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호]

은행인들 수난시대

부실책임 손해배상

공적자금투입 후 추가부실

면책기준 못 믿고 전전긍긍

은행장 도덕적 해이의 퇴출

은행장 인사에 개입하는 외부 입김은 없다.

은행개혁 이후 정부는 공식적으로 은행장 인사에 개입하지 않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사회가 달라졌다니 이사회에서 선출하거나 퇴출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이사회에서는 은행장 눈치를 안보는 사외이사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유로운 위치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사외이사가 은행장 인사에 개입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 사실로 인정할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런데도 요즘 은행장들의 입지가 불안하다. 대폭 물갈이설이 나돌고 있다는 소식이다.

은행개혁을 통해 막대한 공적자금이 투입되었으니 부실경영에 책임이 있는 은행장들을 그냥 둘 수 있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모럴 해저드라는 말로 부실을 남기고도 책임지지 않는 행태는 없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정부는 은행장 인사에 개입하지 않지만 무책임하거나 무능한 은행장은 퇴출되고 말 것이라는 입장이다. 경영책임이 은행장에게로 돌아간 이상 경영실패의 책임이 바로 은행장에게 있지 않느냐는 뜻이다.

옳은 말이다. 경영을 잘못하여 공적자금으로 연명하고 있는 은행은 인사개혁을 통해 책임경영 풍토를 확립해야 하는 것이 원론이다. 이렇게 해서 내년 주총을 계기로 은행장의 도덕적 해이는 전부 퇴출 당하고 말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은행개혁이 인사의 개혁으로부터 이뤄져야함은 상식이다. 그렇지만 유능한 개혁적 인사가 발탁된 은행의 경우도 공적자금이 투입된 이후에도 정상화가 지연되고 있다. 그리고 유능한 은행장은 곧 경영실패로 퇴출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공적자금 64조원을 투입한 금융산업 구조조정으로도 은행은 정상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유능한 인사도 은행장이 되고나면 부실에 굴복하여 경영실패자가 되고 마는 것일까.

부실규모 키우는 구조조정

금융산업구조조정이 공적자금만 소화하고 경영정상화와는 먼길을 걷고 있다는 혹평이 있었다.

국제 신용평가 기관인 무디스사가 연차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은행계획을 수준이하로 평가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국정부의 개혁의지가 퇴색되고 있는데다 구조조정 비용 64조원이 턱없이 모자란다고도 지적했다.

그리고 여신 심사과정에서도 오랜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잦은 인사이동으로 은행 전문가가 양성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은행산업에 외국인자본의 참여를 허용하고 중기적으로는 많은 은행을 민영화할 방침이라고 하나 민영화 이후에도 한국정부는 계속 은행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무디스사가 은행개혁을 의도적으로 저평가하려는 시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이다.

물론 반론이 없을 수 없다.

재경부가 해명자료를 통해 낡은 자료를 기준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최근의 실상이 반영되지 못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대우사태가 마무리 된 이후 은행실사팀이 방한하여 조사하면 다른 내용이 발표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표시한바 있다.

우리가 보기에도 은행개혁이 순조롭지는 못하지만 그토록 혹평의 대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은행은 거의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으로 알려졌다.

경제는 회복되고 대우사태와 투신권 문제는 수습되었다지만 은행권의 부실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고 들린다. 그래서 추가 공적자금 투입과 2차 구조조정설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다시 은행을 구조조정한다는 것은 퇴출이나 합병을 뜻할 것이고, 이에 따른 은행장과 은행인들의 정리를 의미하지 않겠는가.

대우사태 수습과정을 통해 은행권은 적어도 16조원의 손실을 부담하게 되었다.

출자전환을 비롯하여 이자감면과 전환사채 인수 등을 통한 채무조정 대상금액이 12조5천억원. 그리고 수익증권 투자에 따른 간접 손실액이 3조5천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에다 새로운 자산건전성 기준에 따라 추가 적립해야할 충당금 부담이 1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니 구조조정을 단행했다고는 하나 지금 이 시각에도 은행은 부실로 치닫고 있지 않느냐고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면책기준 있어도 책임이 두렵다

은행인들의 사기도 말이 아니라는 소문이다.

은행인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언론이 은행을 비판할 때마다 더욱 움츠리고 몸조심하기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여신담당 임원자리가 기피의 대상이라 하고 지점장 자리도 모두가 싫다고 한다. 세상이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은행 풍속도가 너무나 갑자기 달라진 모양이다.

은행인의 꽃이라는 지점장 자살사건이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다. 오죽했으면 고통과 긴장의 중압을 자살로 모면코자 했을까.

가능하면 지점장 재량권을 행사하지 않고 본점에 심사를 의뢰하여 적격판정을 받고서야 대출을 결정하는 신세라고 한다. 지점장이 재량권 확대를 요구하고 그 재량권 범위내에서 신속히 대출을 집행해야 고객관리도 되고 영업실적도 올라 갈터인데 왜 주어진 권한도 행사를 주저한다는 말인가.

은행인들이 짊어질 수 없는 책임에 쫓기고 있다고 한다. 대출했다가 못 받으면 퇴직이후까지 책임이 따라 오니 왜 누가 재량으로 대출하겠느냐는 입장이다.

IMF이후 은행인의 도덕적 해이가 문제시된 것이 사실이다.

은행은 망하고 있는데 경영실패의 책임은 없고, 퇴직금만 챙겨 나가느냐는 지탄도 있었다. 퇴임한 은행장과 임원 그리고 대출손실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된 많은 은행인이 손해배상 책임을 지기에 이르렀다.

은익재산 조사도 받고 사재가 압류되는 사례도 생겼다. 그러니 은행인들이 대출을 기피할 수밖에 도리가 있을까.

참다못해 감독당국에서는 책임을 묻지 않을테니 규정대로 신속히 대출하라고 독려했다. 은행도 내규를 통해 면책을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도 은행인들은 믿지 않으려 한다.

기업대출이 정상적으로 회수되면 본전이지만 손실이 발생하면 면책규정이 무슨 소용인가. 선량한 관리자로서 주의 의무를 다했다 해도 좀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판정되면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정부는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 대출을 독촉한다. 그러나 위험이 눈에 보인다. 재벌기업도 순식간에 무너지는 장면을 확인했는데 언제 어떤 위험이 터질지 모르는 중소기업과 벤처기업에 여신재량권을 행사하라는 말인가.

손해배상에서 형사처벌까지

정부가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은 퇴출 금융기관은 물론 경영 정상화를 추진중인 은행까지 다 포함된다. 부실책임을 철저히 규명해 관련자의 재산을 압류하는 등 적극 대응하겠다는 것이 당국의 확고한 방침이다. 책임추궁은 가벼운 경우는 문책경고나 주의적 경고 정도에 그치지만 부실 여신의 책임이 큰 경우는 막대한 재산상의 손실을 보게되고, 더욱 심한 경우는 형사처벌도 감수해야 한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0월 22일 한빛은행에 대한 검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부실 여신문제와 관련, 1백13명의 임직원을 무더기 문책했다. 검사결과 한빛은행은 차입금이 매출액을 크게 초과하고 부채비율이 높아 상환이 의문시되는 한일합섬과 통일중공업 등 41개 신용불량 업체의 여신을 취급, 모두 4천4백여억원의 부실을 발생시킨 것으로 나타났다. 또 해태제과 등 4개 업체에 한도를 초과해 4백50여억원을 부당 대출해주었고 충주전자 등 6개 업체에 사용처에 대한 검토없이 대출, 자금이 관계사로 유출되도록 해 1백84억원의 부실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이와 함께 수출입은행에 대해서도 2천7백여억원의 부실을 발생시킨 책임을 물어 주의적 경고조치를 내리는 한편 전 행장 등 전 현직 임직원 17명에 대해서도 문책 조치했다.

그러나 이같은 금감원의 조치는 그래도 가벼운 케이스에 속한다.

예금보험공사의 조치는 이보다 훨씬 가혹하다. 이 회사는 금융구조 조정과정에서 16개 퇴출 종금사에 투입된 11조원의 공적 자금을 소해배상 소송을 통해 회수하기로 하고 파산 관재인으로 하여금 쌍용종금 등 8개 퇴출 종금사 부실 관련자의 재산에 대한 가압류 조치에 들어갔다. 예금보험공사는 이와 함께 신세계 등 9개 퇴출 종금사에 대해 1조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비망록 등 각양각색 보신책 만발

이처럼 금융기관 임직원에 대한 압박이 가해오자 각양각색의 보신책을 구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자신의 재산을 제3자 등 남의 이름으로 이전하는 명의이전이다. 이것은 퇴출됐거나 부실한 금융기관들만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정상영업을 하고 있는 은행이나 종금 등에서 조차 임원이 되면 자기 앞으로 된 재산을 부인이나 친척명의로 돌려 놓는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실제로 예금보험공사는 퇴출 종금사 임원중 일부는 97년 12월부터 재산을 부인이름으로 돌리는 등 재산을 빼돌린 흔적을 최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상당수 금융기관 임원들은 퇴임후 이민을 고려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들에겐 문제의 심각성이 노출되기 전에 미리 재산을 처분하고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부럽기만 하다. 이같은 현상은 채권단 주도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는 대우그룹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해외로 빠져 나가므로써 구조조정 과정이나 구주조정 후에 있을 책임추궁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보겠다는 생각에서다.

비망록을 남기는 일도 여신담당자들 사이에서 요즘 유행하는 새로운 풍속도다.

외환위기 이후 마지못해 여신업무를 맡게된 직원들 사이에는 개인적인 업무일지를 기록하는 습관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다. 훗날 대출관련 사고가 발생하거나 금융 감독기관으로부터 검사를 받을 때에 대비, 물증을 남겨 놓음으로써 억울한 뒤집어쓰기만은 피해보겠다는 것이다. 비망록에는 대출 건별로 승인사유와 개인의견, 대출승인 지시자, 외부 청탁여부 등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기억을 정확하게 되살릴 수 있는 근거들이 빽빽하게 기록돼 있는 것이 보통이다. 높은 곳에서 부당하게 압력을 넣거나 관행상 대출을 해주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 풍토에서, 막상 문제가 생기면 '압력의 실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애꿎게 실무자만 당하게 되니 자구책을 쓸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윗선의 청탁이나 지시로 내키지 않은 대출승인을 하게되면 담당 실무자가 도장을 거꾸로 찍어 반대기록을 남긴 사례조차 있다.

임원배상책임보험 가입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 임원에 대한 손해배상 가능성이 기업의 새로운 경영 리스크로 부각되고 있는데 따른 보신책이다. 임원배상책임보험은 지난 97년부터 삼성화재, 현대해상, LG화재 등 이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보험에 가입했다고 해서 금융기관 임원이 배상책임에서 완전히 보호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 관련기관으로부터 소송이 걸렸을 때는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다. 보장금액 한도가 국내 금융기관은 대부분 2백억원 이하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경영손실 책임은 유한하다

은행이 대출하지 않을 수 없고 대출손실에 따른 책임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외압에 따른 대출손실이거나 심사부실에 의한 손실이거나 누군가 책임을 져야한다. 불법이나 편법에 의한 손실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은행인의 책임은 구태여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문제는 책임을 지되 어느 수준까지 누가 얼마큼 져야 옳으냐는 점이다.

은행장과 임원과 지점장과 창구직원이 책임져야할 범위가 있고 문책의 기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터지면 감독당국이나 여론이나 거의 무한책임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또 하나의 문제로 지적된다.

은행인들의 수난시대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예금보험공사에서 퇴출 금융기관 부실책임 설명회를 가진적이 있다. 경영실패로 퇴출 당한 은행의 임직원이 책임져야할 한계를 설명해준 자리였다.

요지는 무한책임이 아닌 직위나 직책에 맞춰 유한 책임이니 너무 두려워 하거나 업무를 기피하지 말라는 뜻이다.

부실경영 문책대상은 당연히 대표이사와 대주주와 임원급이다. 비상임이사와 감사도 포함된다.

직원들은 문책대상이기 보다 면책대상이라고 설명된다.

경영판단의 잘못으로 은행에 손실을 초래했을 경우에도 법규나 내규를 위반하지 않았으면 손해배상책임이 면제된다. 뿐만 아니라 법규나 내규를 위반한 경우에도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면 은행인은 면책된다.

이렇게 경영책임이 없는 은행인들은 법규나 내규대로만 일하면 책임질 것이 없을테니 소신껏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다. 그런데 설명회를 다녀온 은행인들이 이제 홀가분하게 소신껏 일하게 되었다고 반기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다.

유가증권에 대한 투자손실도 직원들에게는 면책이 강조되었다.

투자전망을 적중시키지 못했거나 추정매출 산정이 빗나가 회사에 손실을 끼쳤을 경우에도 정당한 경영권 행사라면 책임을 면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코걸이 귀걸이씩 면책기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은행인들의 반응이다.

임원들의 책임한계나 면책기준도 마찬가지라는 해석이다.

대표이사의 포괄적 업무책임이 있고 이사는 이사회결의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감사는 포괄적 감독책임이 있다. 비등기이사에게도 주의의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법규내에서만 업무를 집행하면 임원도 유한책임만 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손실이 발생하면 대표이사나 임원들은 거의 무한책임이며 면책기준은 자기변명으로 해석되기 쉬운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은행장과 은행인이 책임에 떨며 오히려 도덕적 해이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감독기관으로부터 유죄인으로 고발되지 않느냐는 현실이다.

우리는 금융인들의 고뇌를 함께 걱정하며 그를이 수난을 겪고 있다는 하소연을 수긍한다.

은행의 책임경영 풍토가 하루빨리 확립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 때문이다. 은행인들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가 조성될 때가 바로 은행의 구조개혁이 끝나는 때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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