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호]

반도체 선각자를 말한다

글 / 朴美靜 (박미정 삼성전자 홍보팀 부장·전 조선일보 기자)

경제위기 속의 효자산업

‘마법의 돌’,’현대 산업의 쌀’,’IMF 경제위기 속의 효자산업’,’한국을 대표하는 얼굴산업’. 이런 화려한 수식어를 앞세우는 산업의 핵심 물질이 바로 ‘반도체’이다.

얼핏 ‘반도체 산업’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내용은 잘모르더라도 왠지 멋있고, 첨단적이며 신세대적인 매력마저도 느껴진다.

사실 일정수준의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더라도 반도체가 무엇인가? 혹은 반도체의 개념을 설명해보라 하면 조금은 멈칫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 나라의 반도체 산업은 어느 정도 수준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막연히 세계적으로 꽤 알아주는 수준일 것이라는 정도의 대답은 쉽게 나올 수 있어도 16메가D램이 어떻고, 16KD램이랄지 64KD램 또는 256MD램 이라는 용어가 나오면 주눅들기가 십상일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떠 1기가(Giga)D램 반도체 얘기까지 나오면 깨끗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겠다는 지식인들도 솔찮게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반도체하면 과학자들이 연구개발한 것을 산업에 응용해 우리나라가 그 덕에 간신히 세계적으로 체면을 차리고 있다는 수준의 상식만 있었지, 1기가D램이 약 570평방밀리 크기의 칩속에 신문지 8천 4백장, 단행본 160권 분량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용량의 제품이라는 것은 삼성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만큼 반도체산업은 우리 일반인들에게는’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머언 당신’같은 산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최초, 최고의 연속기록

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이 반도체산업의 수위자리를 다투고있지만 그중 메모리 반도체분야만큼은 삼성전자가 세계1위를 몇해째 확고히 고수하고 있다.

말이 쉬워 ‘세계 1위’지 사실은 깜작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것이다. 우리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하나를 따기 위해서도 엄청난 노력과 재원을 투자해야 하듯이 이 반도체산업에서도 그야말로 ‘피땀어린’노력과 시운이 따르지 않으면 감히 1위 그것도 세계1위 자리는 넘보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다른 것은 몰라도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 삼성전자가 세계의 쟁쟁한 업체들을 물리치고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내가 삼성전자의 월급을 받고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라고 해도 별로 부끄럽지 않은 말인 것 같다.

그동안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에서 쌓은 위업을 요약하면, 우선 64메가 D램부터 1기가 D램까지 반도체 3세대 연속 세계최초 개발을 꼽을 수 있다.

또 16메가 D램부터 1기가 D램까지 연속 세계 최초 상용화, 그리고 93년부터 7년째 세계 정상고수라는 기록을 갖고 있으며, 4기가 D램의 공정기술까지 세계최초로 개발한 삼성전자는 오늘 현재까지 세계 반도체 기술과 시장을 이끌어나가고 있다.

무슨 일이든지 1등을 하거나 최고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일이 아닌 만큼 삼성전자가 한국을 대표해 세계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일본 사람이 보더라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가 왜 굳이 일본 사람을 들먹이냐하면 처음에 우리나라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 때만 해도 상당부분을 일본인들의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에 얽힌 뒷얘기들을 취재하다보면 한편의 장대하고 스릴 넘치는 대하드라마같은 감동을 느끼곤 한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 ‘운명의 키’를 움켜쥔 채 ‘건곤일척’의 심정으로 양자택일의 순간을 선택해야했고, 그 선택이 절묘하게 타이밍이 맞아떨어져 오늘날의 ‘위업’을 이룩해낸 ‘선각자’의 지혜와 결단력 앞에서는 숙연한 자세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언제부터인지 ‘국민 가수’니 ‘국민 배우’니 라는 수식어가 등장하고 그런 애칭으로 불리는 연예인들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듯이 이런 ‘선각자’야말로 ‘국민 경제인’으로 불리고 이미 지상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지만 전국민적으로 그 높은 뜻을 기려주는 그런 ‘그리운 사람’으로서 남아있으면 어떨지 싶은 소박한 뜻에서 그 ‘선각자’ 이야기를 잠시 소개하고 싶다.

물론 작가 김승옥이 언젠가 말했듯이 ‘아 인간은 다면체였습니다’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한 인간의 업적을 간단히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 자리에서 나는 단지 ‘반도체’라는 매력적인 ‘마법의 돌’의 측면에서만 그 선각자 얘기를 다루고 싶다는 말을 먼저 밝힌다.

칠순 선각자가 일으킨 드라마

반도체 산업은 흔히 ‘Crazy Business’라고 불린다. 기술의 변화가 너무 빨라 결과를 예측하기 어렵고 그런 상황에서 자칫 한 순간의 판단 착오로 무너지는 업체가 흔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은 1965년 12월 고미산업을 시작으로 페어차일드, 한국 시그네틱스, 한국마이크로, 모토로라 코리아, 한국도시바 등이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초기 반도체회사들은 한국 도시바만 일본이 투자하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계 외자업체들이었다. 전형적인 국제하청구조로 출발한 셈이다.

삼성은 일찍이 1974년 한국반도체 지분을 일부 인수하면서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투자는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이 ‘선각자’가 아랫사람들에게 “반도체가 뭐꼬?”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됐다.

1978년의 일이다. 이 ‘선각자’는 반도체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수시로 아랫사람들을 괴롭혔다(?). 그는 일본인 반도체 전문가 덴다 박사를 소개받는 자리에서도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2시간이 넘도록 꼬치꼬치 캐물어 일본인을 질리게 만들기도 했다.

1976년 당시 일본은 이미 반도체 산업을 국책산업으로 선포하고 일본 통산성도 NEC, 도시바, 후지쯔, 히다치, 미쓰비시 등 5개 반도체 업체를 지원해 초(초)LSI연구조합을 결성했다.

77년 일본은 16KD램을 개발, 78년부터 미국 시장에 수출했다. 일본열도에는 이미 반도체 선풍이 불고 있었던 것이다. 해마다 정초면 동경에 체류하면서 일본 산업계와 경제계는 물론 국제 경제계를 예의 주시하고 분석하던 선각자의 눈에 이런 현상이 그냥 지나쳐 갈 수는 없었다.

“나의 마지막 사업이자 우리의 대들보가 될 사업이다”이런 생각을 하며 선각자는 무릎을 쳤다. 거의 본능적인 후각으로 ‘큰 먹이’를 점찍은 선각자는 그때부터 자나깨나 반도체생각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선각자는 언제나 아랫사람들에게 엄청난 자료를 요구했다. 반도체와 관련된 보고서만 웬만한 남자어른의 키를 훌쩍 넘어설 정도였다.

그는 어떤 일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독하게 신중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이 따지고 또 따졌다. 그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다.

82년 12월초 선각자는 그의 아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 경기도 기흥의 반도체 공장부지를 둘러 보았다. 굉장히 추운 날씨여서 비서들이 말리는데도 한사코 직접 공장이 들어설 야산에 올라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나이 칠십이 넘었다. 돈 때문에 이렇게 힘들고 위험한 사업을 하겠느냐, 돈은 쓸만큼있다.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자산업은 지금처럼 부품조립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전자산업을 안정시키기위해서는 반드시 반도체산업이 필요하다. 지금 반도체사업을 하지 않으면 한국산업의 미래는 어둡다. 본인이 이제부터 반도체사업본부장이다”

마지막 승부수로 세계제패

칠순이 넘은 노인이 결연한 음성으로 이런 말을 하자 주위는 자연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후 5년여 동안 별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야말로 한편의 장엄한 드라마가 엮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선각자가 타계하기 한 두어달 쯤 전인 87년 9월, 아침신문을 보던 선각자는 침통한 표정으로 한남동 자택을 떠났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제품은 모두 외국의 복제품에 불과하다.단순히 모방하는 기술로는 결코 반도체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기사가 크게 나왔던 것이다. 그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병구를 이끌고 기흥의 반도체사업장을 찾았다.

“아침 신문 봤지? 우리가 남의 것을 베꼈다는게 사실인가? 영국은 증기기관하나를 개발해 1백년동안 세계를 제패했다.그런데 기껏 남의 것을 모방이나 하려고 내가 반도체사업을 시작했느냐?”

이미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건강에 이상이 있는 상태였지만 선각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아랫사람들을 독려했다. 그의 반도체사업의 취지와 목표는 바로 ‘영국의 증기기관’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미래를 먼저 보는 탁견과 신념을 가지고 반도체사업에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선각자는 반도체사업의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특히 새로 짓게 한 3라인 투자가 고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임원들은 이 투자에 회의적이었다. 가뜩이나 1, 2라인 건설로 적자였던 터에 회사 재정이 엄청난 손실을 입을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당시 회사 안팎에서는 이런 소리들이 슬금슬금 나돌았다. “반도체 사업 때문에 그룹이 위험하다”, “선대회장의 판단이 흐려졌다”, “선대회장이 이상해졌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랫사람들을 계속 독촉했다. “왜 늦느냐, 빨리 해라,우리에게 가장 좋은 기회가 오고있다” 이런 독려에도 공사는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착공일을 지정하면서 자신이 착공식에 참석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이렇게해서 선각자는 87년 8월7일 이 지상에서는 마지막으로 공식행사에 참석했다.

3라인 착공 3개월후 선대회장은 영면했다. 그후 3라인 투자가 ‘반도체 신화’의 요체이자 최고의 승부수였다는 사실을 단 한사람도 부정하지 않았다. 결과는 바로 오늘의 한국 반도체산업의 선두주자이자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반도체 메모리 분야의 최고봉 삼성전자로 맺어진 것이다.

3라인은 결국 선각자의 ‘마지막 승부처’이자 ‘마지막 유산’이었고 한국의 반도체 사업을’영국의 증기기관’에 비견할 만한 위대한 업적으로 끌어올린 불후의 기념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선각자가 바로 꼭 12년전 87년 11월 19일 타계한 삼성의 이병철 선대회장이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