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호]

군인과 전통

글 / 徐慶錫 (서경석 예비역 중장)

자식을 전사로 키워온 전통

인류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전쟁은 시대와 장소 및 교리와 전투방법에 따라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따라서 승패의 요인을 달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총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운 것은 군인이며, 승패는 그 군의 전통이 어떠하냐에 좌우된 것도 사실이다.

손자는 知兵之將(지병지장), 民之司命(민지사명), 國家安危之主也(국가안위지주야), 즉 “용병을 잘하는 장수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맡은 자이며, 국가 안위의 주인공이다.”라고 했다.

한시대의 전쟁을 이끄는 군인의 능력은 군인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군인의 피와 뼈 속에 오래 오래 그 전통이 살아서 숨쉬고 있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스파르타(Sparta)의 어머니들은 전장에 나가 죽어서 돌아온 자식을 묻으면서 “나는 스파르타를 위하여 죽은 자식을 낳았으며 이제 그것을 이루었다.”라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아들이 싸움터에서 잔꾀를 부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들을 돌맹이로 쳐죽인 어머니도 있었다고 한다.

스파르타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튼튼하고 잘 생긴 아이는 기르고 허약한 아이는 타이게루스 산에 내다 버렸다.

약한 아이는 본인이나 부모, 국가를 위해 아무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자식을 전사로 키워야만 남의 나라 노예가 되지 않는다는 사회여건이 전사를 키우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BC 753년에 건국된 로마제국이 처음에는 작은 도시 국가였으나, 500년 후에는 유럽과 지중해까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군단’의 전통 때문이었다.

병역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으며, 병역을 특권으로 간주하고 그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당시 로마 군대의 강한 군기는 오늘날까지 각국 군대에 그 전통으로 이어지고 있다.

몽골이 징기스칸이 등장한 이후 조그만 부족들의 투쟁에서 전 세계를 전율케 한 강국으로 성장하는데는 징기스칸의 네 아들이 선두에서 진두지휘하여 서방 정벌을 대승으로 이끌었다.

이스라엘 유학생의 귀국 참전

중동전에서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아랍제국에 둘러 쌓여 있으면서 아랍의 대군과 싸워 백전백승 할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로마군단에 의해 멸망당한 예루살렘에서 겨우 도망나온 960명의 유태인은 마사다 요새에 몸을 숨겼다.

로마군에게 포위당한 이들은 수개월을 버티다가 모두 자결의 방법을 택했다. 지도자인 엘리아잘이 최후연설을 한 후에, 전원 자살했다.

“치욕을 당하기 전에 우리의 아내를, 노예 노릇을 하기 전에 우리의 자식들을 죽이자…. 우리는 식량을 남겨두고 죽자. 왜냐하면 우리는 먹을 것이 없어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결의에 의해 노예보다는 죽음을 택했음을 증명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아내와 자식을 죽였고 남은 남자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그 중에 10명이 뽑혀, 남자들을 다 죽이고 10명은 제비뽑기로 1명을 뽑아 그가 9명을 죽이고 자기는 자살했다.

이스라엘 장교들은 임관식때 마사다 요새에서 엄숙히 임관선서를 하면서 조상의 정신을 읽는다.

마사다 요새의 비극이 벤 구리온, 모세 다얀 장군을 위시하여 이스라엘 국민뿐 아니라 군인들의 조국수호에 대한 전통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6일 전쟁시, 미국 유학 중인 이스라엘 학생은 귀국하여 전선으로 뛰어갔고, 아랍학생은 국가의 귀환명령이 두려워 애인과 함께 휴양지로 도망가 버렸다. 2백50만의 이스라엘이 1억이 넘는 아랍과 싸워 이긴 저력이고 원동력이다. 이것이 전통이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2차대전시 16살의 나이로 군용 트럭운전사로 근무했고, 부군인 필립공은 해군대위로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독일군과 싸웠다.

앤드류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시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여 동료들과 똑같이 전투에 참여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휩쓸 때 넬슨 제독은 1805년 트라팔카 해전에서 프랑스,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자신은 적탄에 맞아 쓰러져서 “나는 조국에 나의 의무를 다했다. 상황은 어떤가?”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뒀다.

2차 대전시 수상인 처칠은 해군장관시절인 1915년 다다넬스 전역에서의 실패를 자인하고, 장관을 사임하고 유럽전선으로 가 육군소령으로 참전 솜므전투와 배르당 전투에서 대대장 및 여단장으로 전투를 하였다. 배운 자의 솔선수범이 영국군의 전통이다.

한국전쟁 중 미장성아들 142명 참전

한국전쟁시 미 해병들은 대부분 예비역이었으나, 소집령이 내리자 모두가 한국전선으로 달려왔다.

해병대 전사자 중에는 부자가 참전, 아버지는 해병 제1항공사단장으로, 아들 헤리스 중령은 예하대 대대장으로 원산에 상륙 후, 장진호 북방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한국전쟁동안 미국 장성급의 아들들이 142명이 참전하였으며, 그중 35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UN군 총사령관 크라크 대장의 아들은 저격능선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싸우다 중상을 입었고, 미 8군사령관 밴프리트 장군의 아들은 B-26폭격기를 몰고 북폭을 나갔다가 전사했다.

장진호 전투시 미 해병 얀시 중위는 영하 30℃이하의 날씨에서 180명의 중대원이 23명으로 남을 때까지 싸웠다. 소집되기 전에 고향 술집에서 기도를 보던 얀시 중위는 중공군의 땡땡 얼은 시체로 진지를 구축하고, 실탄이 떨어지자 적의 소총과 수류탄을 회수해 와 사용하고 한쪽 팔이 남아 있거나 한쪽 눈이 남아 있으면 옆 전우가 계속 총을 쏘도록 실탄을 장전하고 소총의 탄창을 갈아 끼워주는 역할을 하며, 죽을 때까지 싸웠다. 미해병대의 전통이다.

6·25의 육탄 10용사

맥아더 장군은 1차 대전시 그가 대령때 미 42사단(Rainbow)의 참모장을 했다. 독일군을 두려워하고 사기가 땅에 떨어진 부대를 위하여 야구 복장에 말채찍을 들고 번쩍거리는 승마용 장화를 신고 총도 안 갖고 일개 소대 병력을 데리고 독일군 기지를 습격하여 독일군 포로를 잡아 포로의 등에 무등을 타고 말채찍을 휘두르며 개선했다.

사단장의 노기 띤 꾸지람을 받았지만 병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팻튼 장군은 유럽을 휩쓸고 전진할 때 그의 사위는 중령으로 대대장 임무를 수행하다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은 나라로 타국에 비해 훌륭한 군인이 많이 있었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 신라의 품일과 그의 아들 관창, 황산벌의 계백 장군! 백의 종군하신 이순신 장군, 이등박문을 쏜 안중근 의사, 6·25때는 육탄 10용사가 있었다.

우리의 조상과 선배들에게서 군인의 성스런 전통이 살아 숨쉬고 있다. 군인의 의무인 목숨을 내걸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더 숭고한 가치는 없다. 그러므로 군인의 전통은 국가 보위의 주춧돌이라 할 수 있다. 이 전통은 묻혀지지 말고 살아서 우리의 맥박 속에서 살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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