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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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여 일어나라'

朝興마저 사라지다니

민족은행 109년 역사 통곡한다

시련 많았지만 가문 못 지킨 원망

‘조선이여 일어나라'던 조흥(朝興)은행마저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1897년 한성(漢城)은행으로부터 109년을 장수해 온 유일의 민족은행이다. 조흥은행인들 뿐만 아니라 서글픈 국난사를 지켜보고 체험한 모든 사람들이 통곡할 노릇이다.

불과 24년 남짓한 신생 신한은행에게 팔려가 자랑스러운 ‘조흥'이 사라진다는 것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렵다. 이제 누가 '조선이여 일어나라'고 울부짖고 '대한민국이여 뻗어나라'고 외칠 것인가.

상공인과 지사들의 발기

조흥은행의 뿌리인 순수 민족은행 한성(漢城)은 1894년 갑오(甲午)개혁 바람에 태어났다. 현물로 징수하던 조세를 돈(金納制)으로 바꾸고 일본계 은행들이 진출하자 민족은행이 필요하다는 의식이 생겨났다.

일본은행의 진출이 경제침략으로 비쳤다. 상공인들 뿐만 아니라 지사형 관료들이 자극받아 나라경제를 지킬 은행을 설립하자고 뜻을 모았다.2012-03-12_175844.jpg

오늘의 재경부장관에 해당되는 탁지부(度支部)대신과 유력인사들이 1896년 광통방 교환소에 모여 이를 논의했다. 탁지부 고문인 J.M.Brown이 자문역을 맡아 줬다. 이듬해 한성은행 규칙을 만들고 설립 인가를 받으니 오늘의 조흥은행 뿌리이다. 이때 마련된 한성은행 규칙이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정관이라는 점도 역사적 사료이다.

1897년 2월 김종한(金宗漢)이 은행장으로 발족한 한성은행은 일본계 은행과 힘겨 온 경쟁에 밀렸지만 민족의 자존심이었다. 시시각각 일본계 은행이 상공업계를 장악해 나갔다.

민족계는 은행 재건을 위해 1903년 2월,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하겠다는 청원서를 탁지부에 제출, 인가를 받아냈다. 이때 본점을 안국방 소안동으로 이전하고 정부 고위직을 역임한 이재완(李載完)을 2대 은행장으로 선출했다.

다시 1906년 주식회사 한성은행으로 변경하고 본점 외에 처음으로 수원지점을 개설하여 국내 상공업 발전을 뒷받침하기 위해 온갖 힘을 쏟아 부었다.

일본계가 경쟁하다 극심 시련

한일합병 당시 한성은행 자본금은 30만원에 지나지 않아 자기자본 확충이 시급했다. 1912년 7월 증자를 실시하고 최근까지 본점 소재지인 경성부 남대문동 1정목 14번지에 신축 사옥을 준공했다.

빼어난 서구식 건물이던 이 한성은행 본점이 민족금융의 본산으로 당당한 위용을 자랑해 왔음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침체에 빠져있던 경기가 1914년 세계1차 대전으로 전시 특수가 일어나자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한성은행도 전국 주요도시에 지점과 출장소를 개설하여 1920년에는 12개의 점포망을 운영했다. 이보다 앞서 1918년 12월에는 동경에 지점을 개설함으로써 사상 최초로 은행의 해외진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전후 경기하락에다 1923년 9월의 관동대지진으로 일본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자 그 여파가 한성은행의 경영위기로 번졌다. 1927년 4월에는 국내은행들이 모두 이틀간 지불유예(모라토리엄)로 임시휴업 하는 사태를 빚었다. 이 때문에 한성은행도 인원을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조조정은 한성은행의 재기를 가져다 주었다. 내실을 회복하고 만성적인 연체 대출금도 정리했다. 1942년 한성은행 직원 1천여명은 난국극복의 체험을 ‘정리시대를 뒤돌아보고'라는 이름으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전해온다.

민족계 통합체로 조흥(朝興)

1937년 일본의 도발로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일제는 전시금융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은행의 강제 통폐합이었다. 한성은행은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1941년 경상합동은행을 흡수 합병했다. 그 뒤 호남은행을 동일은행에 흡수시켰다가 마지막으로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통합마저 강행했다.

이 무렵 민족계 은행 9개의 운명은 이리저리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한성은행 계열은 해동은행을 비롯하여 최초의 지방은행이던 구포은행, 주일은행, 대구은행 등이었고 동일은행 계열은 한일은행, 호서은행, 동래은행, 호남은행 등이었다. 이 같은 구도에서 1943년 7월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계약으로 조흥은행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총독부의 전시 금융체제 구축의 일환이었다. 우리나라 민족은행의 통합체로 조흥은행이 발족한 것은 1943년 10월 1일이었으니 지금부터 63년 전의 일이다.

8·15 혼란, 6·25 폐허 극복

8·15 해방으로 미군정이 들어섰을 때 일본 은행인들은 퇴거하고 일인 소유재산은 적산(敵産)이란 이름의 귀속재산으로 분류됐다.

조흥은행은 미군정청과 귀속재산관리자금 수납 대행은행으로 단독 계약했다. 일본인 없이 우리은행원만으로 운영할 수 있는 유일한 은행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김일성의 남침으로 조흥은행은 부산으로 피난 가는 신세가 됐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서울로 복귀한 1953년 8월까지 부산지점이 본부가 되어 전시영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사후 결산 때 전쟁 피해금액이 18억 원이 넘었다.

휴전 후 시중은행 민영화 방침에 따라 조흥은행은 1957년 민영화 되고 56년에는 증권거래소 개장과 동시에 주식 상장 제1호로 등록 되었다.

그 뒤 60~70년대 자립경제 건설기를 통해 조흥은 줄곧 선두은행으로 여수신 및 저축을 선도해 왔으나 IMF와 기업구조조정 때 대형 부실사태로 치욕의 공적자금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으니 비통할 노릇이다.

세칭 한보사태를 비롯하여 삼미그룹, 진로그룹 부도에다 기아사태 까지 겹쳐 100년이 넘는 자랑스러운 역사가 오욕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한보사태가 한창이던 지난 97년 조흥 100주년 기념식은 고난과 시련을 떨쳐 버리고 조흥인들이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다고 다짐한 날이었다. 조흥은 IMF 이후 9조원이 넘는 부실여신을 정리하고 40%가 넘는 대규모 감원과 점포망의 3분의 1을 축소시킨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이로써 조흥은 New Bank로 거듭 태어났다는 확신을 보여 주었지만 지난 2천2년 정부가 조흥은행 지분 매각 방침을 발표한 후 새파란 후발은행에게 팔려가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가문 못 지킨 이들을 원망한다

‘조흥, 너마저' 가문을 지키지 못했느냐는 원망을 듣지 않을 수 없다. 5?16 이후 정신없이 밀어붙인 경제개발시대 저축을 흡수하고 산업자본을 동원해 주던 역전의 용사들도 모두 사라지고 조흥만이 명맥을 지키는 시점이다.

서울은행에서 부터 상업은행, 제일은행, 한일은행 등의 이름은 벌써 잊어버렸다. 씨티은행이니 스탠다드차타드라는 외래은행들이 행세하며 지배하는 세월이다.

은행 이름이야 달라도 상관없다 하겠지만 외래 은행인들이 우리나라 금융시장을 지켜주고 기업자금 공급에 어떤 사명감을 가질까. 금융시장에도 공공의 질서가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하면 그들이 무슨 말로 받아들일까.

조흥은행이 신한금융그룹으로 귀속하여 새로운 팔자를 현명하게 개척하리라 확신하지만 조흥(朝興)이란 간판이 내려진다는 사실만은 너무나 서글프기 짝이 없다. 어떤 방식이건 조흥은 살아남아 한 많은 민족은행의 맥을 유지해 주었으며 좋겠다는 소망이다. (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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