 삶의 기본 철학이 함축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반목과 질시 그리고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것은 조그만 하고 사소한 일에도 서로 미워하고 속이고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후세 한국과 일본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호슈(芳洲)가 주창한 성의()와 믿음()을 자연석에 성지교린(誠信之交隣)이라고 아로새겨 대마도를 찾는 양국 후손들에게 조선통신사 교린의 역사현장을 보여주면서 큰 가르침을 제시하고 잇다.

한국 사람으로서 대마도를 찾으면 잊지 말아야 할 곳이 또 하나 있다. 와니우라 항구 앞바다이다. 지금은 일본 해상 자위대의 감시소를 포함한 군사 시설물이 주위에 설치되어 있는 군사 요충지가 된 곳이다.

1703년 음력으로 25일 아침에 조선역관사 112명을 태운 배가 부산을 출발하여 대마도 와니우라 항을 바로 목전에 두고 급변한 날씨와 풍랑에 조난을 당해 역관사 전원이 사망한 비참한 해난 사고 현장이다.

와니우라 항 앞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건립되어 있다. 그 옆에 그들의 넋을 달래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비(朝鮮國譯官使殉難之碑)가 서있다. 조선 역관사들의 조난 사실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대마도 소오씨 가문 문고(宗家文庫) 사료 중에서 도해역관 從者姓名 의 책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소오씨 가문 문고는 에도시대(江戶時代:1600?1867) 230년 동안 대마의 역사가 기록된 귀중한 자료로서 남아있다. 이 문고 사료 가운데 朝日 외교의 귀중한 기록도 있다고 한다. 해난 사고의 역사적 배경이 선린우호(善隣友好)를 바탕으로 한 국제교류라는 점을 높이 사서 역관사들의 순난 300주년이 되는 해(2003)를 기념해서 뜻 있는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112개의 영석(靈石)을 모아 1991320일 춘분날 세웠다고 한다.

필자는 이 비를 바라보며 당시 한국의 100명이 넘는 역관 엘리트를 일시에 잃어버리고 본국 정부에서는 얼마나 애통하고 허망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그리고 상황은 다르지만 잠시나마 버마 아웅산에서의 대통령수행 사절단 참사가 함께 떠올랐다.

또 하나는 대마도를 찾으면 최익현 선생의 애국정신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선생은 1905년 일본의 강압에 대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전라도 정읍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가 이듬해 6월 순창에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대마도로 유배된다. 유배 당시 부산에서 배를 타면서 가져온 물만 먹었으며 물이 떨어진 후에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고 그대로 운명했다고 한다.

선생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센지(修善寺)라는 절에서 장례를 치른 후 부산항으로 이송되었다. 절 입구에 한일 양국의 유지들이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년에 순국비를 세웠다. 한국인의 올곧은 기개를 그는 단식을 통해 후손들에게 큰 가르침을 깨우쳐 준다.

그 외 한국과 관련된 것으로 대마 역사 민속 자료관 입구에 세워 놓은 조선통신사의 기념비,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고려문과 신라 사신 박제상의 순국비, 백제식 성()인 가네다(金田) 성터, 불교와 관련된 조선시대 보살 좌상, 통일신라 시대 동상여래좌상, 동조여래형입상, 코즈나(小鋼)의 고려불 등 각종 불상, 백제와 관련이 있는 바이린지(梅林寺),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이 있는 반쇼인(方松院), 사이후쿠지(西福寺)절의 대반야경,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서산사(西山寺) 등도 찾아 볼 만한 곳이다.

필자는 피상적으로 대마도는 산이 많고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매우 열악한 곳으로 알았는데 이번에 직접 찾아보니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의 문화와 풍습이 그대로 전파되어 고스란히 남아 우리 후손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 주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다.

이번에도 느꼈지만 일본을 여행할 때마다 각 지역의 민속관이나 박물관을 찾아보면 한국과 관계되는 대목에서는 왠지 석연치 않는 것을 꼭 발견하게 된다.

필자가 생각해도 분명 조선반도(한반도)와의 교류라고 표현해야 옳다고 보는데 그들의 역사기록은 대부분이 한국이라는 표현 대신에 대륙과의 교류라고 슬쩍 표현을 바꾸어 놓고 있다.

무엇 때문에 무슨 이유로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를 이렇게 왜곡된 기록으로 남기려고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의문을 던져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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