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한국인을 찾아서 ⑬]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애국자 인가

독재자 인가!

글/高正一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

슬프다, 나라가 없으면…

<슬프다! 나라가 없으면 집이 어디 있으며 집이 없으면 나의 일신과 부모처자와 형제자매며 일후자손이 다 어디서 살며 어디로 가리오. 그러므로 나라에 인민된 자는 상하귀천은 물론이고 화복안위가 다 일체로 그 나라에 달렸나니 비교하건대 만경창파에 배를 탄 것 같아서 바람이 순하고 물결이 고요할 때는 돛 달고 노질하기를 사공들에게 맡겨두고 모든 선객들은 저마다 제 뜻대로 물러가 잠도 자며 한가히 구경도 하여 다른 일을 간섭할 바 없으되 만일 풍랑이 도도하며 풍우가 대작하여 돛대가 부러지고 닻줄이 끊어져서 허다한 생명이 사생존망의 시각에 달릴진대 그 안에 앉은 사람 뉘 아니 정신 차려 일심으로 일어나 돕기를 힘쓰지 않으리오…

이웃 배에서 급히 와서 대신 건져 주려 하면 이 배의 선객들은 종시 남에게 밀어두고 무심히 앉아 죽기만 고대함이 도리라 하겠는가, 지혜라 하겠는가?> 이승만「독립정신」에서.

양녕대군 16세손 6대 독자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은 근대화시대 우리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돋보이는 정치적 감각과 식견을 지녔었다. 그는 조선이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으로 양분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먼저 깨달았다. 그를 포함한 임정 요인들이 귀국했을 때,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이미 국제질서의 기본 구도로 자리 잡았고, ‘북위 38도선’은 어떤 구체적 지형보다 넘기 어려운 경계가 되어 있었다. 그런 판단에서 그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 나왔다. 최근에 미국과 러시아에서 공개된 자료들은 그때 조선인들의 어떤 열망과 노력도 이미 굳어진 냉전 체제를 뛰어넘어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없었음을 보여주고, 우남의 판단과 결정이 현실적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능력으로, 분단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이끌었다.

우남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6대 독자로 태어났다. 그는 양녕대군 16세손으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은 유교적 선비였으며 넉넉지 못한 살림을 꾸렸다. 이승만은 열다섯 살 때 부모가 간택한 동갑내기 박승선(朴承善)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아홉 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한다. 뒷날 두 사람은 이혼했다. 이승만은 소년기에 과거 등과를 목표로 서당공부를 했다. 1894년 청일전쟁 중에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2월 주변의 권유로 미국인 선교학교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이를 계기로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다.

추야불매(秋夜不寐), 1899년 한성감옥

1896년 6월 7일, 독립협회가 조직 되었다. 독립협회 지도자는 서재필, 이상재, 남궁억 등이었다. 그러나 왕권에 대치되는 민권운동을 전개하는 독립협회를 정부가 그대로 두지 않았다. 마침내 1898년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추방당하고 독립협회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이상재, 남궁억 등이 잡혀갔다. 이 무렵부터 이승만의 정치활동은 혁명을 눈앞에다 둔 권력구조 개혁을 꾀하고, 민중의 호응을 얻기 위하여 ‘고종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는 전단을 뿌렸다. 이승만은 체포되어 7년 동안의 감옥살이가 시작된다. 서소문 감옥에 수감된 이승만은 <매일신보> 기자 최정식과 탈옥을 감행한다. 그러나 곧 다시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는다. 뒤에 감형되어 무기수가 되었다가 결국 7년 옥살이를 하고 1904년에 이르러 특사로 석방됐다. 을사늑약이 맺어지기 한 해 전,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였다.

그때의 옥살이야말로 그 뒤의 이승만을 만들어낸 단련과 극기의 교육장이었다. 감옥에서 남긴 산문, 시, 번역문 등은 옥중잡기로 불리는데 최근 유영익에 의해 정리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는 142수의 한시가 있다. 산문 ‘추야불매(秋夜不寐)’는 이승만의 뛰어난 감성을 엿보게 한다.

<하루 종일 문을 닫고 앉았다 누웠다 하며 책을 본다. 저녁 종소리가 그치자마자 작은 창살에 어둠이 깃든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등에 불을 켜니 새어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모두가 잠자리에 드니 고요하기가 승방에서 참선에 들어간 스님과 같다. / 창살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니 뜰에 있는 나무가 침침하게 보인다. 약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와 볼을 스쳐가니 울어대는 귀뚜라미 소리가 호소나 하듯이 귓가에 요란하다. 어느 집에선가 시름에 잠긴 아낙네의 다듬이 소리가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고, 담장 너머에선 순시하는 야경꾼의 징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 성긴 버들가지가 서늘함을 보내오고 그윽한 난초가 향기를 풍긴다. / 밤은 어찌하여 이리도 깊어가기만 하는가? 종소리 북소리 멀리서 들리는데 누구의 시름인가? 날은 추워지는데 편지는 늦어지고 임금의 교사(사면장)도 다소 더디나 보다. 작년이고 금년이고 백발은 늙어감을 재촉하니 남은 날이 며칠이던가? 황가(皇家)에 일은 많은데 이 한 몸 왕옥(王獄)에 갇혔구나. 그만두어라. 말해도 미치지 못하리로다. / 아! 명(命)이로다. 운수에 달렸구나. 무릇 선비로서 혼란한 나라에 처한 자가 참으로 능통한 권도(權道)로 헤쳐 나가지 못할 바에는 다만 자기 한 몸이라도 잘 가누어 기미를 살피고 변화에 대처해야한다. 걱정해서 무엇 하리오. 나도 이제부터 쉬리로다.>

이승만이 옥중에 갇혀 있던 7년 동안 세상은 놀랍게 변해 있었다. 일본인들이 서울 거리를 내 세상인 듯 활보하고 다녔다. 서로 다투어 일본인들에게 아첨하는 조선인 무리들이 눈에 띄었다. 국가의 운명은 풍전등화였다.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는 영국과 미국은 한국의 운명은 아랑곳없이 동양에서의 일본의 횡포를 묵인하거나 지원하였다. 개화를 위해서 함께 싸우던 동지들은 산산이 깨어져 권력에 굴복하거나 전향하고 매수당하여 비참함이 말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어느 날 개화파 민영환과 한규설을 찾아가 일본의 횡포를 개탄하고 미국에 원조를 요청할 것을 의논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군의 포로나 다름없는 고종황제의 친서를 받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승만은 미국 유학생 여권과 워싱턴 주미한국공사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비밀리에 가지고 인천항에서 화물선을 탔다. 1904년(광무 8년) 11월 4일이었다.

루즈벨트에게 독립 지켜줄 것을 청원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상원의원 딘스모어에게 민영환과 한규설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의 협조를 구했다. 딘스모어 의원을 통해 국무부와의 접촉을 시도하는 동안 한국공사관과의 협력 관계 구축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는 고국의 민영환에게 서기관 김윤정을 새 공사로 임명할 것을 추천했다. 얼마 안 있어 김윤정이 대리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윤정은 이미 주미일본공사와 비밀 접촉을 하면서 이승만의 계획과 활동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하고, 자신이 한국공사로 임명되면 일본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승만은 이제 김윤정이 공사가 되었으니 자신의 임무 수행도 훨씬 수월해질 것으로 안심했다.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주재로 뉴햄프셔 주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 일본간의 평화회담이 개최된다고 1905년 6월에 발표되었다. 한국정부는 회담 참가자격도 없었으며 조국이 당면하고 있는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한국인도 없었다. 그즈음 태프트 육군장관은 동양을 순방하고 있었다. 그가 하와이에 도착하자 한인교민회는 윤병구 목사의 주도로 대대적인 환영 집회를 개최했다. 집회에서는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을 발동해 한국의 독립을 지켜줄 것을 청원하는 하와이 거주 4천 교민들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윤 목사와 이승만을 특사로 선출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결의문을 전달토록 했다. 감리교 선교회 감리사 와드먼 박사는 태프트 장관에게 이들 두 명의 특사를 위해 루즈벨트 대통령 앞으로 소개장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태프트는 요청대로 소개장을 썼고, 그 덕분에 두 사람은 새가모어 힐의 루즈벨트 저택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와이를 떠난 태프트는 도쿄를 방문해 그 해 7월 29일 태프트·카츠라 비밀협약을 체결해 조선의 ‘사형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이승만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고, 워싱턴의 신문들은 한국 교민들과 태프트 일행간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전하는 호놀룰루의 환영행사를 대서특필했다.

청원서를 지니고 워싱턴에 온 윤 목사와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방문해 청원서에 마지막 손질을 가했다. 그리고 두 특사는 새가모어 힐에서 하계 휴가를 보내던 루즈벨트를 만나기 위해 그의 저택이 있는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로 향했다. 1905년 7월 5일 오이스터 베이에 도착한 그들은 옥타곤 호텔에 투숙했다. 기자들이 몰려오자 이승만과 윤병구는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고만 밝혔다. 기자들은 당신네들이 대통령을 만날 수 있겠는가 조롱하듯이 물었다. 러시아와 일본 대표단이 도착하자 긴장감이 감돌았다. 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당신들을 만날 시간은 없을 거요. 그러니 몇 달을 머문다 해도 빈손으로 돌아갈 게 뻔해요.”

이승만과 윤병구는 루즈벨트의 비서 룁(Loeb)을 방문하고 청원서 사본과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전했다. 그날 저녁 두 사람은 룁의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 아침 9시 정각에 하계 백악관으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두 사람은 열띤 흥분 속에 다음날의 면담 준비에 몰두했다.

이튿날 아침 임대한 예복에 실크모자로 정장한 이승만과 윤병구는 새가모어 힐로 향했다. 외관은 그럴 듯했지만, 그들의 가슴은 조마조마했고 사지가 떨렸다. 접견실로 안내된 뒤 2~3대의 마차가 도착했다. 육·해군 무관을 대동한 러시아 수석대표 위테 백작 일행이었다. 러시아 대표단을 영접하고 나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들을 회의실로 안내한 뒤, 이승만과 윤병구가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루즈벨트에게 청원서를 전달했다. 루즈벨트는 청원서를 훑어보고는 말했다.

“이곳까지 와 주어 고맙습니다.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청원서가 공식 채널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서를 귀국 공사관을 통해 내게 보내면 평화회담에 제출하겠습니다. 귀국 공사로 하여금 국무부에 제출토록 하십시오.”

루즈벨트의 친절에 감화된 이승만과 윤병구는 감사를 표하면서 루즈벨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들의 가슴은 흥분과 희망으로 들떠 있었다. 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짐을 꾸려 워싱턴행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김윤정을 만나자 이승만은 말했다.

“이제 김 공사가 나설 차례입니다”

김윤정은 이승만이 내미는 청원서에 냉정한 눈길을 주며 가늘고 긴장된 목소리로 두 사람을 깜짝 놀라게 했다.

“정부의 훈령 없이는 이것을 보낼 수 없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약속을 잊었단 말입니까? 지금 공사 자리에 앉게 된 것도 그 약속 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식으로 나라를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애원하고 협박해도 소용이 없었다. 김윤정은 끝내 조국을 배반하며 일제의 앞잡이가 되고 말았다.

이승만의 독립운동

이승만은 20대 초반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접하면서 스러져가는 조선왕조의 부패와 무능에 저항, 개혁운동을 했다. 1898년 만민공동회 선두에 서서 열강의 이권 침탈에 대항 자주독립수호와 자유민권신장을 부르짖었다. 수많은 군중들은 그의 연설에 열광했다. 30대 중반에는 빼앗긴 조국의 설움을 머금고 조국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미국의 3대 명문 대학에서 국제정치를 공부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망명정부를 대표하며, 미국과 유럽, 중국 등에서 조국의 국권을 되찾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카이로 회담’, ‘얄타 협정’ 등을 통해 국제관계가 재편되는 격랑 속에서 강대국간의 은밀한 거래―한반도를 두 동강 내서 분할 통치한다는―를 폭로하고 세계의 양심에 호소하며 조국의 온전한 독립을 외쳤다. ‘우리 한국인은 미국과 동일한 주의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적 제 원칙을 지지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수립을 위하여 미국의 자본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만주는 물론 아시아 전역의 문호개방에 찬성합니다. 한미수호조약(1882)에 따르면, 당신들은 우리나라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보스턴대학 이승만 연설, 1920년 1월 12일

이렇듯이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주로 미국의 힘을 빌려 독립을 얻자는 구미외교운동을 의미했다. 이승만은 1905년부터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까지 5년 동안 워싱턴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프린스턴대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왕조는 마침내 27대 519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그해 10월, 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이미 명맥이 끊긴 조국의 몰골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2년 만에 세계감리교총회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된 것을 계기로, 191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가 기독교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때 세계감리교총회에서의 연설에서 비롯된다. 그는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이념인 자유 · 평등 · 인류애에 호소하면서 일본에게 약육강식당한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국제 여론은 마땅히 한국을 불합리한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이승만은 동지들과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호소토록 진력하였다. 비록 옵서버의 자격이지만 상해에 있는 김규식을 참가하도록 도왔다. 이때 국내에서는 3·1독립운동이 터졌다. 3·1운동의 결과 국내 전국 각도 대표의 국민대회 결의로 탄생한 한성정부와 상해에서 선포된 임시정부가 모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이를 미루어 보아도 그즈음 그의 명성과 국내외의 그에 대한 기대와 신망이 어떠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마리아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 교외인 서스도르프에서 1900년 6월 15일에 태어났다. 상업학교를 다니고 스코틀랜드로 유학, 그곳에서 영어통역관 국제자격증을 획득했다. 독어와 불어에 능통한 데다 속기와 타자 특기도 보유했다. 그녀는 20세에 자동차 경기선수 헬무트 뵈링과 결혼했으나 4년 만에 이혼했으며 자녀는 없었다. 1933년 2월 21일 어머니와 함께 스위스 여행을 하다가 제네바의 드 루시 호텔 식당에서 이승만과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다. 자리를 함께 한 신사가 코리아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그녀의 눈이 빛났다. 프란체스카가 여행 직전에 읽은 책이 바로 ‘코리아’였던 것이다. 그녀가 “코리아엔 아름다운 금강산이 있고 양반들이 산다지요”하고 화제를 꺼내자, 이승만은 몹시 반가워했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후 교제가 진행되어 두 사람은 마침내 1934년 10월 8일 미국 뉴욕에서 결혼하기에 이른다. 이승만은 59세, 프란체스카는 34세였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절 미국 시민권이 없어 곤란을 겪곤 했다. 미국무부에 근무하던 시플리 여사는 비공식 여권을 만들 때마다 신경 쓸 일이 많다며 프란체스카에게 “남편이 미국시민권을 받도록 하라”고 권했다. 프란체스카가 시민권 얘기를 꺼내자 이 박사는 “한국이 곧 독립할 것이니 기다려 주시오”라고 말했다. 신혼시절 윤치영 내외가 프란체스카에게 한복을 선사했는데 그녀는 한눈에 한복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이승만이 그녀가 한복을 입은 모습을 흐뭇하게 생각하자 그 뒤 생애 대부분을 한복 차림으로 지냈다. 프란체스카는 한국 음식을 배우는 데도 매우 열정적이었다. 이 박사와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남궁염의 부인, 조엔 남궁에게 김치 담그는 법, 콩나물 기르는 법, 찌개와 국 끓이는 법 등 한국요리법을 배우면서 한국의 예의범절과 명절 풍습도 익혔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이 박사는 이곳저곳 강연과 방송출연, 인터뷰 등으로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약속시간에 맞추느라 운전대만 잡으면 과속으로 차를 몰아 프란체스카는 그때마다 가슴 졸여야 했다. 어느 날 격렬하게 차를 몰자 두 대의 기동경찰 오토바이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따라왔다. 이승만은 더욱 속력을 내며 달렸고, 경찰은 뉴욕에서 워싱턴까지 따라왔다. 겨우 제 시간에 도착해 프레스클럽에서 연설을 하자 따라온 기동경찰들은 끝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열정적인 연설이 끝나자 경찰들은 너무나 감동해 박수를 보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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