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호]

[다시쓰는 박정희 평전(朴正熙)(39)]

2011-09-30_183038.jpg 불굴의 혼

이후락의 해외 도주

글/ 高正一 (고정일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각하, 주, 죽을 죄를 지, 지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 납치사건의 파문이 사실상 가라앉은 1973년 12월에 들어서면 신년을 앞두고 개각(改閣)으로 국정 쇄신의 분위기를 일신할 생각을 했고, 그때 아울러 이후락을 갈아치울 작정이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불러일으킨 한국과 일본의 거북한 신경전은 김종필 총리의 일본 방문 효과로 사실상 종결된 시점이어서, 이후락 해임이 ‘문책(問責)의 인사(人事)’로 비칠 가능성에 대해서도 굳이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무렵 이후락은 한 건의 진정(陳情) 사건 때문에 박정희한테 더 신임을 잃고 있었다. 육영수의 손을 거쳐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넘겨진 진정 중에 중앙정보부 직원이 민간 채권채무 문제에 개입해 채무자를 연행해서 고문을 하여 허리뼈를 다치게 했다는 내용의 탄원이 있었다.

박정희가 청와대로 이후락을 불러 그 건을 추궁하자, 이후락은 쩔쩔 매며 약속했다.

“각하, 시, 심려 끼쳐서 죄송합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보,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그런 며칠 뒤, 이후락으로부터 조사 보고라고 올라온 내용은 그 진정 내용이 모함이라는 것이었다. 미심쩍은 생각이 든 박정희가 청와대 사정특별보좌관 홍종철과 그 아래 최대현 검사를 불러 특별조사를 지시한 결과, 이후락의 보고와 달리 진정인의 주장이 명백한 사실로 밝혀졌다.

“이런 나쁜 인간 같으니! 김대중이 납치사건으로 날 골탕먹이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날 기만하기까지 해? 괘씸한 놈!”

박정희는 단단히 화가 났다.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난 12월 3일, 박정희는 일부 개각을 단행하면서 이후락을 정보부장에서 해임하고, 신직수 법무부장관을 그 자리로 보냈다.

‘윤필용이 팽(烹)당하더니, 이젠 내 차례인가? 김형욱이가 그러고 보니 나한텐 반면교사(反面敎師)로군.’

이후락은 씁쓸하게 웃으며 해임 직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둘러 출국한다. 중앙정보부는 비상이 걸렸다. 이후락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첩보안테나가 전파를 사방으로 쏘았다. 그 결과, 이후락이 영국으로 날아간 것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영국에서 그의 소재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후락은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뒤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 공항 근처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는 곧장 중남미로 떠난 것이었다.

박정희가 이후락 도주를 보고 받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을 때, 하비브 주한 미국대사가 이후락에 관해서 보고할 내용이 있다며 면담을 신청해왔다.

‘아니, 그렇다면 CIA가 이후락이 출국한 직후부터 행적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과연 미국놈들일세!’

박정희는 하비브의 보고를 듣는 자리에 김종필 총리도 동석시켰다. 하비브는 이후락이 현재 바하마에 체류하고 있으며, 망명신청을 할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있음을 보고했다.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우던 박정희는 하비브가 떠난 뒤 김종필을 보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놈 당장 잡아오도록 해!”

몇 명의 특사가 비밀리에 바하마로 날아가 이후락을 간곡하게 설득하고 겨우 안심을 시켰다. 이후락이 가장 겁을 내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 없이 신상안전이었고, 그 점에 관해서는 확실한 보장이 약속되었다. 이후락은 영국을 거쳐 귀국길에 오른다.

먼저 홍콩에 도착한 이후락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김종필 총리한테 전화를 걸어 자기가 공항에 도착하면 체포할 것이냐고 물었다.

“아니, 이 선배님. 거 무슨 애들 장난 같은 그런 말씀 하시는 겁니까? 체포 같은 건 걱정 마시고, 당장 들어와서 각하 찾아뵙고 심려 끼쳐서 죄송하다고 하세요. 그럼 간단히 끝나는 겁니다.”

“저, 정말 체, 체포 안 합니까?”

“이런 딱한 양반! 여기 마침 신직수 정보부장이 계시니까 바꿔드리겠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수화기를 넘겨받은 신직수가 김종필과 똑같은 내용으로 차분히 설득했다. 그제야 이후락은 납득하고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한다. 이날이 해가 바뀐 1974년 2월 17일. 해외로 도피한지 두 달이 넘어서였다.

박정희가 이후락을 청와대에 불러들인 것은 3월 6일 오후 5시쯤이었다.

“각하,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이후락은 눈물을 글썽이며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박정희는 이후락을 일으켜 자리에 앉게 한 뒤 담배 한 대를 다 피우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꽉 입다문 표정이 차돌 같았고, 담배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이후락의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30여분이 넘도록 기침소리 하나 없이 침묵만 흘렀다. 마침내 박정희가 입을 열었다.

“임자, 조용히 쉬고 있어.”

이후락을 용서하고, 한동안 근신하도록 조치한다. 이후락은 경남 충무의 충무호텔에 장기투숙하고, 그에게는 보호와 동시에 감시 역할의 주치의와 경호원이 따라붙었다.

그 무렵, 북한노동당 대남(對南) 첩보부서인 연락부가 산하 남포연락소에 다음과 같은 지령을 내린다.

‘남조선 중앙정보부장이던 이후락이 해외에 나갔다가 귀국해 지금 충무호텔 2층 특실에서 휴양중이니 그를 납치해오고, 가급적 주치의와 경호원도 함께 납치하라.’

남포연락소는 30명의 특공조를 편성하고 남포의 휴양소를 모의훈련장으로 설정해 마취실습과 납치훈련을 반복한다. 10여 일 후, 김용규를 팀장으로 한 특공조는 두 척의 공작선에 나누어 타고 서해를 건너 중국으로 가서 그쪽 해안선을 타고 남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배가 상해 부근에 다다랐을 때 ‘작전을 중지하고 속히 귀환하라.’는 긴급명령이 떨어진다. 납치 대상 표적인 이후락이 공교롭게도 그 바로 직전에 충무를 떠났기 때문이었다.

경제긴급조치

석유파동이 일어난 즉시 걸프를 위시한 석유메이저 3사의 호의적 배려를 끌어낸 데다 OECD국가들이 1974년에 들어와 차츰 증산조치를 취함으로써 적어도 물량에서는 큰 곤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으나, OECD국가들의 담합 횡포로 1년 사이 4배나 폭등한 석유가격은 우리 경제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의 연간 원유수입액이 1973년 3억5백19만 달러에서 1974년 11억78만 달러로 3.5배나 늘어나 국제수지를 악화시켰고, 그 영향 때문에 각종 석유제품을 쓰는 생산업뿐 아니라 농산물·설탕·대중목욕비 등 간접분야까지 모든 부문에서 가격인상이 불가피해졌다. 1974년의 도매물가는 전년대비 44.6% 상승으로서 6.25동란 이후 가장 높았고, 수입물품 가격도 31.2%나 인상되었다. 정부재정의 경상수지는 1973년 3억8백80만 달러 적자였고, 1974년에는 적자가 전년도의 거의 7배 가까이 대폭 늘어나서 20억2천2백70만 달러나 되었다.

1974년 1월 14일.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국가경제의 위기상황 극복과 서민생활의 안정 및 혼란 방지를 위해 ‘긴급조치 3호’를 선포한다.

긴급조치의 목적은 석유파동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완화하기 위한 정부·기업·소비자의 공동 노력을 조직화하자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저소득층의 부담 경감, 영세민 취로사업 확대, 사업장 임금 체불과 부당 해고(解雇) 엄단, 정부예산 절감, 중소상공업자 지원, 농어민 보호 대책과 국민생활 안정화를 도모하며, 적극적인 소비절약 생활화로 석유파동의 충격을 극복하자는 내용이었다.

긴급조치 선포에 따른 대통령 특별담화문을 통과시키려고 김용환 경제제1수석비서관이 낭독할 때,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별안간 소리친 것이었다.

“잠깐! 틀린 글자가 하나 있습니다.”

낭독은 중단되었고, 모두의 시선이 민관식에게 쏠렸다. 엉겁결에 주목받을 짓을 한 민관식이 프린트를 쳐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여기 심기일전(心氣一轉)의 기는 ‘기운 기(氣)’가 아니라 ‘베틀 기(機)’자가 맞습니다.”

긴급조치 기안자인 동시에 담화문 작성자인 김용환 경제제1수석비서관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순간, 박정희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늘 쓰는 심기일전은 민 장관 말씀이 맞지만, ‘기운 기’자로 쓴 심기일전(心氣一轉)도 좋지 않습니까? 마음과 기분을 한 번 바꾼다는 뜻인데, 이 경우는 오히려 그게 더 나은 것 같은데요. 김 수석의 착안이 아주 좋았습니다.”

박정희의 의견에 따라 원안대로 통과되었고, 심기일전(心氣一轉)은 관보(官報)에도 그대로 나갔다.

덕분에 망신을 면한 김용환은 박정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고, ‘저 분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도 좋다.’고 속으로 다짐한다.

정부는 긴급조치 3호 발령에 이어 2월 들어서 정부가 통제기능을 행사해온 품목가격 및 서비스요금을 대폭 인상했다. 유류가격 평균 82%, 전기요금 30%, 해운요금 최고 109%, 항공요금 60%, 그밖에도 생활필수품·건축자재·신문용지 등의 가격인상이 뒤따랐다.

그럼에도 시장과 국민들은 정부의 조치를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지난날과 같은 매점매석·사재기·품귀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믿고 침착하게 따라주는, 한마디로 말해서 ‘시민의식의 성숙’을 보여준 것이었다.

과잉경호를 싫어한 육영수

1974년 3월 1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은 영부인 육영수와 함께 국립극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날 기념식에는 주한 외교사절들도 부부가 함께 참석했는데, 대통령 경호원들은 예의상 외국대사 부인들의 핸드백을 차마 열어보라고 할 수 없어 물품보관소에 맡기도록 하고, 손수건 한 장만 달랑 들고 행사장에 들어가게 했다.

그 같은 조치에 기분이 상한 대사부인들은 얼마 후의 외교사절부인회에서 3.1절 행사 때의 과잉검색에 관해서 의견을 취합한 다음, 육영수에게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아내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은 박정희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불러 꾸짖었고, 그 연쇄작용으로 청와대경호실 직원들은 호된 집단기합을 면할 수 없었다.

핸드백 말썽은 경호과장을 정직처분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지만, 이후부터 박종규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라 할지라도 외국인에 대해서는 지나친 검문검색을 삼가도록 경호실 직원들에게 지시했다.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육영수는 평소에 대통령과 가족에게 따르는 철두철미한 경호에 늘 불만이었고, 거북스러워했다. 그녀의 인식에는 정도에 넘치는 과잉경호와 과잉충성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1974년 그해 중앙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 지만이 학교에서 상급생한테 얻어맞고 얼굴이 부어서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영부인 비서실인 제2부속실 행정관이 지만에게 ‘어쩌다 누구한테 맞았느냐.’ 하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안 육영수는 행정관에게 인터폰으로 전화를 걸어 책망했다.

“그걸 알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애들 사이에 예사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절대 문제삼지 마세요. 알았죠?”

학교에서 그 사실을 알고는 때린 학생을 정학시키려고 했으나, 육영수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발 그냥 넘어가 달라.”고 교장한테 하소연했다.

어느 날, 육영수가 명예회장인 양지회(陽地會)가 주최하는 경로잔치가 경복궁에서 열렸다. 경호실에서는 주최 쪽에다 “대통령 집무실에 들려오면 곤란하니까 노래는 부르지 말아 달라.”고 협조를 구했다.

그러나 육영수는 그 요청을 묵살하고 프로그램 그대로 행사를 진행하도록 했다. 이윽고 경로잔치를 끝내고 청와대에 돌아온 육영수는 경호과장한테 쏘아붙였다.

“그렇게 과잉충성하지 말아요. 각하 집무실에서 들리긴 뭐가 들려요?”

그해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를 저격한 조총련계 재일동포 문세광이 일본인 행세를 하며 옷 속에 권총을 숨기고 대통령경호팀의 검색을 통과해 행사장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요행이 아니었다.

굳이 꼬집어 말한다면 육영수가 자신의 죽음에 스스로 영향을 끼쳤다고나 할까.

‘집이 왜 하필 흰색이야?’

1974년 6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은 울산 현대조선소가 건조한 초대형 유조선 2척의 명명식(命名式)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청와대를 출발했다. 영부인 육영수와 큰 딸 근혜가 동행했다.

박정희는 가족과 함께 여행할 때면 유난히 즐거워하며, 간혹 짓궂은 장난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날도 달리는 차 안에서 아내와 노래를 같이 불렀다. 그 장면의 그림을 박근혜는 뒷날 이렇게 설명했다.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앉아 있었습니다. 두 분이 차 안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셨어요. ‘두만강 푸른 물에’, ‘황성 옛터’, ‘짝사랑’ 같은 노래를 즐겁게 부르시는데, 화음이 그렇게 잘 맞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가운데 앉아 있었으므로, 마치 스테레오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현대조선소에 도착한 박정희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영접을 받고 영빈관에 들었는데, 다음날 아침 뜻밖의 급보가 올라왔다. 서종철 국방부장관의 긴급전화였다. 동해상에서 우리 해군 경비정이 북한 해군 함정에 나포되어 북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격노해 소리쳤다.

“도대체 뭣들하는 거요? 강릉에 있는 전투기 당장 출격시켜 북한 배 격침시키고 우리 배를 끌고 오시오.”

수화기를 들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우리 전투기가 출격은 했으나, 공교롭게도 동해에 짙게 낀 안개 때문에 목표물을 찾지 못해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해군 경비정을 구출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었다.

박정희는 우울한 기분인 채, 오전 11시 조금 못 미처 시작된 현대조선소 1차 준공식 및 유조선 명명식에서 치사(致辭)를 했다.

“(……) 오는 1977년까지 거대 조선소 두 개를 더 지어 조선능력을 연간 6백만 톤으로 늘리고, 한 해 수출액의 10%인 10억 달러를 조선수출에서 벌어들일 것입니다. (……) 1백 년 전 조국 근대화를 시도했던 사람들이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1백 년 뒤떨어진 근대화를 20?30년만에 해치우기 위해서는 정부와 국민이 불철주야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아틀란틱 바론’과 ‘아틀란틱 바로니스’로 명명되어 그리스 선박회사에 인도될 26만 톤 초대형 유조선의 진수식(進水式)은 한국중공업건설 역사의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서 건조된 선박 중에 가장 큰 것은 조선공사가 만든 1만7천 톤짜리가 고작이었다. 그런 수준에서 정주영은 선박설계도 한 장만 달랑 들고 영국은행에 찾아가서 끈기 있게 거북선 그림이 있는 지폐를 들이미는 기지(奇智)로 마침내 차관을 얻어냈다. 내친김에 그리스 해운업자 오나시스 동생을 찾아가 통 큰 거래교섭으로 발주를 받아낸 다음, 잡초만 무성한 바닷가에서 도크 건설과 선박 건조 동시 진행이라는 상식을 뛰어넘는 기발한 모험을 감행해 결국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이었다.

‘정주영이 저 사람 역시 걸물이군!’

자기 국가부흥 철학의 충실한 실천역군 가운데 한 사람인 정주영에게 마음으로 찬사를 보내며 귀경길에 오른 박정희는 오후 4시 조금 앞서 포항제철에 들렀다.

박태준 사장이 포항제철 영빈관 ‘백록대(白鹿臺)’로 안내하자, 박정희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집 색깔이 왜 하필 흰색이야?”

“한라산 ‘백록담’에서 따온 이름이라, 백록의 백(白)을 연관시켜 흰색으로 칠한 겁니다.”

“이 사람아, 미국 백악관 냄새를 풍기자는 거야 뭐야. 난 싫어.”

박정희가 미국을 싫어하는 줄은 알지만,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박태준은 머쓱해졌다.

달아, 높이 돋우사

1974년 7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해마다 여름휴가 때면 늘 그렇게 해온 대로 진해만의 작은 섬 저도에 있는 별장으로 가족여행을 떠나게 되었다.2011-09-30_183052.jpg

그런데 여름방학을 맞은 고등학생 지만이 모처럼 친구들과 함께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가서 캠핑을 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졸랐다. 청와대 담벼락 안에 갇혀 소년시절을 보낸 지만은 아무런 구속 없이 친구들과 놀러가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고, 어쩌다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골목에서 들려오는 사람소리, 개 짖는 소리 같은 것이 그렇게 신기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육영수는 큰마음 먹고 지만이 해운대에서 친구들과 하루만 보낸 다음 저도로 와서 가족과 합류하는 조건으로 허락해주었다. 육영수는 지만에게 제2부속실 김두영 행정관만 딸려 보내려고 했으나, 박정희가 만일을 생각해 경호원 4명을 붙여주었다.

“보나마나 또 과잉경호로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테니 걱정되네요.”

육영수가 이렇게 말하자, 박정희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인터폰으로 불러 지시했다.

“피서객과 상인들이 지만이 일행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중요해. 절대 다른 사람들한테 선의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요원들한테 단단히 주의를 줘야겠어. 알았나?”

그러나 그 지시는 지켜지지 않았다. 나름대로 막중한 책임감에 압박을 받은 경호팀은 부산시경찰국에 협조를 구해 백사장을 아예 싹 비워버린 것이었다. 깜짝 놀란 김두영 행정관이 대통령의 뜻을 내세워 강하게 시정조치를 요구함으로써 해운대 해수욕장은 비로소 정상을 되찾았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친구들과 그런대로 즐겁게 하루를 보낸 지만이 저도에 도착하자, 육영수는 동행한 김두영에게

“부산에서 분명 무슨 일 있었지요?”

하고 넘겨짚어 물었다. 김두영이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이실직고하자, 육영수는 남편에게 불평했다.

“보세요. 제 말이 맞잖아요. 상인들 장사도 못하게 하다니.”

화가 난 박정희는 박종규 경호실장한테 야단을 쳤고, 박종규는 또 부하들에게 호된 기합을 안겼다.

입장이 난처해진 것은 팔자에 없는 밀고자가 되어버린 김두영 행정관이었다. 김두영은 기분이 상한 나머지 다음날 박정희가 함께 낚시하러 가자고 하는데도 안 가겠다고 버티었다. 전달 심부름을 한 경호관이

“이건 각하의 명령이다.”

하고 윽박질렀으나, 김두영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경호관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박정희는 씩 웃었다.

“대통령 명령도 거부하는 걸 보니, 그놈 쓸 만한 놈이군.”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는 청와대 직원들이 ‘육박전(陸朴戰)’이라고 몰래 수군거리며 웃을 만큼 부부싸움이 잦은 편이었다. 그 때문에 심지어 외교결례임에도 퍼스트레이디를 동반하지 않은 채 대통령 혼자 외국방문길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부부싸움은 강한 개성의 일시적인 단순마찰일 뿐, 그 이면에는 무한한 사랑의 교감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 저도 별장에서 대통령 내외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유난히 다정한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경호관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달빛이 환히 비치는 밤의 바닷가를 단둘이 팔짱을 끼고 거닐면서 ‘황성 옛터’와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르기도 하고, 먼 바다를 향해 “야호!” 하고 외치기도 했다.

그로부터 불과 열흘 남짓 후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비극이 일어날 줄은, 두 본인은 물론 하늘도 땅도 바다도 몰랐다.

1974년 광복절 그날

1974년 8월 15일 목요일 오전.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국립극장은 행정부와 각 사회단체 인사들, 외교사절, 동원된 민간과 학생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10시부터 시작된 기념식은 식순에 따라 진행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사 낭독에 이르러 분위기가 더욱 숙연해졌다.

“(……)특히 우리 한민족은 광복과 더불어 국토 분단의 비극을 강요당했고, 설상가상으로 6.25 공산 침략이 빚은 그 엄청난 참화를 입었는가 하면, 그 후에도 끊임없는 전쟁 재발의 위험 속에서 사회적 혼란과 빈곤의 악순환을 겪었습니다.”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기념사를 읽어나가는 박정희를 객석 맨 뒷줄의 중앙통로 오른쪽 세 번째 자리에서 유난히 날카롭게 응시하는 인물이 있었다. 재일동포 청년 문세광. 김일성의 간접지령에 따라 박정희 암살 교육을 받고 입국했으며, 광복절 기념식에는 주한일본대사의 동행인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아무런 검색도 받지 않고 행사장에 들어온 것이었다.

약 10분 동안 박정희의 연설을 듣던 문세광은 중앙통로로 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춤에 지르고 있던 권총을 배 앞으로 옮겼다. 그 순간,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탄환이 발사되어 범인 자신의 허벅지를 관통했다. 오발사고로 당황한 범인은 아픔을 참고 중앙통로로 해서 연단을 향해 달려갔다.

“(……) 나는 오늘 이 뜻 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시종일관…….”

박정희가 북한에 대한 불가침조약을 말하고 있을 때, 20m 앞까지 접근한 범인이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제2탄은 박정희가 뒤쪽에 서 있는 연설대를 맞혔으나, 연설대는 방탄(防彈) 구조물이었다. 저격범은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이었다. 제4탄을 쏘려고 했지만, 박정희가 재빨리 몸을 낮추어버림으로써 저격범은 표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나름의 절망과 분노에 찬 저격범의 눈에 화사한 한복 차림의 여인이 들어온다. 순간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탄환이 육영수의 머리에 명중한다. 저격범이 제5탄을 쏘는 순간, 관중석의 누군가가 발을 건다. 범인은 엎어지면서 방아쇠를 당기고, 탄환은 연단 위에 걸린 태극기를 맞춘다. 범인은 엎어진 상태에서 체포된다.

권총을 겨누며 단상을 향해 돌진하는 문세광을 보고 맨 먼저 대응자세를 취한 것은 박정희의 뒤쪽에 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었다. 박종규는 권총을 빼들고 단상 앞쪽으로 뛰어나왔으나, 관중석 쪽에서 연단을 향하고 있는 스포트라이트에 눈이 부셔 저격범을 제대로 겨냥할 수 없었다.

문세광이 제압된 직후 또 한 방의 총성이 울리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렸다. 단상에 있던 경호원 한 명이 뒤늦게 관중석을 향해 권총을 쏘았고, 그 탄환이 합창단원으로 나와 있던 한 여고생의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육영수와 여고생이 들려나가고 저격범 문세광이 연행되는 사이에 박정희가 연설대 위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몹시 술렁거리던 관중들이 안도의 환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박정희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기념사의 끊어진 다음 부분을 정확히 짚어 이어서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거나 건너뛰지도 않았다. 기념사를 다 읽고는 연설대에서 한 발 물러나 관중석을 향해 고개 숙이면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우렁찬 박수가 터졌다.

이어서 합창단이 ‘광복절노래’를 부르는 동안, 박정희는 단상의 인사들과 악수를 나누고 무대 뒤로 퇴장했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몸가짐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취재차 그 현장에 있었던 미국 워싱턴포스트 신문 돈 오버도퍼 기자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날 내가 가장 놀란 것은 저격범의 총격 자체가 아니라, 박 대통령이 연설을 다시 시작한 것이었다. 아내가 총에 맞아 실려 나갔는데도 연설을 계속하다니, 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우리 미국인의 기준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육영수가 급히 서울대학병원으로 실려 간 뒤, 박정희는 국립극장 극장장실에 잠시 머물며 상황보고를 받다가 “다음 행사장으로 가야지” 하며 일어섰다. 다음 행사란, 서울지하철(지금의 1호선) 개통식이었다.

주위에서 모두들 펄쩍 뛰며 극구 말렸다. 정황으로 보건대 또 다른 암살자가 박정희의 행사 참석을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일단 스케줄이 잡혀 있는 공식행사인데 어떻게 안 가.”

박정희는 고집을 부리지만, 결국 주위의 적극적 만류에 못 이겨 정일권 국회의장을 대신 보낸다.

시설이나 서비스에서 세계 최고의 지하철로 꼽히는 서울지하철은 공교롭게도 그 비극적 사건 발생과 동시에 역사적 개통 테이프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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