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3월호]

대한민국 기업흥망사

과속, 과욕의 일장춘몽

공병호 박사, 본업 소홀한 실패교훈 분석

창업2세 인수, 차입경영 IMF 퇴출사례

2011-02-28_160838.jpg 베스트셀러 작가 공병호 박사의 대한민국 기업 흥망사가 실패의 교훈을 통해 100년 기업의 조건을 가르쳐 준다. 통상 기업수명은 30년이라고 하나 지난 70년대 우리경제 고성장기의 신흥그룹 가운데 평균수명을 채우지 못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과속, 과욕에서부터 경기급변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이건 경영부실과 도산은 기업인의 불명예를 넘어 국가와 사회적 죄악이라는 점에서 실패는 우리경제의 중요한 교훈으로 활용돼야만 한다.

두꺼비 진로와 쌍방울의 비운

1970년대 중노동 시절의 동반자 두꺼비 진로 소주가 팔려간 것은 6070세대에겐 비감이다. 진로는 창업 80주년을 넘어 한동안 전국 소주시장 점유율 55.3%로 망할 수 없는 토종이었다.

진로는 평안도 용강 출신의 장학엽(張學燁) 창업자가 고향에서 빚기 시작하여 6·25때 부산에서도 재래식으로 주조했고 1954년 상경하여 영등포에서 서광주조로 자리 잡아 전후 춥고 배고픈 시절과 70년대 경제개발기 과로의 퇴근길을 달래준 국민주였다.

서광주조는 1966년 진로로 개칭하여 창업주의 절치부심을 두꺼비처럼 뚜벅뚜벅 걸었지만 장학엽 옹의 별세 후 장조카 장익룡 회장이 경영을 맡아 창업 2세와 경영권 분쟁을 겪었다. 198830대의 2세 장진호 회장이 경영을 맡아 과감한 도전으로 본업을 벗어나 식품, 백화점, 건설, 중공업 등으로 경영 다각화를 서둔 것이 탈이었다.

장 회장이 탈 소주를 급속히 추진하다가 2004년 법정관리로 넘어갔으니 졸속과 무리였다는 평가를 면치 못한다.

쌍방울 메리야스는 70년대 명절이 오면 부모님께 드리는 선물 1호였다. 전북 이리 출신의 이봉녕(李奉寧) 이창녕(李昌寧) 형제의 이름자를 딴 우매의 뜻이 쌍방울이다.2011-03-22_111423.jpg

1954년 메리야스 도매업으로부터 시작한 쌍방울은 70년대 백양, 독립문과 함께 3대 메리야스 브랜드로 시장에 뿌리를 내렸지만 1979년 이봉녕 회장의 장남 이의철 사장이 사업 확장의 의욕으로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골프장을 확장하고 무역부문을 분리하여 상사를 설립하고 기성복 시장에도 진출했다. 또한 2세 경영인들이 관심을 갖기 쉬운 프로야구단을 창설하고 무주 리조트 개장, 동계 유니버시아드 유치 등으로 걷잡을 수 없이 일을 벌여 나갔다. 그러다가 IMF 외환위기 파고 속에 부도와 법정관리로 몰락했으니 역시 과욕도산이라고 지적된다.

세계 경영 대우그룹 해체의 참사

김우중 회장의 대우그룹 해체도 IMF 위기를 탓할 수 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쉽고 안타깝게 생각하는 경우이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면서 일중독에 빠졌던 김 회장이 망명객 신세로 출국하자 정부가 악덕기업인으로 공개 규정하고 노조가 해외로 체포조를 파견하는 온갖 수모 속에 병든 노인으로 귀국하여 무려 23조원이 넘는 추징금 선고를 받은 죄인이 됐으니 1970년대 성공신화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2011-03-22_111859.jpg

김 회장은 섬유수출 스타로 출발하여 기계, 조선, 자동차 등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정상화시킨 뛰어난 경영력에다 앞서가는 세계경영으로 대우를 대한민국 글로벌 브랜드로 격상시킨 큰 유공자이다. 김 회장은 재계서열 3위에다 전경련 회장으로 잠시나마 대권 후보군으로 꼽혔지만 IMF 외환위기 때 국내에서 먼저 발이 묶여 수많은 해외사업장의 파산으로 이어졌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세계경영을 비판하자면 무리한 차입경영에다 김 회장 1인 경영에서 탈이 났지만 김대중 정권에 적극 협조했다가 오히려 정치적으로 타살되지 않았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우그룹은 해체되고 김 회장은 빈손의 죄인신세로 동남아를 유랑하지만 아직도 국내외 시장에서 대우 브랜드의 시장가치는 막강하고 대우출신 CEO들은 많은 기업으로 출가하여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으니 결코 대우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없다. 2011-02-28_160856.jpg 단지 해체되지 말아야할 그룹을 누가 도산시켰느냐는 의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성그룹과 뉴코아그룹의 짧은 신화

아파트 신화로 기억되는 우성건설그룹 최승진 회장은 성공에 도취되어 지나친 기업인수에 열중하다 도산한 경우이다. 최 회장은 그의 부친 최주호 회장의 도움을 받았지만 우성건설그룹은 그의 자력으로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2011-02-28_160901.jpg 선친 최주호 회장은 한국모방, 개성제지, 우성그룹 회장을 역임한 대경영가로 아들 4형제를 모두 그룹회장으로 길러냈다. 장남 최낙철 계성 제지그룹 회장, 차남 최왕언 성부실업 회장, 3남 최윤식 동양고속그룹 회장, 4남 최승진 우성건설그룹 회장 등이 한 집안에서 나왔다.

이중 최승진 회장은 외대 3년생이던 1974년 동대문 중화동의 부친 땅 4천 평을 담보로 은행돈을 빌려 중화주택을 설립했다가 우성주택 우성건설 등으로 4년여 만에 10위권의 주택건설 전문가로 발전했다.

최 회장은 이를 바탕으로 1985년 국제그룹이 해체될 때 계열 원풍산업을 인수하고 86년에는 대전 유성의 ()만년장을 인수, 우성관광으로 개편했다. 이무렵 아파트 붐 속에 우성아파트는 명품이란 유명세를 타고 국내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우성그룹이 기업인수를 통해 종합건설그룹을 지향하는 90년대에 이르러 부동산 경기가 한번 침체하자 미분양 사태가 발생하여 걷잡을 수 없는 연쇄작용으로 나타났다. 우성건설은 자구노력을 전제로 2천억 원의 협조금융을 지원 받았지만 비자금 사건이 불거져 나오고 삼풍백화점이 붕괴하자 시공사로서 검찰에 불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96년 초 부도가 발생하여 법정관리로 갔다가 지난 2000년에 파산 선고되니 아파트 1위의 명예도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부동산과 백화점으로 불같이 일어났던 뉴코아 김의철(金義喆) 회장의 고성장도 일장춘몽 격이다. 고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건장한 청년 김의철은 1969년 한신건영에 입사하여 2년 만에 과장이 되고 김형중 회장의 사위가 됐으니 속칭 출세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강남 개발붐을 눈여겨보고 반포일대 땅을 싼값으로 사들여 아파트와 상가 전문가가 됐다. 그 뒤 창업자의 장남 김태형이 경영권을 승계하기에 앞서 처가에서 독립하기 위해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옆 뉴코아쇼핑센터 1층에 슈퍼마켓을 독립경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롯데, 신세계, 미도파 등 전통 있는 백화점들이 강북의 상권에 머물고 있어 김의철의 눈에 강남 상권은 무주공산 격이었다. 1981년 김의철의 ()뉴코아가 독립하여 마치 속도전을 벌이듯 기업들을 인수하니 무려 18개 계열사 그룹으로 비대해졌다. 그러나 막대한 차입금이 탈이었다. 선단경영, 차입경영이 도마 위에 오르자 뉴코아그룹은 199711월 해체되고 뉴코아는 법정관리를 거쳐 이랜드로 넘어가니 혜성처럼 등장한 김의철의 이름도 사라졌다.

삼성가의 새한그룹과 대농그룹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차남 이창희(李昌熙) 회장이 남긴 새한그룹의 도산은 무상과 비정으로 기억된다. 새한그룹은 이창희 회장이 1991년 몹쓸병으로 떠난 후 장남 이재관 부회장이 제일합섬을 계열 분리하여 그룹으로 구축했다.2011-03-22_112135.jpg

새한미디어, 새한텔레콤 등으로 또 하나의 삼성가() 독립그룹의 골격이 형성되자마자 IMF 파고에 쓰러졌다. 필름사업에 1조원의 과잉투자가 문제되어 워크아웃으로 넘어갈 무렵 삼촌 이건희 회장이 구제해 주지 않겠느냐고 관측되었지만 예상은 빚나가고 말았다.

삼성은 이병철 회장 이래 망하는 기업을 구제해서는 안 된다.”는 내부정신이 있었을 뿐더러 만약 삼성그룹이 지원해 준다면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부당 내부거래라는 벌떼 같은 공격을 받을 참이었다. 이같은 국민정서 때문인지 이병철 회장의 손자 이재관 회장은 겨우 3년여 만에 전 재산권을 포기하고 물러났으니 삼성그룹 차남가계의 기업사는 종식되고 말았다.

대농그룹 박용학(朴龍學) 회장은 대한농산으로부터 대 그룹을 축성한 창업 1세대로 추앙받아야 하겠지만 2세 박영일(朴泳逸) 회장시대에 무너지고 말았다. 박용학 회장은 비료, 수산물, 해운에서 돈을 벌고 쌍용그룹 김성곤 회장이 아끼던 금성방직과 태평방적을 인수하여 면방과 백화점 등에 이르기까지 2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렸다.

그러나 장남 박영일 회장은 미국 조지타운 대 졸업에다 인기배우 안인숙씨와 결혼하여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사업 다각화를 위한 기업인수 때 대농과 미도파의 과다한 지급보증을 끌어드린 것이 무모했다.

차입경영이 한창 문제이던 19975월 부도유예 협약을 맺고 10여개 계열사를 매각하는 자구노력을 펼쳤지만 채권단이 회생불능으로 판정하여 그룹을 파산시켰으니 부자 경영인의 명예는 완전 소멸되고 말았다.

한일그룹과 갑을그룹의 M&A 압사

한일합섬의 김한수(金翰壽) 회장은 직물과 포목상에서 종합무역상사를 일으키고 배움이 소원이던 여종업원들을 위한 한일실업고를 설립, 박정희 대통령을 감동시켰다. 그러나 김 회장이 1982년 타계하고 미국 유학 다녀온 장남 김중원(金重源) 회장이 경영을 맡아 정신없이 기업을 인수하다 무너졌다.

한일합섬은 1986년 국제그룹이 해체될 때 부산경남권의 연고권을 바탕으로 국제그룹의 신발, 무역부문과 호텔, 골프장, 용산빌딩 등을 한꺼번에 인수했다. 당시 특혜인수설이 나돌 만큼 순식간에 그룹의 크기를 두 배로 키웠지만 빚더미에 올라탔다.

다시 87년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복합비료공장인 진해화학을 인수하고 89년에는 한일레저개발을 인수하여 한일합섬을 한일그룹을 개칭했다2011-03-22_112242.jpg . 그러나 1조원이 넘는 부채에다 섬유와 신발산업이 안고 있는 노사문제가 표출되었다.

저임금에다 3D 기피업종으로 사양화 추세 속에 적자를 이기지 못해 공장을 해외로 이전했지만 부채비율 560%를 극복할 방도가 없어 965월 부도처리 되었다. 김한수 회장의 필생의 꿈이 서린 한일합섬은 동양시멘트의 이양구(李洋球) 회장이 남긴 동양그룹의 동양메이저로 팔자를 고쳤다.

대구 직물상 박재갑(朴在甲) 박재을(朴在乙) 형제의 갑을(甲乙)그룹도 급속한 다각경영, 확장경영으로 도산한 경우이다. 박재갑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막노동과 점원생활을 거쳐 포목상으로 발전하여 1958년 신한견직을 설립, 청와대에 견직물 선물을 보내 박 대통령이 박재갑이 누구냐고 물었다는 무명 기업인이었다.

그렇지만 1982()갑을을 설립하여 방적, 염료 뿐만 아니라 건설과 무역 등으로 그룹을 형성하여 금탑산업 훈장, 1억불 수출탑까지 수상했으니 성공한 형제 기업인이다. 그러다가 박재갑 창업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동생 박재을이 동국실업, 갑을건설 등 9개사, 창업 2세 박창호(朴昌鎬)()갑을, 갑을방적 등 6개사를 맡아 분가했다.

박창호 회장의 ()갑을은 면방경기 침체에다 임금인상 압력 등으로 과감한 탈 섬유를 선언하고 전자, 통신에서 호텔, 레저산업 등으로 숨 가쁘게 확장하면서 해외로 나가 세계 3대 면방전문을 이룩하겠다고 도전했다. 중국과 스리랑카 및 우즈베키스탄과 타리키스탄 등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할 무렵 IMF 외환위기로 워크아웃 됐다가 2003년에 회사정지로 도산하고 말았다.

쌍용그룹의 큰 성공, 비참한 실패

쌍용그룹 김성곤(金成坤) 회장은 인품과 포용으로 정치에서 성공과 실패를 겪었고 장남 김석원(金錫元) 회장은 선친의 유지를 어기고 정치권에 입문했다가 경영에 실패했다.

성곡 김성곤은 공화당 4인방으로 여야의 타협을 잘 이끌어 냈지만 오치성 내무부장관 해임결의안 반란으로 수모를 겪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재직 중 급서한 불운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성곡이 남긴 쌍용은 종합상사로 수출입국에 공헌하고 동양 최대의 동해 시멘트공장으로 산업화에 기여했고 오일쇼크 때는 이란석유공사를 끌어들여 한·이 석유를 설립, 원유의 안정적 확보로 국익을 증진시켜 오늘의 S-oil을 남겼다.

반면에 2세 경영인 김석원 회장은 유별나게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하동환(河東煥) 창업자의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여 쌍용자동차로 개편했다가 IMF때 그룹이 도산하는 비운을 맞았다. 김 회장은 사정이 다급해지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경영에 복귀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쌍용차는 김우중 회장의 대우로 넘어갔다가 대우그룹 해체로 중국 상하이자동차를 거쳐 지금은 인도 마힌드라그룹으로 다시 팔려갔다.

김 회장의 동생 김석준(金錫俊) 회장은 지금도 쌍용건설 회장 직함으로 자신의 인맥을 통해 싱가포르 프로젝트 등을 잘 운영하고 있지만 주식지분이 없는 전문경영인 입장이니 성곡 김성곤 회장의 사업은 2세 경영 때 불명예로 끝난 셈이다.

삼미그룹, 고합그룹의 허무한 종말

지금은 철거되고 말았지만 청계천 고가도로 초입에 우뚝 선 31116m의 삼일빌딩의 옛 주인 삼미그룹 김두식(金斗植) 회장의 사업도 비운의 연속으로 끝났다. 19693·1절을 기념하여 준공된 삼일빌딩은 여의도 63빌딩이 세워지기 전까지 국내 최고빌딩에다 전경련이 입주했던 재계의 상징이기도 했다.2011-02-28_160919.jpg

그룹 창업자인 김두식 회장은 비누, 식용유 장사로 출발하여 6·25 전쟁복구용 목재사업으로 대성했다. 1959년에 인천 만석동에 국내 최대 규모의 제재공장을 설립하고 해운, 관광에다 삼미특수강으로 방위산업 육성에도 헌신했다.

그러나 1977년부터 골수암으로 3년여 투병하다 별세한 후 워싱턴 대에 유학한 장남 김현철(金顯哲) 회장이 30대에 경영권을 맡아 인기사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프로야구 삼미 슈퍼스타 창단, 백화점과 조선소 인수 등으로 재계서열 18위까지 올랐지만 1980년 제2차 오일쇼크로 도산위기를 맞았다.

오일쇼크가 해운과 목재사업을 타격하자 삼일빌딩을 비롯하여 프로야구팀과 부동산 등을 매각하고 그 대신 삼미특수강을 살리고자 창원공장을 증설하고 북미공장을 인수했지만 특수강 경기가 침체하자 적자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단자회사들이 대출금 회수에 나서자 사업구조조정도 때를 놓쳐 그룹이 부도나고 특수강은 포스코로 넘어갔다.

고합그룹 장치혁(張致赫) 회장은 독립 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인 장도빈 선생 후예로서 나일론 종합 플랜트 국산화로 일제를 추방해낸 유공자이다. 해피론 개발과 수출, 고려종합화학과 석유화학 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가 유동성 위기를 맞았지만 1988년에는 제2창업을 선언하고 울산 석유화학단지에 섬유원료에서 제품까지 수직 계열화를 이룩했다.

장 회장은 91년부터 대북사업에 앞장서고 선친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연해주 개발에도 나섰다. 1992년 한·중 수교의 막후활동으로 공헌하기도 했지만 IMF가 왔을 때 워크아웃 제1호의 불명예를 안고 분식회계 대출로 기소되기도 했으니 북방 프로젝트에 너무 열중한 것이 탈이 아니었느냐는 지적을 받는다.

극동건설, 동아건설, 신동아, 한보철강

극동건설 김용산(金用山) 회장은 1953년 설립한 극동 상호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의 반열에 오르는 건설명문가이다. 그러나 퇴계로의 극동빌딩은 IMF때 외국 투기자본으로 넘어갔다가 지금은 웅진건설로 내국인에게 되돌아 왔지만 김 회장 자신은 분실채권 관련 법정분쟁으로 유죄선고를 받고 2007년 불명예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김 회장이 1960년에 건설한 부산 해운대 극동호텔은 박 대통령이 투숙한 유명 호텔이었지만 지금은 헐려나갔고 퇴계로의 21층 대연각 호텔은 711225일의 대화재로 168명이 사망하여 전 세계로 중계된 참화였다. 그러나 화재사고 후 극동건설은 중동건설 붐과 함께 불같이 일어나 국제그룹 해체 시에는 건설부문과 동서증권을 인수했지만 부채에 시달려 무너지고 말았다. 너무나 안정적, 보수적으로 경영해 오던 극동건설이 지나치게 확장경영하려다 부실화됐다고 볼 수 있다.

동아건설그룹도 최준문 회장의 창업 이래 한 번도 부실위기를 겪지 않았지만 2세 최원석(崔元碩) 회장 때 불운으로 무너졌다. 미수교국 리비아에서 사상 최대 규모의 대수로 공사를 수주했던 최 회장은 부채보다 자산이 많은 상태에서 스스로 경영권을 포기하는 형태로 해체됐으니 지금도 일각에서는 누가 동아를 파산시켰느냐는 지적이 나온다.2011-03-22_112459.jpg

여의도 63빌딩으로 상징되는 신동아그룹도 총수가 구속되는 곡절 끝에 창업자 인맥이 퇴출됐다. 피난민 최성모 회장의 창업이념에다 2세 최순영 회장의 신앙심이 유별났지만 김대중 정권하에서 정치자금을 내지 않은 밉상으로 찍혀 대한생명이 부실로 처단됐으니 비운을 넘어 정치적 사건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보철강 정태수(鄭泰守) 회장은 노태우 대통령 시절의 수사비리 사건과 김영삼 정부시절 한보철강 로비사건으로 국민적 코미디를 연출한 화제의 기업인으로 기억된다. 정 회장은 국회 청문회를 통해 머슴론을 제기하여 화제가 됐고 로비 받은 혐의로 출석한 청와대 총무수석이 깃털론으로 세상을 웃긴 일이 생생하다.

정 회장의 한보철강은 현대제철로 넘어가 정몽구 회장에 의해 선대 정주영 회장의 필생의 꿈인 일관제철소로 되살아났지만 정 회장 자신은 80이 넘은 노인으로 중앙아시아 어딘가에 숨어 망명생활을 하는 처지이다.

해태제과, 신호그룹, 나산그룹, 거평그룹

일제시의 제과공장을 뿌리로 하는 해태제과의 패망사는 한국기업의 장수사를 기원하는 심정에서 보면 매우 안타깝다. 해태제과는 8·15 직후 민후식 사장, 신덕발 부사장, 박병규 전무, 한달성 공장장 등 4인이 동업으로 창업한 특이한 기업사이다.

1977년 박병규 사장이 타계하면서 동업 4인의 2세들이 계열사를 맡아 자율경영 하면서 외형적 그룹체제로 박 사장의 2세 박건배(朴健培) 회장이 대표해왔다. 동업 42세들은 민후식 사장 2세 민병헌이 해태유업, 신덕발 부사장 2세 신청차가 해태관광, 박병규 전무 2세 박건배가 해태제과와 음료 등을 나눠 맡았다.

1988년경 박건배 회장이 지분을 분리 독립하면서 해태기획 코래드를 설립하고 해태 타이거즈 프로야구단을 창설하면서 제2창업으로 전자와 중공업 등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박 회장 자신은 보이스카우트와 대한역도연맹 회장 등 대외활동에 매진한 것이 정도는 아니었다.

해태가 98년 부도가 났을 때 박 회장의 위장계열사와 비자금 조성 및 분식회계 대출비리 등이 바로 외도경영의 실패를 말해준다.2011-02-28_160929.jpg

신호그룹의 이순국(李淳國) 회장은 경북사대부고, 서울상대를 나온 공인회계사로 경영을 잘 알고 경제원론에 밝았지만 무리한 차입경영의 고비를 넘길 수 없었다. 이 회장은 1968년 한국제지로부터 제지업 경영을 눈 익혀 보고 1977년 볏짚으로 만드는 동방펄프를 인수한 후 부실기업을 인수하여 경영을 정상화하는 방식으로 20여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을 형성했지만 과잉부채에 눌려 1990년 법정관리로 넘어가 기업인생을 마감했다.

나산그룹 안병균(安秉均) 회장은 전남 함평에서 무일푼으로 상경하여 막노동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성공신화를 이룩했지만 짧은 유명세 만에 추락했다. 안 회장은 극장식당 무랑무즈와 초원의집을 인수하여 당대의 코미디황제 이주일씨를 출연시키고 홀리데인 인 서울마저 인수하여 바닥에서 하늘로 부상했었다.

1980년에는 종로5가에 의류도매센터를 설립 제조업으로 변신하고 81년에는 강남 테헤란로의 땅을 매입하여 부동산업계로 진출했으며 이듬해 여성의류로 나산실업을 설립, 대 기업가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나산실업은 1983년 여성 하이패션 조이너스를 출시하여 크게 히트친 후 여성 하이 캐주얼 꼼빠니아’, 남성 정장 트루젠으로 성공하여 나산주택, 나산건설에서 인테리어, 백화점, 스포츠클럽, 종합금융, 프로농구 등으로 나산그룹 칭호를 얻었다.

1990년도 나병균 회장의 신고소득이 47억 원을 넘어 재계순위 11위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급성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IMF 파고를 넘지 못한 채 98년 부도로 무너졌다.

거평그룹 라승렬(羅承烈) 회장도 전남 나주에서 맨손 상경하여 자수성가한 성공특례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나 회장은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 등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경리학원에서 공부하여 삼강 아이스크림 경리부에 입사하여 성공가도를 달렸다.

부동산 투자로부터 기업안목을 넓혀 1990년 주택건설에서부터 오피스텔, 아파트, 콘도미니엄으로 발전하고 1994년에는 대한중석을 인수하여 경제계의 화제가 되었었다. 그러나 역시 성급한 확대 경영과 무리한 기업인수로 경기변동의 고비를 넘길 수 없었다.

기업인수에 자신만만했던 열의로 한국 시그네틱스와 포스코 계열 포스코켐까지 인수하고 종합금융과 한남투자금융까지 인수한 후 IMF 고비에 도산하고 말았다. 계열사의 편법지원과 업무상 배임혐의 등으로 무너지면서 수많은 계열사들이 모래성처럼 줄줄이 부도처리 됐다. 그러나 자수성가한 바탕이 남아있어 일부 부동산 자산으로 재기의 가능성까지 이야기되고 있으니 앞으로 나승렬 회장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될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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