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호]

미군의 양민 학살, 그 추악한 상처

글 / 柳子孝 (유자효 SBS 라디오센터장)

숨겨져 왔던 끔직한 진실

1950년의 한반도에는 참으로 추악한 일이 저질러졌다. 그것은 동족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일제가 물러가고 38도선 이북에 진주한 소련군의 등에 업혀 권력을 장악한 김일성은 이남 적화라는 백일몽을 행동에 옮긴 것이다. 그의 이 백일몽으로 얼마나 많은 비극이 한반도 도처에서 빚어졌으며 아직도 우리는 그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가?

한국 전쟁은 김일성이 소련과 중공의 지원 아래 도발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초부터 국제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거기에다가 개전 직후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서 북한, 소련, 중공 대 남한, 미국, 서방 세계의 국제전으로 수행되었다. 그러다보니 이 시기의 한국인들은 세계 여러 나라의 군대들을 만나고 경험하게 되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런 상황 속에서 전선이 한반도의 남과 북으로 밀리고 밀어 가면서 각국의 군대들을 겪은 대표적인 군대는 남한군과 북한군 그리고 미군과 중공군이었다.

따라서 그 시기에 적 치하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4개국 군대를 비교해 볼 수가 있다. 즉 그들의 군기가 어떠했으며 민간인에 대한 자세는 어떠했는지를 그들은 알고 있다. 단지 남·북 대결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표현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때로는 증오를, 때로는 경멸을, 또 때로는 감사를, 때로는 감탄을 가슴에 묻고 반세기라는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그것은 살아 남아야 하는 자들의 고통이자 시련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았고 경험했던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다.

진실은 달빛에 가리워지면 전설이 되지만 햇빛 아래 드러나면 역사가 된다.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 두고 가까운 사람에게만 귓속말로 전해주던 그 진실이 어느 날 햇빛 아래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우선 시간의 영향이 크다. 반세기라는 세월은 사상적 대결이라는 얼어붙은 한반도 상황에도 변화를 가져 왔다. 이제 얼마만큼 할 소리는 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다가 진실의 폭로가 미국의 언론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점도 부담을 크게 덜어주는 일이었다.

이제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처참했어도 자리매김해야 할 역사

사건의 발단은 AP통신이 폭로한 노근리 학살이다. 1950년 7월 25일,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미국기의 무차별 기총 소사를 피해 마을 밖 굴다리 밑으로 모여든 수백명의 양민들에게 미국이 기관총을 난사해 피난민 1백50명에서 2백명이 숨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부녀자, 어린이, 노인이었다. 이 처참했던 학살이 세계 언론에 보도되고 당시의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유족들의 증언이 잇따르자 전국 곳곳에서 미군의 양민 학살 사례가 보고되었다. 경남 마산에서는 재실에 피난해 있던 주민들에게 미군이 기관총을 쏴 80여명이 숨졌다. 충북 단양에서는 주민들이 피난해 있던 굴에 미군기의 폭탄 투하와 기총 소사로 3백여명이 숨졌다. 경남 의령에서는 30여명이, 경남 함안에서는 1백여명이, 경북 구미에서도 1백여명이, 경북 예천에서는 50여명이, 경남 창녕에서는 80여명이, 경남 사천에서는 60여명이, 전북 익산에서는 1백여명의 민간인이 미군의 공격으로 숨졌다고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흰색 천을 흔들며 민간인임을 알렸는데도 학살이 계속됐다고 보고되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을 승전으로 이끈지 5년 뒤였다. 미국이 소련과 함께 세계의 양대 강대국으로 등장한 직후였다.

2차 대전으로 전쟁에 대하 노하우를 충분하게 확보하고 있던 미군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미국인들의 증언을 보면 상황이 짐작이 안가는 바는 아니다. 피난민 속에 섞여 게릴라식 공격을 가해오는 북한군에 대한 공포가 일으킨 히스테릭한 반응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에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부도덕, 비인간적인 살인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런 학살이 전국 도처에서 저질러졌다는 점에서 당시 미군 지휘관들이 인종적인 차별 의식으로 한국인에 대한 인명 경시의 분위기는 없었는지 의심하는 것이다.

세계 최강 군대의 부끄러운 도덕성

세계 최강국 미군의 군대가 고작 이 정도의 도덕성 무장과 군기밖에 안되었는지?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 양국은 한국 전쟁 때 저질러진 미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에 나서야 한다. 당시 관계자들이 이제 고령이라는 점에서 증언을 녹취, 확보해야 한다. 진실의 증언은 역사에 대한 의무이다. 그리고 책임 소재를 가려야 한다.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사과와 보상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번 사건으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사태의 본질은 전쟁이 갖는 추악성에 있다. 적 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했었던가? 수복 지구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민간인들이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숨져 갔던가?

당시 미군측 증언에 따르면 피란민 속에 숨은 북한군 잔당에 의해 미군 장교가 피격, 사망한 사례도 있고, 피아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미군이 극도의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물론 그것이 당시 사건의 면책 사유는 되지 못하지만, 일부 지휘관의 지나친 작전이 수립된 정황은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또한 이번 사건이 미군과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서도 안된다. 6·25가 발발하자 미국은 신속하게 개입을 결정했다. 한반도 적화를 막은 것은 전사한 미군 4만명의 공헌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상자들까지 합치면 11만명의 미군이 한국 전쟁에서 희생됐던 것이다.

전쟁이란 추악한 것이다. 특히 동족간의 전쟁은 더욱 추악하고 잔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전쟁은 금세기에 치러진 전쟁 가운데 가장 추악한 전쟁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는 적에 의해 저질러진 추악상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방군에 의한 추악상이 알려진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충격도 크다.

또 한가지 부끄러운 점이 있다. 이번 폭로가 미국의 언론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우리 언론들도 한국 전쟁 때 미군의 양민 학살 사례를 간헐적으로 보도했었다. 그러나 세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었다. 국력과 언론, 언론과 국익 등의 화두를 되씹게 한 계기도 됐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 전쟁은 추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추악한 전쟁을 막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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