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호]

[다시쓰는 박정희(朴正熙)평전?]

불굴의 혼

오, 하늘이 돕는구나!

글 高正一 (고정일 소설가· 동서문화발행인

국산무기 개발 첫걸음

1971년 11월 10일. 경제기획원에서 방위산업 건설에 관한 보고를 받고 청와대로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은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경제기획원의 보고내용이 도무지 2011-07-04_212233.jpg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욱한 놈들 같으니! 그따위로 해가지고 언제 무기 개발하고 언제 자주국방을 한다는 거야.’

박정희가 그렇게 뇌고 있을 때, 김정렴 비서실장이 들어와 오원철 상공부차관보가 뵙기를 청한다고 보고했다.

“오원철이가? 그 사람 아까 경제기획원 보고 때도 참석했잖소.”

“그렇습니다, 각하. 오 차관보는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각하께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들어오라고 해요.”

오원철은 방위산업 육성의 두 가지 포인트를 대통령에게 설명했다.

첫째, 무기 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군수공장은 관영(官營)이든 민영(民營)이든 경제성이 없다. 모든 무기는 부품의 결합체이므로, 부품을 정밀 가공하는 기술을 핵심적으로 키워야 한다.

둘째, 현대무기는 중화학공업 기반이 없으면 생산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위한 중화학공업의 범주에 방위산업을 포함시키되, 각 무기의 부품별로 유관공장에 분담시켜 제작함으로써 무기수요 변동에 따른 낭비를 최소화해야 한다.

오원철의 설명을 들은 박정희는 비로소 기분이 밝아졌다. 1970년대 국가발전전략의 특징적 슬로건이었던 ‘중화학공업·방위산업 동시 건설’은 그렇게 해서 결정되었던 것이다. 다만, 오원철이 국산무기 본격생산 시점을 4?5년 후로 잡은 데 비해서, 박정희는 2?3년 후로 당겨 잡아야 한다고 성급함을 보였다.

오원철은 다음날로 대통령 제2경제수석비서관으로 청와대에 들어가 국산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되었다. 박정희는 오원철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명령조로 말했다.

“우선 예비군 20개 사단을 경무장(輕武裝)시킬 수 있는 무기를 개발 생산하고, 60mm 박격포도 생산하도록. 발사해서 총구가 갈라져도 괜찮으니까 박격포와 소총 시제품(試製品)을 한 달 안에 만들라. 그러고 나서 자꾸 개량해나가면 곧 쓸 만한 병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공군장교 출신인 오원철은 그날의 느낌을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박 대통령은 마치 군지휘관 처럼 지시했고, 나는 자신도 모르게 차렷 자세가 되어 하마터면 거수경례까지 할 뻔했다. 아무튼 그 순간에 나는 몸과 마음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분위기와 결심에 완전히 휩싸이고 말았다. 군복은 입지 않았으나 다시 입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총사령관은 박 대통령, 전략참모본부장은 김정렴 비서실장, 나는 방위산업담당 참모가 된 것이었다.”

난리가 난 것은 국방과학연구소였다. 한 달 안에 소총과 박격포 시제품을 만들어내라니! 무기 제작에 필요한 특수강(特殊鋼)을 찾느라 연구원들은 시중 철물상과 청계천 고물상을 이 잡듯 뒤졌고, 3.5인치 로켓포 설계도면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육군에서 쓰는 포를 빌려와 해체해서 부품의 치수를 정밀 측정해 역설계(逆設計)를 하기도 했다.

1971년 12월 17일. 그날 청와대 대접견실에 60mm박격포·로켓포·기관총·소총 등, 최초의 국산 무기 시제품이 전시되었다. 박정희는 매우 흡족해서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올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로군. 다들 보라고.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거뜬히 해낼 수 있어. 그런데 이걸 언제 시사(試射)해볼 수 있지?”

박정희가 소풍날을 기다리는 어린애처럼 고대한 국산무기 시사회(試射會)가 열린 것은 해가 바뀐 1972년 4월 3일. 장소는 육군 제23사단 주둔지였다.

그날 하마터면 불의의 사고가 날 뻔했다. 폐물 탱크 밑에 묻어놓은 국산 지뢰가 폭발하고 불기둥이 일어나는 순간, 파편덩이 하나가 내빈석을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비명의 탄성을 지르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고, 천만다행히도 파편은 내빈석을 넘어가서 떨어졌다.

그런데, 그 위기의 순간에도 박정희는 쌍안경으로 폭발지점을 태연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모두들 초인적인 담력에 입을 딱 벌리는 가운데, 유재흥 국방장관이 “중지!” 하고 외쳤다.

그러자 박정희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왜? 그냥 순서대로 진행하시오.”

시사회가 끝난 다음, 박정희는 시사무기 쪽으로 가서 하나하나 몇 번이나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 자식의 뺨을 어루만지는 거 같은 손길이었다.

‘청산가리도 가져갑니다.’

1972년 5월 2일 오전 10시.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비밀정치회담 특사 자격으로 떠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출발인사를 받았다.

김종필 국무총리·최규하 특별보좌관·김정렴 비서실장이 배석한 자리에서 박정희는 “CIA(미국중앙정보국) 서울 책임자에게 잘 말해두었어. 잘 다녀오라고.”라고 말했다.

그에 앞서 3월 28일, 대외적으로 남북적십자회담 사무국 운영부장 직함을 지닌 중앙정보부 요원 정홍진이 사전조율 사명을 띠고 판문점을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 정홍진은 3박4일간 북한에 머물며 김일성의 동생이며 북한노동당 조직부장인 김영주를 만나 이후락 정보부장의 비밀방북에 합의를 받아내고 돌아왔다.

박정희는 이후락 일행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는 북한의 각서를 받아내고, 비밀회담 진행 과정을 CIA에 알려준다는 약속으로 양해를 구했다. 또한, 이후락이 수시로 청와대에 전화해서 대통령의 지시를 받거나 긴급한 보고를 할 수 있도록 서울?평양 사이의 임시전화선이 가설되어 있었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와 CIA의 협조사항에 관해 박정희에게 보고한 다음, 자기 양복저고리 안주머니 부분을 손으로 두드리며 “그것도 여기 준비해 가져갑니다.” 하고 말했다. 북한에서 여차한 경우 자결하기 위한 청산가리를 준비했다는 뜻이었다.

박정희의 주도에서 나온 남북대화는 그의 유연한 실용적 사고(思考)가 돋보이는 성공작이었다.

1967년 이후 늘어난 무장간첩 남파와 게릴라 침투, 푸에블로 호 나포 등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미국의 새 대통령 닉슨이 게릴라전이나 제한전쟁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소위 ‘괌 독트린’을 발표한 데 이어 키신저 외교를 통해 중공에 대한 적대정책 포기를 선언한 것은 박정희에게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박정희는 자위적 생존전략 차원에서 새로운 대북정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온 것이 ‘남북이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1970년의 8.15선언과 1971년 8월 12일의 남북적십자회담 제안이었다. 무력충돌을 막기 위한 남북대화 채널을 개척하면서, 한편으로 방위산업 건설이 핵심인 자주국방으로 나아가자는 것이 박정희의 복안이었다.

‘우리 국력이 충분히 커질 때까지 잘 구슬려 전쟁만 막으면 된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이런 계산이 깔린 박정희의 대화 제의에 김일성이 끌려온 것은 남북대화로 평화무드를 조성함으로써 남한사회의 긴장감을 이완시켜 전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또 그 나름의 계산 때문이었다.

박정희는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북한에 가는 이후락에게 우리 쪽에서 제시할 기본입장을 이렇게 정리해주었다.

첫째, 조국통일은 정치회담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

둘째, 남북한이 그동안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서로 다른 체제를 유지해온 현실을 인정하고, 그런 문제들의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

셋째, 경제·문화 등 비정치적인 문제부터 푼 다음 정치문제로 넘어간다.

넷째, 남북한 적십자회담을 촉진시켜 인도적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도모한다.

다섯째, 비현실적이고 일방적인 상호 비방과 무력사용을 중단한다.

남과 북의 동상이몽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방북에 대한 답방(答訪)으로 북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유장식 대외사업부장·김덕현 노동당 정치위원회 책임지도위원 등 수행원을 데리고 판문점을 통과해 비밀리에 서울에 도착한 것은 1972년 5월 29일이었다.

이들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접견은 이틀 뒤인 5월 31일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는 김종필 국무총리·김정렴 대통령비서실장·최규하 특별보좌관·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이 배석했다.

“잘 오셨소. 김 주석께서는 건강하십니까?”

박정희가 만면에 웃음을 짓고 손을 내밀자, 박성철은 표정이 굳어지며 황망히 허리를 약간 굽히고 마주 악수를 했다.

자세를 바로하고 박성철은 저고리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박 대통령각하’로 시작되는 김일성의 인사말에 이어, 남북회담에 대한 북한의 기본입장을 수첩에 적힌 대로 읽어 내려갔다. 우리 쪽이 각각의 세부사항에 관한 대화부터 시작해 큰 틀의 합의로 접근해가자는 점진적인 방식인 데 비해서, 북쪽은 정반대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대화가 시작되었으나, 대화는 박정희의 일방발언뿐, 박성철은 수첩에다 열심히 받아 적기만 했지, 한 마디도 자기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답변의 범위에 대한 훈령을 김일성한테서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김 주석의 뜻은 남북 간의 장벽을 한꺼번에 허물자는 것인 모양인데,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듯이 하는 게 합리적일 겁니다. 박 부수상도 시험을 쳐본 적이 있을 테지요. 시험 볼 때도 쉬운 문제부터 풀고 어려운 문제는 나중에 풀지 않습니까? 남북대화도 같은 식으로, 쉬운 문제부터 풀어나가도록 합시다.”

공식면담이 끝나고 만찬으로 이어져, 박정희가 박성철에게 “자, 술 한잔합시다.” 하고 권했으나, 박성철은 약을 먹고 있는 중이라고 이유를 대면서 술잔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명색 권부의 실력자이면서도 그런 경직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박정희와 배석자들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막대기 같은 친구들을 상대로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나.’

그런 의구심과 우려는 남북접촉이 공식화되고 회담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현실로 나타나, 북쪽은 적극공세로 나오고 남쪽은 수세로 밀리는 양상이 계속된다.

참다못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어느 날 박정희에게 그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했다.

이후락: 각하, 북한과 대화를 하려면 그들처럼 우리도 채널 하나로 딱 한 가지 의견만 가지고 상대해야 하는데, 이쪽에서는 여기저기서 말이 튀어나오니 대화가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박정희: 그러나 어떡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

이후락: 각하께서 영구집권은 안 하시더라도 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면서 저들하고 대화를 해야 합니다. 저들은 각하께서 얼마 안 가 그만두실 거다, 하는 예상을 하고 있으니까 억지를 쓰는 거고, 그러니 항상 우리가 밀리는 거지요. 저는 다 그만두고 이민이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합니다.

박정희: 이 사람 좀 보게. 그래서 어떡하자는 거야?

이후락: 이 체제 갖고 대화해봤자 우리만 손햅니다. 남북대화를 제대로 해나가고 성공으로 이끌어 국가를 안정시키려면 각하께 강력한 힘을 실어드리는 큰 틀의 체제변화를 해야 합니다. 무엇이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길입니까?

뒷날, 유신(維新)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북대화를 들고 나왔다는 부정적 비판의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사실은 남북대화를 하는 과정에 필요수단으로 유신의 싹이 텄던 것이다.

유신개헌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에 관계없이 일단 결정하고 나면 무서울 정도로 완벽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박정희식 스타일이다.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 박정희는 유신개헌(維新改憲)을 위한‘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단한다.

둘째, 효력이 정지된 헌법기능은 비상 국무회의가 수행한다.

셋째, 비상 국무회의는 1972년 10월 27일까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하고, 1개월 안에 국민투표에 붙여 확정한다.

넷째, 헌법 개정이 확정되면 1972년 말 이전에 헌정질서를 정상화한다.

박정희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연설하고 나서, 말미에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나 개인은 조국통일과 민족중흥의 재단 위에 이미 모든 것을 바친 지 오래입니다.”

연설을 끝낸 박정희는 육군보안사령관 강창성 소장을 불러 “이 작자들 잡아넣고 철저히 조사해.” 하면서 명단을 주었다. 야당 정치인인 조윤형·최형우·김상현·이기택·김동영 등 거의 20여 명으로서, 주로 김영삼과 김대중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군부대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신 선포에 대해서 국민들은 충격을 받았다. 5.16군사혁명은 서울시민 과반수가 객관적 여론조사에서 지지할 정도로 사회혼란이 극심한 가운데서 일어났지만, 10월 유신은 그럴만한 상황적 배경 없이 평온하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 갑자기 이뤄진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민들은 ‘아하! 박정희가 독재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으며, 언론과 지식인사회는 모두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10월 21일. 박정희는 청와대를 방문한 하비브 주한미국대사로부터 닉슨 대통령의 친서를 받는 한편, 월남전 휴전회담의 진행 상황을 보고받았다.

당시 미국은 월남전 수렁에서 발을 빼기 위해 월맹과 물밑접촉을 하는 한편 월남정부의 불만을 다독거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한국은 그 전쟁에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투입한 당사자이면서도 휴전협상에서는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다. 하비브에 대한 박정희의 냉담한 태도에는 그런 불만이 담겨 있었다.

“휴전안을 보면 침략자인 월맹군의 철수에 관한 언급은 없이 그냥 ‘외국군의 철수’만 규정하고 있는 것은 불공평하고, 월맹과 베트콩과 월남을 묶는 연립정부란 것도 애매합니다. 이 안(案)은 월남정부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려, 이대로 휴전이 이루어지면 월남정부는 1년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오.”

미국정부는 박정희의 계엄령 발동과 유신 선포가 못마땅했지만, 월남 휴전문제에 발목이 잡혀 있을 뿐 아니라,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이 ‘박정희와 약속이라도 한 듯’그 3주 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憲政)을 중단시켰을 때도 아무런 개입을 못했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에 대해서만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기가 곤란한 입장이었다. 따라서 닉슨의 친서에 담긴 미국정부의 공식 의사표명은 이런 수준이었다.

(……) 한국정부가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면서 미국정부와 사전에 의견교환을 하지 않은 것은 미국이 역대 한국정부, 특히 지금 정부에 제공해온 지원과 희생을 감안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박정희는 월남전에 대한 닉슨의 상황인식과 휴전협상에 불만이 컸고 우리나라 내정에 간섭하려는 태도가 못마땅했지만, 친서를 받은 이상 상응한 외교적 예의는 생략할 수 없었다.

하비브 대사가 다녀간 다음날, 김종필 총리를 불러들여 말했다.

“임자가 금명간 워싱턴에 한 번 다녀왔으면 해. 닉슨한테 내 답신을 전달하고, 우리가 유신을 왜 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잘 설명해봐.”

그런 다음,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미국 놈들도 자기네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좀 깨달아야 할 거야.”

계엄군을 동원한 공포분위기 조성과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림으로써 박정희의 ‘유신호(維新號)’는 순탄하게 굴러가는 것 같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10월 유신과 관련해서 처음으로 자기 속내를 털어놓는다.

“민족과 국가는 영원한 생명체입니다. 민족이 안정되고 번영하려면 그 후견인으로서 국가가 반드시 있어야 하며, 국가가 없는 민족의 발전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8.15해방이 되고서도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고 어려운 길을 걸어왔는데, 국력배양을 가로막은 가장 큰 요인의 하나가 과거 국회의 비능률이었다고 나는 단정합니다. 밤낮 자기네 당, 자기네 파의 이익을 위해 정쟁이나 하고……그래서 그런 정치 비능률을 불식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생산과 직결시키자는 것이 10월 유신의 기본방향인 것입니다.”

게으른 가난은 동정 말라

‘협동’은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이론적으로 받쳐주었던 중요한 기본철학의 한 기둥이었다.

협동을 우리 고유의 토속어로 풀면 ‘두레’다. 마을에서 서로 도와 진행하는 공동 작업이 곧 두레인 것이다. 그래서 공동으로 하는 일을 ‘두레일’, 거기 참여한 사람을 ‘두레꾼’, 부녀자들이 모여 앉아 길쌈하는 것을 ‘두레길쌈’이라고 한다.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 ‘두레상’, 우물에 비치해두고 아무나 사용하는 ‘두레박’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이렇듯 예부터 전통으로 면면히 내려온 두레문화를 자조·자립·협동의 진취적이고 능률적인 자아개발운동으로 승화 발전시킨 것이 바로 새마을운동이었다.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의 첫 번째 목표로 삼았던 것이 농어촌 환경개선사업이었다. 우물과 빨래터를 고치고, 고샅길과 농로를 닦고 다리를 놓는 등, 주민 모두의 참여가 필요한 사업이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1970년의 농어촌 실태현황을 보면, 전국 3만5천여 마을에 가구수(家口數)는 250만 가구였다. 가구의 80%는 초가지붕이었고, 전기가 들어오는 집은 겨우 20%였으며, 나머지는 등잔불을 켜다 보니 라디오가 있더라도 들을 수가 없었다. 마을의 길은 좁고 험해서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마을은 30%에 불과했다.

박정희는 농어촌의 환경개선사업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1차 사업으로 각 마을에 시멘트를 300?350부대씩 무상으로 공급해주었다. 두메산골까지 시멘트가 빠짐없이 들어갔다. 성과가 우수한 마을부터 우선 지원한다는 원칙 아래 전국 3만5천여 마을을 기초마을·자조마을·자립마을로 구분해서 1만7천 마을에는 시멘트 5백 부대와 철근 1톤씩을 더 보내주었다. 반면에 주민참여도가 낮고 성과가 나쁜 1만8천여 기초마을은 일체 아무것도 지원하지 말도록 했다.

박정희는 게으른 자의 가난은 동정하지 않았다. 오랜 가난으로 인한 무력감과 좌절을 결코 연민의 정으로 어루만지지 않았다. 나태하고 저축도 할 줄 모르고 협동심도 없는 마을에 대해서는 단호히 냉정했다.

“새마을사업 지원은 우수마을부터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과거에도 농민들을 위해 여러 가지 지원책을 강구한 적이 있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정부가 모든 농가에 일률적으로 지원해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모든 농가에 고루 분배해주다 보면 몇 푼씩 되지 않아 투자효과가 나지 않아요. 또한, 스스로 잘 살아보려는 의욕도 없고 부지런히 노력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아무리 도와준들 뭐합니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지. 새마을운동 우수부락부터 지원하면 그 부락은 부쩍부쩍 발전해서 그렇지 못한 부락과 격차가 커지겠지만, 그렇게 자극을 가하면 ‘아, 우리도 이래선 안 되겠구나.’ 싶어 분발하지 않겠습니까?”

박정희는 그런 채찍질의 한편으로 당근물림도 요령껏 활용했다. 산간벽지에 호롱불 켜고 살며 평생 서울 구경 한 번 못해본 사람들을 ‘새마을지도자’로 청와대에 초대해서 훈장을 수여하고 같이 식사하는 이벤트 연출로 파급효과의 극대화를 꾀했던 것이다.

기적의 볍씨 ‘통일벼’

빈농의 아들 박정희의 가슴에 어려서부터 응어리진 소원은 잘사는 농촌 만들기였다. ‘잘 산다’는 것도 떵떵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밥 굶는 걱정 없이 사는 정도’를 뜻하는 지극히 소박한 의미였다.

국민의 7할이 농민이면서도 식량이 모자라 해마다 수백만 톤의 곡식을 수입해야 하는 질곡의 악순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단호하게 추진한 해법의 하나가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구현이었다. 식량이 달릴 때마다 원조든 차관이든 외국에서 들여다 나누어 먹이는 식이 아니고, 농민 스스로 식량을 증산해서 자급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농촌의 가난과 굶주리는 농가를 연민의 눈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따끔한 자극으로 그들을 벌떡 일어나게 만들려고 했다.

“한해(旱害)지역을 지나다보면, 논밭의 보리가 타 들어가는데 관정(管井)의 물은 그대로 고여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물을 퍼 올려 보리밭에도 주고 모도 심어야 하는데, 젊은이들은 나무그늘에서 빈둥거리고 노인들은 담뱃대 물고 구경이나 하고 있으니, 그렇게 게으르고 무기력해서야 어떻게 가난을 물리치겠는가?”

가뭄이 극심한 영남지방을 순시하던 중의 일이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배수로에는 물이 흐르는데도 모내기를 하지 않고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진 채 방치된 풍경을 목격한 박정희는 경북도청에 도착해 관내 군수들을 소집한 한해대책회의에서 칠곡군 군수에게 직격탄을 가했다.

“이봐요, 군수! 그 팔뚝이 뭐요? 차트를 보니 당신네 칠곡군의 모내기 실적이 가장 저조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제일 게으른 군의 군수 팔뚝이 제일 희구만. 들에 나가서 지하수를 퍼 올려 모내기하도록 독려하지 않고 사무실에 앉아 상황보고나 듣고 있었다는 증거 아니냐고. 대체 그래 갖고 뭘 어쩌자는 거요?”

칠곡군수가 사색이 되어 쩔쩔매는 가운데, 박정희는 모든 군수와 면장이 솔선수범으로 농민들보다 앞장서서 들판에 나가서 모내기에 사력을 다하라고 다그쳤다.

“비가 안와 가뭄이 들긴 했어도 물은 땅 속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관정을 파서 양수기로 지하수를 퍼 올리고 게으름 피는 농민들을 끌어내 모를 심게 하세요. 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게으른 자에게는 절대 돌아갈 몫이 없다는 걸 깨닫게 하란 말입니다.”

그런 뒤 서울로 돌아온 날 밤, 그렇게도 애타게 원하던 비가 오기 시작했다. 시원스러울 정도로 빗줄기가 굵었다. 그는 즉시 전화로 부산시장을 찾아 그곳에도 비가 오느냐고 물었다. 부산시장이 “예, 각하. 마구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렁차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싱글벙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래요? 하늘에서 수만, 수십만 석이 쏟아지는구먼.”

박정희에게는 마른 땅을 적시는 그 비가 단순한 빗방울이 아니라 국민의 배고픔을 해결해줄 곡식 낱알로, 귀중한 양식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증산노력의 독려와 별도로 박정희가 또 하나 역점을 두고 추진한 흥농(興農) 프로젝트가 볍씨의 다수확 품종개량이었다.

새마을운동 초기 우리나라 농업사정은 단보당 평균 쌀 생산량이 300kg수준의 열악한 상태여서 식량자급에 턱없이 부족했고, 부족한 식량을 수입해서 메우다 보니 국가재정이 어려워져 2·3차 산업의 발전에도 많은 지장을 초래했다.

박정희는 식량자급을 달성하기 위해 “다수확 벼 품종을 개발하라”는 특단의 지시를 내렸고, 그때부터 작물시험장·농촌진흥원·서울대학교 농대 육종학연구실 등은 준비상이 결렸으며, 심지어 필리핀의 국제미작(米作)연구소 등에도 연구를 의뢰하기도 했다.

‘기적의 볍씨’로 통하는 통일벼 ‘IR667’이 탄생한 것은 개량볍씨 연구가 시작된 지 7년만인 1971년이었으며, 서울대학교 허문회 교수가 일본과 대만의 벼를 교배해서 이룬 작품이었다.

통일벼는 도열병(稻熱病)과 잎마름병에 강하고, 키가 작고 줄기가 단단해 잘 쓰러지지 않으며, 이삭 당 낱알이 재래종의 80?90개보다 훨씬 많은 120?130개나 되는 획기적인 다수확 품종이었다. 재래종 벼는 단보당 생산량이 300kg인데 비해 통일벼는 490kg에 달해 예전 평균치에서 자그마치 40%나 증산효과가 나타나 박정희의 숙원이던 식량자급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박정희가 전남 해남의 통일벼 재배단지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키가 작은 통일벼가 낱알을 풍성히 달고 있는 탐스런 모습을 보고는 한포기를 따서 손바닥으로 문질러 한 알씩 세어보기 시작했다. 포기당 낱알이 얼마나 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 알 한 알 꼼꼼하게 세어나가 100을 넘고 200에 이르니 초가을 날씨에 이마에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는 데도 234까지 모두 세어 확인하고는 파안대소하면서 막걸리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때 수행비서가 다가와 말했다.

“각하, 저기 280알 달린 것도 있습니다.”

박정희가 막걸리 사발을 놓고 일어섰다.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나. 280알이면 벼줄기가 부러지지 배겨?”

그러면서도 가서 직접 확인해보니, 수행비서의 말대로 280알이 달려 있었고, 벼줄기도 멀쩡했다.

“야, 이건 굉장하다. 오, 하늘이 돕는구나!”

박정희도 그답지 않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통일벼 재배가 확산되고 품종개량연구가 계속 이어지면서 1977년에는 자급자족하고도 쌀이 남아돌아 인도네시아에 첫 수출까지 함으로써 쌀 수입국에서 수출국이 되는 쾌거를 이룩했으나, ‘재래종보다 밥맛이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통일벼는 소비시장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한 후속적인 우수 다수확품종들에 밀려 1990년대 들어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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