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호]

DR이라는 위험한 함정

글 / 權和燮(권화섭) 편집위원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여의도의 머니게임 큰 마당

여의도 증권시장은 머니 게임의 큰 마당이다. 하루 거래량이 3조원을 넘어서고 종합주가지수 등락폭이 빈번히 30 내지 40 포인트에 달하니 꽤 군침 도는 게임 마당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투전판에서 항상 돈을 따는 쪽은 외국인 투자자들이고 항상 돈을 잃는 것은 개미군단으로 불리는 국내 소액투자자들이다.

어째서 여의도의 머니 게임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외국인들이 항시 돈을 먹는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매수에 나서면 시장이 뜨거워지고 매도할 때는 시장이 가라앉는다. 또 전체 시장이 나쁠 때도 그들이 사는 종목의 주가는 오르고 그들이 파는 종목의 주가는 내린다. 외국인들이 여의도 증권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경제신문에 투자 가이드를 쓰는 전문가들이 가장 즐겨 내놓는 투자 비결은 “외국인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사는 종목을 사고 그들이 팔 때는 미련없이 던지라는 주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단기적으로 시장이 너무 급등락을 하는통에 발이 느린 일반 투자자들로서는 자칫 외국인이 팔 때는 사고 또 살 때는 파는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최근 여의도의 머니게임에서는 최근 국내투자자들이 앉아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사태가 벌어졌다. 외국자본유치를 내세워 정부 금융권 대기업 3자가 한통속이 되어 외국인들에게 횡재를 안겨주면서 국내투자자들에게 엉뚱한 손해를 끼치고 있는 주식예탁증서(DR) 할인판매 선풍이 그것이다.

DR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증권대체증서이다. 원본 주식은 은행이나 예탁기관에 보관하고 이를 담보로 외국의 예탁기관이 현지에서 별도로 발행하여 유통시키는 것이 바로 DR이다. 따라서 이 DR은 사실상 현물주식과 다를 바 없으며 외국에서 매각할 때는 국내 주가수준에 얼마간 프리미엄을 붙여 파는 것이 정상이다. DR 투자시에는 환차손의 위험이 전혀 없으면서 국내 주가가 오르면 그 시세도 오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DR의 논리가 무참히 깨어졌다. 지난 8월 한빛은행이 미국에서 10억달러의 DR을 발행하면서 무려 21.5%의 할인율을 수용하고 다시 9월에 현대자동차가 5억달러의 DR을 발행하면서 15.8%의 할인율을 수용한 것이다.

지난 6월과 7월 삼성전관이 두차례에 걸쳐 총2억3천만달러의 DR을 발행할 때 그나마 한자리 수로 유지했던 할인율이 한꺼번에 20% 수준까지 급등한 것이다.

희생과 횡재 엇갈리는 불공정

이러한 DR 할인발행은 국내 투자자들의 희생 위에 외국투자자들에게 횡재를 안겨주는 악의의 불공정 게임이다. DR 할인율이란 바로 그 종목의 국내 주가보다 그만큼 낮은 시세로 외국투자자들에게 주식을 인수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DR 할인율 기록을 세운 한빛은행 간부들은 오직 외자유치에 성공했다는데에 대단한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표정들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것은 외국자본유치가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가장 중요한 구조조정 실적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그런 평가기준을 정했고 이 기준을 지키려고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다투어 미국시장에 달려가니 한국물 DR시세가 폭락하고 급기야 두자리 수 할인률을 수용해야 하는 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이런 사태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10월 초순 미국에서 10억달러의 DR을 발행하려던 외환은행이 그 계획을 연기한 것은 바로 그러한 판단의 반영이다. 그런데 아예 발행계획을 취소한 것이 아니라 연기한 것은 연말 BIS비율(자기자본 대비 부실채권 비율)을 맞추려면 DR 발행을 절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억지춘향식 DR발행은 단순히 외국투자자의 횡재로 끝나지 않는다. 중남미 증시의 경험이 그것을 예시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의 보도(99년 8월12일)에 따르면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각국의 증권시장이 자국 기업들의 해외증권 발행 및 외국증시 상장 러시와 외국인 투자자금의 이탈로 인해 빈사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남미 최대의 상파울로 증시는 지난 6월 정부가 금융거래세를 부과한 이후 거래량이 3분의 1로 격감했고 리우데자네이로 증시는 아르헨티나의 거대 석유회사 YPF가 스페인의 랩솔社에 인수된 후 현지 증시에서 철수하는 바람에 시장가치의 15%를 상실했다. 최근 2년사이 다른 중남미 증시의 거래량 감소는 멕시코 시티 48%, 리마 69%, 부에노스아이레스 37%, 보고타 74%에 달했다.

이러한 중남미 증시의 몰락에는 아메리칸 주식예탁증서(ADR), 즉 미국에서 거래되는 중남미 기업들의 DR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에는 또한 런던과 같은 다른 국제금융센터의 증시에 상장할 수 있는 글로벌 주식예탁증서(GDR)까지 거래되고 있다. 마이애미 소재 구즈먼 증권사에 따르면 90년 칠레의 콤파냐 데 텔레코뮤티카치오네스가 처음 ADR을 발행한 이후 최근 2-3년 사이에 그 발행이 급팽창해 뉴욕 증시에 총 95건의 중남미계 ADR이 상장되어 있다.

외자유치 명분은 좋지만...

이러한 뉴욕타임스 보도는 결코 중남미 국가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바로 아시아 국가들의 문제이고 우리나라의 문제이다. 국제적 민간투자와 금융자본의 이동이 전면 자유화되고 또 그 유출입 추세와 속도가 대단히 불안정해짐에 따라 각국의 경제상황과 경기흐름도 날이 갈수록 불안정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의도 증권시장의 주가가 외국인들의 매수매도에 따라 크게 출렁이고 시장안정을 위해 정부가 그들의 투자자금을 붙들어두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하고 있는지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모두가 외자유치라는 명분을 내세워 벌이고 있는 우스꽝스런 한국적 머니 게임이다. 그것이 우스꽝스런 것은 벌써 80년대 이후 만성적인 국제금융위기에 시달려온 중남미 국가들이 90년대에 들어와서도 다시 그러한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며 똑같은 국제 머니 게임의 희생물이 되고자 안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남미 국가들이야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부패, 그리고 경제관료들의 정책능력 부재 등으로 그렇게 되었지만 우리나라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이상스러운 자만심을 뽐내며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빛은행이 생겨난 배경이 바로 IMF 사태이며, 그것은 부패한 정치와 무책임한 관료, 욕심 사나운 은행과 기업들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중남미 기업들의 국내 증권시장 대거이탈과 뉴욕증시로의 이동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시아 위기와 우리나라의 IMF 사태는 외국투자자들의 집단적인 철수와 자본회수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다음번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는 국내 금융기관과 기업들도 외국 투자자들과 함께 그 탈출대열에 끼어 들어 상황을 한층 무섭게 만들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서 정부 당국자들은 세계화의 시대에 국제적 자본이동이 자유롭게 되어있는 이상 그런 일은 항용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을 되뇌기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걱정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