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6월호]

[6?25 특별기고]

기로에 선 대한민국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6·25 모르고는 북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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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갑동(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 상임의장, 6·25당시 남로당 지하총책)

한국은 세계에서 열두번째 가는 경제대국이며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 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이에 반하여 북쪽의 김정일 정권은 세계에서 악명 높은 테러지옥 정권이다. 그러나 한국정계는 겁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숭배해서 인지 쩔쩔매고 있다는 인상을 이곳 일본 사람들에게도 보이고 있다.

가까운 일로 최근의 북한 평안북도 용천역 폭발 사건에 대해 한국은 같은 민족이라고 돈도 노력도 아끼지 않고 구원품을 하루빨리 보내 주려고 육로로 수송해 주겠다고 했지만 김정일은 비용도 더 들고 이틀이나 걸리는 해로로 보내 달라고 한다고 순종하였다. 고맙다는 소리는 하지 않고 평가한다고 왕이 신하에게 헌납을 받아 치하 하는 듯하다. 어떻게 하면 김정일의 비위에 들까 경쟁하는 꼴이 특히 이번 4월총선 이후 한국에서 더욱 심한 것 같다. 김정일에게 바른말로 주장하지 못하고 오로지 추종하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 상태라 할 수 있다.

민족이란 말은 19세기에 일본 사람이 영어에서 번역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왕국 말에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우리겨레가 단결하여 방어하기 위하여 사용하게 됐으나 그전에는 없던 말이다.

특히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을 얻어 기미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민족이란 피만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원시시대의 전쟁은 피가 같은 사람끼리의 전쟁이었다. 민족이란 피가 같을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가 같고 문화(광범위한 의미에서)가 같은 민족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동포를 학살하고 굶겨 죽이는 독재자 김정일 개인은 우리 민족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의 민족이란 말은 나라의 독립을 위한 배타적인 의미를 가진 말인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의 정체

한국을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도발한 6·25 남침 전쟁을 오늘날까지 54년간 한국과 미제가 도발하였다고 계속 거짓말을 하였으니 북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남한의 젊은이까지 그 거짓 역사를 믿게 되었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는 북한땅을 피바다로 만들고는 실정을 모르는 젊은 한국 정치가들에게 나와 당신들과 같은 피가 아니냐고 민족공조하자고 꾀운다. 어떤 관계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 햇볕정책으로 밥을 주고 핵무기를 만드는데 돈을 보태주게 되었는가.

197366일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씨가 일본에 가서 반한 친북 일본 정치가들과 한국정권 타도 운동을 하고 있던 그를 납치하였었다. 왜냐하면 그 이튿날 69일 친김일성 국회의원인 우쓰노미야(宇都宮) 도꾸마(德馬)가 김대중씨를 초청하여 수백명의 일본 국회의원과 각계 지도자에게 대통령 비난과 반한 강연을 시키고 대대적인 연회를 개최하여 김대중 지지 대회를 열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알게된 이후락 비서관이 하여서는 안될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김일성은 김대중을 구하려고 우쓰노미야에게 김씨를 일본으로 원상복귀 시키라고 부탁하였다. 일본 여당인 자유민주당 국회의원인 유력자 우쓰노미야는 백방으로 미국까지 가서 노력하였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여 김일성에게 미안하다고 국회의원직까지 사퇴하였었다. 이것은 중대한 밀약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1년후인 74815일 해방 기념일에 김일성은 일본의 자기 조직원인 문세광(文世光)을 한국에 잠입시켜 박대통령을 저격시켰으나 총알이 빗나가 영부인 육여사가 사살 당하였다. 그때 박대통령이 사살 당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김일성과 김대중은 어떠한 관계에 있었던가. 그리고 김정일을 연명시키는 햇볕정책이 왜 나왔는가. 햇볕정책이란 경제적인 원조뿐만 아니라 김정일에 대한 한국 국민의 정신적 무장을 해체 시켜버린 것이다.

내가 체험한 6·25의 반민족적 행패

나는 6·25 전쟁발발 때 남조선 로동당 지하당 총책이었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 젊은 사람들은 6·25 뿐만 아니라 남로당도 잘 모를 것이다.

19254월에 조선 공산당이 처음 조직되었었다. 그때 조선에는 공장도 없고 노동계급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공산당을 조직한 사람들은 독립성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진실한 공산당이 아니었으므로 소련에 의하여 1928년 해체 당하고 해방 때까지 재건되지 못했었다. 조선공산당 시발은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여 독립운동 민족해방 투쟁이 주목적이었다.

19458월 해방이 되자 911일 박헌영(朴憲永)을 위원장으로 하여 공산당이 재건되었었다. 독립운동을 했던 나는 925일에 입당하였었다. 당시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원인 소련 군인이었다.

조선 공산당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것은 즉 중국 공산당 명령에 의하여 활동하였고 소련군의 명령에 의하여 활동한 것이었다.

919일 소련 군함을 타고 소련군 대위 군복을 입고 원산에 상륙하여 10월 초에 조선 공산당 북조선 분국에 입당하였으니 나보다 뒤였다. 소련군의 배경으로 얼마 안 가서 공산당 북조선 분국장이 되었었다.

467월이 되자 소련과 김일성이 남조선에는 미군이 점령해 있고 북조선에는 소련군이 주둔하여 남북의 정세가 각각 달라졌으니 서울의 공산당 중앙위원회장 박헌영이 통일적으로 지도할 것이 아니라 당을 두 개로 분리하자고 제의해 왔었다. 그래서 평양에서는 공산당 북조선 분국과 신민당(중공계 공산당)과 합당하여 북조선 로동당이 되고 서울에서는 공산당, 인민당, 남조선 신미당 등 3당이 합당하여 남조선 로동당이 되었다. 462월 소련과 김일성은 북한에 북조선 임시 위원회를 만들어 김일성이 위원장에 취임하여 이것을 민주기지라 하였다. 이것은 테러와 전쟁도발의 기지로 만든 것이었다. 현재 세계 테러의 아르키이-라는 말은 김일성이 만든 테러 기지라는 조선말의 번역어임을 알아야 한다.

48년 남북로동당이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만들 때 나이 많은 남로당원들은 북한에 가서 장관, 차관 등 고위직을 맡고 활동력이 있는 젊은 당원들은 남쪽에 남게 되었었다.

6·25때 내가 이 남로당 지하당 총책 즉 최고지도자 였었다. 6·25가 나기 일주일전 김일성은 남북국회를 합동하여 남북평화통일을 하자고 한국정부에 제의 하였었다. 당시 210명의 한국 국회의원과 600명의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어떻게 합동회의를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한국을 기만하려는 술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바로 일주일후인 625일 평화스러운 일요일에 김일성은 기습남침 전쟁을 도발하였었다. 그 전날밤 채병덕 육군참모 총장은 인천병기창 낙성식에 장성들을 다 모아 밤새도록 술을 먹이고 아침 늦게까지 자고 김일성이 쳐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그때 우리 남로당 지하당은 평양 출신인 채병덕 총장도 김일성 간첩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나는 전쟁이 났다는 말을 듣고 미아리 고개를 가보니 남부여대 하고 피난민이 들이닥치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김일성이 다 망쳤다. 통일은 다 틀렸다고 김일성에게 욕설을 퍼부었었다.

28일 새벽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제일먼저 소위 반동분자 숙청으로 국회의원, 고급관리, 경찰, 군복을 벗고 민가에 숨어있는 한국군인을 색출 총살 하거나 인민재판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1910년 일본군이 조선의 주권을 박탈하고 합병하였을 때도 이렇게 닥치는 대로 학살은 하지 않았었다. 나는 인민군의 수족이 되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지 않았다고 총살당할 위기를 맞았으나 부수상으로 있던 박헌영의 덕택으로 총살을 면하고 직책은 해임 당했었다.

다시 보자 미국의 국가적 본질을

지금 한국에서는 미군을 반대하고 같은 민족인 김정일을 도와 그와 통일하자는 파와 김정일을 반대하는 파의 두갈래가 있다. 친김정일파를 진보파 개혁파라 하고 반김정일파를 보수파라 한다.

미국이 일본 군국주의를 타도한 결과 우리가 해방되었고 또 6·25 때 미군이 많은 희생과 군비를 써가며 대한민국을 구하여 주었는데 지금 한국의 진보파 개혁파는 그 미국을 욕하며 배척하는 것이다. 이것은 김일성과 김정일과 같은 입장이며 같은 태도다. 한국의 진보파 개혁파 친김정일파가 보듯이 미군은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인가. 절대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파까지 애매한 태도다.

미국의 역사와 그의 본질은 해방사관(解放史觀) 혁명사관에 근거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좌익적인 진보 사관이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국주의로 구라파를 힘쓰던 카일제 독일을 타도하여 민주주의 구라파를 구현시켰다. 그러나 아무 영토도 강탈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서구라파는 물론 동구라파의 일부까지 점령한 히틀러 독일과 뭇소리니의 이태리와 혈전을 하고 또 중국은 물론 인도의 일부까지 점령한 일본과 혈투를 벌여 아시아에 새로운 민주주의와 경제적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는 미국이 일본 군국주의를 타도하여 주지 않았더라면 성도 이름도 말도 글도 역사도 민족성도 없는 일본의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의 추종자들인 진보파 개혁파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시 정권이 김정일, 후세인, 이란을 악의 축으로 지정하여 숙청할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미국의 전통적인 국가의 본질에 내재하고 있는 인도주의적 개혁적 진보사관에 근거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이라크 해방전쟁에 왜 발이 빠져 있는가. 이것은 종교전쟁이 되어 버리고 후세인과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프랑스와 독일 정치가의 배신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정치가 머리에는 해방이라는 사상이 없다. 그들에게는 외국을 침범한 역사는 있어도 해방시켜준 역사는 없다. 크로스(十字)와 크로왓산(半月) 기독교와 이스람교의 제2차 종교전쟁이 되어버린 셈이다.

반미 친김정일파인 한국의 진보 개혁파 국회의원들에게 물어보자. 김정일과 미국 어느쪽이 진보적이고 개혁적이며 민주적인가. 객관적으로 볼 때 당신들은 모순에 빠져 있으며 딜레마에 빠져 김정일이 붕괴할 때 당신들도 같이 순사(殉死)할지 전향할 지 알 수 없다.

그러면 당신들은 나에게 왜 당신은 해방직후 공산당에 들어 반미운동을 하였는가반문할 것이다. 우리는 해방이 되자 ‘8월태제에서 우리조선은 연합군에 의하여 해방되었다고 미국의 역할을 긍정하였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우리 조선은 소련에 의하여 해방되었다고 소련이 시키는 대로 소리쳤다.

처음 우리가 미군정을 비판한 것은 미군이 남조선에 진주한 것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를 통치하기 위하여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진주목적 이외의 군정을 실시하여 통치행위를 하기 때문에 빨리 나가달라는 것이었다.

주체사상과 고려연방 공화국

김일성의 피바다 은폐 이론이 63년에 주체사상이란 철학사상으로 가장 되었었다.

숙청 학살을 주체사상으로 둔갑시킨 것은 김일성이 모스크바 대학에 유학시켜 양성한 어용학자 황모였다. 황모는 인간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의 주인은 단 한사람 김일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김일성을 유일주체 인간으로 날조하였기 때문에 주체인간이 되지 못한 그는 결국 살려고 인간대중이 사는 남한으로 망명하여 온 것 같다.

김일성은 198010월 조선 로동당 제6차 대회에서 전사회를 주체사상화 하는 것은 우리혁명의 총적임무다. 사회의 전구성원을 주체형의 공산주의적인 인간으로 만들며 사회생활의 전분야를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개조해야 한다. 주체사상은 모든 것을 인간 (김일성) 중심으로 생각하며 인간(김일성)을 위하여 복무하도록 하는 인간(김일성) 중심의 세계관이다.

즉 전사회 구성원을 주체사상의 요구대로 개조하여 모든 것을 김일성 중심으로 김일성을 위하여 복무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공로로 어용학자는 학자로서는 최고 지위인 로동당 중앙비서까지 등용되었었다. 그러나 그런 사회에서는 살 수 없었다.

김일성은 북한 사회를 주체사상화 한 후 남한도 주체사상화 하기 위하여 806차대회에서 한국측에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라고 작명까지 하여 자기가 주도권을 장악하는 괴뢰정부를 만들자고 하였다.

연방 형식의 통일국가에서는 북과 남이 동수의 대표와 적당한 수의 해외동포 대표로 최고민족연방회의를 구성하자.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불럭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이라야 한다. 이것은 필연적이며 현실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한미동맹 폐기, 주한미군 철수, 한국군의 두배의 김일성군을 생각해 보라)

고려민주연방 공화국은 북과 남간의 경제합작과 교류를 실시하여 민족경제의 자립적 발전을 보장하여야 한다.(북한과 경제합작을 하여 자립적을 발전하겠는가.)

김일성이 24년 전에 지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통일 노선은 김대중 대통령(당시)4년전에 북에 가서 김정일과 느슨한 연합정부로 통일하자고 약속하여 이미 진행중에 있다. 김정일은 김대중 대통령 집권중에 우선 국가보안법을 폐지시켜 주체사상 돌격대를 남파하여 이미 남한에서 양성한 주사파와 연합, 남한을 완전히 장악하여 방해자인 주한미군을 철거시키려 하였다. 반미사상 침투에는 성공하였으나 국회의원 과반수를 가진 한나라당의 벽을 무너트릴 수 없어 금년 415일 총선까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반미 친북 정당이 과반수를 가지면 한국은 김정일의 식량창고가 된다. 유일한 인간 김정일이 주체가 되어 안심하고 독재할 수가 있다.

한국을 판가림한 4·15 총선

415일 총선에서 큰 변화가 발생하였다. 열린우리당이 49 의석에서 152 석으로 비약하였고 의석이 없던 민주노동당이 일거에 10 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보수파라는 말을 듣던 한나라당은 137 의석에서 겨우 121 의석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당선된 국회의원 5명중 1명꼴로 시국관련 전과자라 한다. 국가보안법 위반 전과자 53, 기타 긴급조치 위반 집시법 위반전과자 9명으로 62명이 전과자라 한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원내 대표는 국가보안법을 1년내에 폐지하겠다고 외국통신사에 언명하였다 한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김일성이 파견하는 간첩, 공작원, 게릴라를 방어하는 법이다.

6·25 남침전쟁이 끝나지 않고 휴전중에 있는 한국으로선 당연히 필요한 법률이다. 한국군대만이 국방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국가보안법이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원내총무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고 하고 정동영 의장은 20?30년 집권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북한 정권의 내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실로 무서운 이야기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여 김정일의 간첩 공작원 게릴라를 자유로 출입시켜 그들의 전술을 배워 한국을 피바다로 만들고 또한 1당 독재를 배워 야당을 꼭두각시나 만들려는 것인가.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초선 의원들을 보니 김일성 부자와 같이 예사로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니고 충직하고 정직하고 자기 자신을 그대로 나타내는 데는 김일성과 김정일과는 닮지 않았다. 나는 열린우리당의 걱정은 하지 않는다. 도리어 염려되는 것은 몰락하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당의 생사를 걸고 싸우는 총선 도중에 선거가 끝나면 평양에 가겠다. 2세끼리 잘 지내겠다고 성명하였다 한다.

박대표에게 인기가 있다 한다. 그 인기는 누구의 인기인가. 아버지 박대통령의 인기 아닌가. 아버지 어머니 인기를 아버지 어머니를 죽인 원수에게 팔고 다니면서 2세끼리 잘 지내자면 되겠는가.

한나라당은 보수대신 선진, 개혁을 선언한다고 한다. 한나라당 당선자 90%가 여당에 추종하여 보안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한다. 북한 당국을 북한정부라 부른다고 한다. 당명을 고친다고 한다.

한 나라를 위한 한나라당이 아니고 이제는 북한정부도 위하는 두나라당으로 고칠 셈인가. 대여투쟁은 하지 않고 당내 개혁을 하겠다고 한다. 여당에 대하여 정책투쟁을 하는 것이 야당이다.

나는 해방직후 46년 초부터 박정희라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나 내나 많은 풍파를 겪었다. 771125일 청와대에서 단둘이 한시간반 밀담을 나눈 일이 있다. 그때 김일성은 이미 미사일과 핵무기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박대통령은 한국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김일성에 대응하는 무기를 만들려 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박대통령에게 꼼짝말고 미국의 무기나 사라는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의논할 사람이 없어 고심하고 있었다.

북한을 잘 알고 모택동 중국에서도 반년이나 살아본 나와 의논하는 것이었다. 그때 박대통령의 애국심, 책임감 그리고 고독함에 대한 동정심으로 눈시울이 뜨거웠었다. 그런 그의 딸이 김정일이 부른다고 혼자 평양까지 가서 축배를 들때 누구를 위하여 축배를 들었는가.

이번 총선에서 낙동강 방위선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인기 덕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김정일과 대화할 때에는 반드시 네트를 사이에 두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네트가 국가보안법이다.

(511일 도쿄에서)

일본에 거주하며 미국과 러시아, 중국 등을 순방, 반 김정일 운동을 벌이는 박갑동 의장이 최근 서울을 다녀간 후 6·25를 모르는 세대에게 역사적 교훈을 들려주고 싶다면서 FAX로 이 원고를 보내왔다.

박 의장은 6·25 당시 남로당 지하 총책으로 있다가 월북하여 박헌영씨가 숙청될 때 중국으로 탈출했다가 일본에 정착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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