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호]

孔子 유럽을 순방하다

글 / 金性鎬(김성호) 편집위원 (문화일보 논설위원)

공자가 유럽을 순방했다. 공자의 주유열국(周遊列國)은 역사상 중대한 뜻이 있기 때문에 이번 유럽 순방도 범상히 볼일이 아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그는 13년 동안 70여 나라를 돌았다. 당시 공자는 모든 벼슬을 버리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나라와 지도자를 찾아 유세했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의 지도자들은 공자의 식견에 탄복하면서도 그의 말을 추종할 수 없었다. 세상은 공자의 도덕정치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이미 충분히 헝클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번 공자의 유럽 순방이 주목되는 것도 그의 유세를 거부한 역사적 전철이 되풀이될지 안 될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맨 처음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들러 전 소련 수상 고르바초프를 만났다. 부인 라이사의 병상을 지키는 그는 눈에 띠게 의기소침 했다.

라이사는 백혈병을 앓고 있는데 오래 전에 발병의 조짐을 알고도 남편에게 그 사실을 숨겼다고 한다. 라이사가 자신이 몸에 이상을 알았을 당시 남편은 정적에 둘러 쌓여 글라스노스트(개방)과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들 부부는 흑해연안 휴양지에서 반란군에 연금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소련 공산당의 저항은 그 만큼 격렬했다. 같은 개혁성향의 옐친에게 돌아갔다.

그 와중에서 라이사는 지아비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그녀의 중병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밤을 새워 그녀의 병상을 지킨 것은 바로 이런 지어미의 갸륵한 사랑에 감동됐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가 다가가자 고르바초프는 목멘 소리로 말한다.

“어서 오십시오. 성인께서 이렇게 먼길을 찾아 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일찍이 ‘먼 곳에서 친구가 찾아오니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람된 말씀 같습니다만 지금 저의 심경이 바로 그렇습니다. 집사람(라이사)은 방금 잠이 들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날아든 위문편지를 그녀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소연방이 해체되고, 독립국 연합으로 나라가 쪼개지고, 러시아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저희 부부는 완전히 잊혀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국내는 물론 특히 해외에서 우리 부부를 격려하는 편지가 답지하자 병상의 그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공자가 조용히 답변한다. “삼강이란게 뭡니까. 아비는 자식의 모범이 되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모범이 되고, 임금은 신하의 모범이 되는 것 아닙니까. 귀하는 ‘악의 제국’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역사에서 할 일을 다한 사나이’로서 당신의 부인의 뇌리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애처가이고 아니고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은 큰 일을 했고, 부인은 당신을 정당하게 평가한 것입니다. 라이사는 위대한 여성입니다.”

“제 아내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선생님이 왜 일찍이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어렵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이 어디 여자와 소인 뿐 입니까. 남자도 그렇고, 자칭 대인이라는 것들도 돌아서면 비쭉 대잖습니까. 바로 선생님의 그런 여성 비하발언 때문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나도 여자들이 선생님을 감쌀 생각을 안 하는 것 아닙니까.”

공자는 묵묵히 발길을 돌린다. 그러면서 자문해 본다. 나는 시대를 초월한 사상가로 남을 수 있을까. 얼마 후 그는 라이사의 부음을 듣는다.

다음 공자가 발길을 머문 곳은 독일 땅 하고도 베를린이다. 본에서 옛 수도로 도읍을 옮긴 독일은 지금 한창 통일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찾은 곳은 독일 하원의장 볼프강 티어제의 집. 도대체 볼프강 티어제가 누구인가. 그는 문예학자 출신으로 시민운동을 하다 사민당에 입당, 98년에 하원의장이 된 사람이다.

그가 유명하게 된 것은 무슨 정치가로서의 업적을 쌓아서가 아니라 30억원 짜리 관저를 마다하고 월세 32만원 수준의 허름한 서민 아파트에서 살기 때문이다. 청렴하다 못해 괴팍하다는 소리까지 듣는 그는 태연하게 ‘나는 저택에서 높은 담을 쌓고 살기보다는 동네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보통사람들의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공자의 손을 잡고 반긴다.

“선생님이 저를 어떻게 칭찬할지 저는 압니다. 제자 안회를 칭찬한 것처럼 이렇게 말하실꺼죠. ‘어질다 티어제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을 먹고 누추한 곳에 살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티어제는 그 즐거워함을 고치지 않는구나!’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허어 이미 다 아시는구려. 역시 세간의 평가를 초월한 기인이시구려. 그대같은 사람을 칭찬하는 말은 무수히 많습니다.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으며 거처할 때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대는 진정 군자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수없이 말씀하신 군자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군자는 덕을 완성한 이, 즉 성덕자입니다.”

“그러면 덕이란 무엇입니까.”

“덕은 마음이 올바르고 사람의 도리에 합당한 일입니다. 온후 관대한 것만이 덕이 아닙니다. 올바르고 인도에 맞아야 합니다.”

“도를 추구하는 사람도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도 녹이나 먹고 지내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도 녹이나 먹고 지내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나라가 평안할 때도 공을 세우지 못하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도 좋은 업적을 내지 못하면서 오로지 일신의 영달만 생각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꾸짖으시는 겁니까.”

“잘 아시는군요. 나 공자가 사치를 경계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치하면 겸손하지 못하게 되고, 너무 검소하면 고루하게 됩니다. 겸손하지 못한 것도 문제이고, 고루한 것 즉 고집이 세고 도량이 작은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겸손치 못하고 거만을 떠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루한 것이 폐해가 적기 때문에 사치보다는 검소를 권장하는 것입니다. 그대가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허름한 집에 사는 것을 보고 이웃들은 괴팍하다고 흉보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거기에 개의치 마십시오.”

독일 하원의장을 격려한 뒤 공자는 영국으로 건너갔다. 40대의 젊은 총리 토니 블레어가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선생님. 지금 컴퓨터와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난 뒤입니다. 인터넷 배우기는 정말 어렵군요. 그러나 우리 지도층이 컴맹이라면 말이 되겠습니까. 입만 열면 전자 문명시대가 온다느니 Y2K 문제에 철저히 대비하자느니 떠들면서 정작 자신은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면 지도자의 도리가 아니지요.”

“그대는 훌륭한 말씀을 하시는구려! 내가 항상 강조하기를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가히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항상 새로운 것을 터득하는 곳에 인간의 발전이 뒤따르는 법이오. 요즘 지구촌의 화두가 지식경영이라는데 지도자들이 컴퓨터를 몰라야 되겠소. 그대가 대학에 등록까지 해가면서 컴퓨터를 배운다 하기에 과연 실천정신이 투철한 영국인답다고 느꼈소.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시오.”

공자는 영국방문을 끝으로 귀국 길에 올랐다. 오늘의 역사도 2천5백년전의 그때처럼 어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머리가 깨어 있는 한 혼란은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그의 가슴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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