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호,1999년9월]

구조조정으로 살아난 재벌

한화그룹 金昇淵(김승연) 회장

마취 않고 살 도려낸 아픔 아는가!

글 / 金喆秀(김철수) 편집주간

한화그룹의 김승연(金昇淵) 회장은 IMF 이후 ‘구조조정 마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10대 그룹 중 가장 먼저 구조조정에 나서 기업 재구축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 재계로부터 그 성과를 인정받아 전경련 구조조정 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경험과 노하우를 전파하는 데 앞장 서고 있기 때문이다.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의 각오로 임했던 한화그룹의 구조조정 노력과 그 성과를 들어본다.

죽기 각오로 자구노력 성공

-한화그룹은 IMF 직후인 지난 97년 12월 10대 그룹 가운데 처음으로 과감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고 실제 과감한 행동으로 구조조정 모범기업이 됐습니다. 구조조정의 성과를 듣기에 앞서 그간 기업 총수로서, 또는 한 인간으로서 어떤 내면의 갈등과 번민을 겪었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고통은 갈등과 번민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찢어지는 아픔이었습니다. 아마 마취를 하지 않고 수술대에 올라 살을 도려낸다면 그 정도로 아팠을 것입니다. 그 정신적 아픔을 잊기 위해 집에 러닝머신을 설치해 놓고 발에 물집이 생겨 새살이 돋고, 또 물집이 생겨 터질 정도로 걷고 뛰었습니다. 오너가 체면과 격식을 고집해 기업을 외형 위주로 끌고 가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깊이 반성했습니다.”

(항간의 소문에는 김 회장이 매몰찬 사람이란 평가도 있다. 그러나 잠시나마 구조조정 과정에서 총수로서 혼자 삼켰던 속내 이야기를 듣고 보니 항간의 소문은 전혀 사실로 실감되지 않았다.)

-구조조정 노력 중에도 어떤 일이 가장 가슴 아팠는지요.

“우선은 구조조정을 위해 회사를 떠나야 했던 임직원들이었습니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약 5천명의 임직원이 청춘을 바쳐 20∼30년간 근무해온 직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특히 그들이 자신들이 희생하더라도 회사가 살아야 한다는 애사심을 발휘해 주었을 때는 정말 눈물겹고 감동적이었습니다. 평생 마음의 빚으로 가져가겠습니다.”

(김 회장은 지난해 연말 퇴직 임직원 5천여 명에게 친필 연하장과 달력을 보내 인연을 되새긴 데 이어 구정 때는 4백여 명의 퇴직 임원에게 은수저 세트를 보내는 정성을 보였다.)

유교적 기업 문화가 큰 힘

-기업도 알짜배기부터 파는 식이어서 마음 고생이 심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화에서 주력기업을 맡아왔던 한화에너지, 가장 수익성이 높았던 한화기계 베어링 부문을 매각할 때 착잡했던 심정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이 사업들은 특히 선대부터 수십년간 운영해온 것들 아닙니까? 하지만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김 회장은 구조조정 이전까지 계열기업에 대한 애착과 오기가 매우 강했다. 지난 96년 한화종금이 M&A 돌풍에 휘말렸을 때 그는 기업 자존심을 내세워 우직하리만치 경영권 방어에 나서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러나 김 회장은 이번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죽을 각오를 하고 덤벼 든 오기 때문에 살았음을 강조했다.)

-한화가 10대 그룹 중 가장 먼저, 가장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에 나선 이유는 무엇인지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한보·진로·기아 그룹이 차례로 무너지던 지난 97년 여름부터 경제 흐름이 매우 불안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10대 그룹에 대해서는 별다른 심사없이 대출해 주던 해외 금융기관들의 움직임도 예전같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연말에는 IMF사태로 한국 정부와 금융기관, 기업의 신용도가 모조리 추락했고 금융시장이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상황이 이처럼 되다보니 한화에너지의 원유 도입 등 기존 해외와 연관된 사업에서 모든 것이 한꺼번에 막히는 악순환이 시작됐고 그룹의 숫자상 부채비율이 엄청나게 불어나 더 늦기 전에 수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두 발 앞을 보고 한 발을 앞서 간 것이지요.”

(돌아가는 형세에 두려움을 느끼고 살기 위해 한 발 앞서 살기위한 필사의 노력을 쏟았다는 느낌이다.)

-한화그룹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업매각, 빅딜, 경영권 위임 등 여러 가지 기법을 보였는데 무엇에 목표를 두고 어떤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했는지요.

“부채비율을 낮추고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을 해소하라는 정부의 정책에 적극 순응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세웠습니다. 부채비율을 정부가 제시하는 수준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보유 계열사나 자산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국내 기업들이 한꺼번에 상당한 물량을 내놓아 매각조차 쉽지 않았지요. 신속하고 과감한 구조조정을 위해서는 외국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물건부터 팔아야 했고 결국 알짜배기부터 내놓는 수순이 됐습니다.”

-과도한 구조조정으로 한화의 그룹전략이 불투명하게 됐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화그룹의 강점과 약점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한화그룹은 어느 조직보다 유교적 풍토가 강합니다. 따라서 우리 그룹의 첫 번째 강점은 사원들의 애사심과 충성심이 강하다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드문 기업문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음은 신용입니다. 지난해 그 어려움 속에서도 11개 협조융자 기업 중 유일하게 협조융자자금을 전액 상환했고 약속대로 1,200%의 부채비율을 180%대로 줄였습니다. 약점이라면 가부장적 기업문화의 온정주의적 분위기와 그간 주로 시장지배적 사업을 하다보니 영업력이나 수출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한화그룹의 유교적 풍토는 창업자이자 김 회장의 선친인 고 김종희(金鍾喜) 회장에게 영향받은 바 크다는 생각이다. 김 창업자 생존시 이 같은 분위기를 대변하는 숨겨진 일화가 있다. 서울 프라자호텔을 일본과 합작으로 짓고 난 후 일본인 지배인이 “호텔 영업이 잘 되자면 밤 여인들의 출입이 허용돼야 한다”고 말하자 “그런 소리하려면 당장 일본측 투자자금을 빼 나가라”며 호통을 쳤다. 김 창업자는 자신이 설립한 천안북일고의 야구팀이 고교야구에서 우승했다는 소식을 골프장에서 듣고 기분이 좋다며 캐디에게 특별팁을 줄 정도로 잔정이 많았다.)

유망사업 투자 여력 확보

-과도한 구조조정으로 그룹의 전략이 불분명해졌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저도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사업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정리키로 한 정유사업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사양화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반면 한화가 육성키로 한 관광사업은 2001년 영종도 국제공항 개항, 2002년 월드컵 개최 등으로 매우 유망합니다. 앞으로 한화는 화학을 주력업종으로 하면서 유통레저를 제2의 주력으로 육성하고 금융산업에도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 3∼4년 후에는 우리가 자신있고 유망한 사업에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될 것이고 그 때 한화의 기회는 무궁무진 할 것입니다.”

3조원 부채 덜고 협조융자 졸업

-스스로 회장께서는 지금까지 한화의 구조조정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그동안 진행해온 한화에너지의 정유부문 매각을 완료해 1기 구조조정이 끝났습니다. 한화는 그동안 바스프우레탄, 한화NSK정밀, 한화GKN, 종합화학 과산화수소사업, 기계 베어링, 자동차 부품 지분 등을 매각했고 한화투신의 경영권을 외국에 넘겼습니다. 그 결과 97년말 32개였던 계열사 수가 21개사로 축소됐고 내년 초까지는 10개 이내로 줄어 작지만 내실있는 기업으로 거듭 날 것입니다.

이번에 정유사업을 현대에 넘기는 것으로 한화는 약 3조원의 부채를 덜어내 부채비율을 180%로 낮추게 됐고 협조융자 6천4백87억원 전액을 상환해 11개 협조융자 기업 중 유일하게 졸업을 하게 됐습니다. 한화는 이제 수익성과 발전가능성을 고려해 경쟁력이 있는 사업부문에 선택적으로 집중 투자하는 2기 구조조정에 돌입할 것입니다.”

-한화그룹은 구조조정의 비싼 대가를 치렀고 임직원들은 고통을 분담했습니다. 앞으로 그 고통 뒤의 보람을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약속합니다. 이 기회에 그룹의 향후 구도를 잠시 소개하겠습니다. 한화종합화학과 (주)한화의 화약 부문을 중심으로 한 화학을 그룹의 주력업종으로 하면서 한화유통·한화개발·한화국토개발 등 계열사를 위주로 하는 유통레저를 제2의 주력업종으로 육성할 계획입니다. 또 한화증권·한화투신 등 금융업에도 적극 참여할 것입니다. 현재 계획중인 주력 계열사에 대한 해외자본 유치가 완료되고 유상증자를 마치면 재무손익 위주의 성장전략을 부가가치 창출 위주로 전환해 질적 경영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올해 매출 6조2천억원, 영업이익 5천7백30억원을 달성할 계획입니다.”

구조조정은 변화 대응력 배양

-구조조정에 혹 정부로부터 압박감은 느끼지 않았는지요. 강력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정부의 재벌정책에 대해 재계가 매우 부담스런 입장이고 불만 또한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부 정책에 대해 재계의 불만이 많다는 얘기는 전경련 입장을 재계의 입장과 같다고 보는 다소 오도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전경련이 재계를 대표하는지, 아니면 5대 그룹만 대표하는지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지난해 10월 김대중 대통령은 구조조정 우수기업 경영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하면서 구조조정의 결단과 고통이 절대 헛된 것이 아니며 빨리 실행한 기업들이 후회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구조조정이란 것이 변화에 대한 대처능력을 배양하는 방향으로 군살을 제거하는 작업이라고 본다면 이를 적극 추진한 기업이야말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김 회장은 한화의 경우 구조조정이 전적으로 자체 필요성에 따른 것임을 강조했고 또 남보다 일찍 기업재구축에 나선 데 대해 자긍심을 갖는 표정이었다. 마취를 않고 수술을 받으면 상처가 빨리 아문다고 했다. 김 회장의 환한 얼굴은 이제 보기에도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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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캡션: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이제 자신감에 차있다. 다른 기업보다 한 발 앞서 구조조정에 나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이 구조조정에 성공 할 수 있었던 것은 알짜 기업부터 먼저 파는 과단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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