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한말 외교 秘史(비사)의 현장

2012-05-14_091824.jpg 손탁(Sontag) 호텔

글 이순우, 을사조약 이전 외교가 중심

대한제국 말기 근대사의 역사현장이자 외교가의 집합소 역할을 맡았던 손탁(Sontag)호텔이 근대 서울의 역사문화 자료로 출간됐다. 저자는 대한제국 말기와 일제 총독시절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던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장으로 개화기 서울의 서양인 호텔과 함께 손탁호텔의 역사를 다방면으로 다뤘다.

치외법권적 외교가의 회합장소

손탁호텔이 최초의 서양호텔은 아니지만 1902년 신축, 1917년 매각, 1922년 철거까지 전 과정이 근대사의 격동현장이다. 특히 독일 태생의 손탁 여인이 고종과 민비의 측근으로 대한제국 말기의 궁중비사와 당시 외교가 이면사의 중심인물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서양호텔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2012-05-14_091914.jpg

손탁호텔은 미국인 헐버트와 영국인으로 대한매일신보 발행인이던 Bethel(한국명 裵說) 등 배일 외국인들의 활동무대이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하여 일본 이등박문이 이곳에 투숙하여 조약체결을 배후에서 조종 압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미국, 러시아, 프랑스 공사 및 외국 선교사들도 손탁호텔에서 자주 회합을 갖고 구미를 시찰하고 온 민영환, 이완용, 윤치호 등 정동구락부 멤버들도 많이 이용했다. 이 가운데 이완용은 정동구락부의 거두로서 배일파로 활동하다 친일파로 변신하여 매국노가 됐다.

이 무렵 손탁호텔은 한일합병 이전까지는 일종의 치외법권지대로서 각국의 외교적 이해조정과 음모·상담소로 이용됐다고 볼 수 있다.

아관파천 후 러시아세력 쇠퇴로 출국

손탁은 독일태생으로 주한 러시아 공사 웨베르(Waeber)의 처제로 그의 추천에 의해 궁중의 외국인 접대계로 임명되어 고종과 민비를 가까이 모셨다. 그녀는 독어, 불어, 영어 외에 조선말까지 익혀 국왕과 민비의 총애를 받으며 궁정에 서양문물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친일파가 득세하고 러시아 세력이 쇠퇴하면서 손탁호텔도 운세를 다하고 손탁도 풍파에 쫓겨 출국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손탁이 조선왕국에서 가져온 돈을 동생인 웨베르 공사 부인 명의로 러시아 은행에 예치했다가 러시아 기업에 투자하여 노후에 대비했지만 러시아 혁명으로 몰수당하고 말았다.

결국 손탁 여인의 일생은 극동의 소왕국이 멸망하는 풍파를 목격하고 북극의 대제국이 패망하는 과정에 1925년 71세로 러시아에서 객사한 것으로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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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의 풍물 커피, 활동사진 등

이 책에는 근대 개화기에 서양호텔이 인천에 먼저 들어서 해리호텔, 스튜어드호텔 등이 성업했고 서울에는 서울호텔, 팔레호텔, 손탁에 뒤이어 철도호텔로 착공한 조선호텔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개화기의 풍물로 커피, 활동사진, 당구장, 신식 결혼식, 자전거 및 외국인이 궁궐을 구경하는 절차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저자는 근대화기에 들어온 서양호텔 등이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문을 닫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의 호텔만이 존재하여 대한제국 말기의 역사 현장이던 손탁호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 너무나 아쉽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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