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6월호]

반공청년의 호곡소리

남산 소월길의 6월

지금은 추모식도 없는 잊혀진 역사

글 / 최수권 (연세디지털미디어 대표, 수필가)

계절이 짙어지면서 대지는 부풀어 깨어나고, 봄꽃들의 향연으로 사람들은 환희에 휩싸이기도 한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날들이다. 이 싱그러운 계절은 만물이 생성의 기운으로 넘실대는 축복의 계절이다.

서울 중심 남산에도 신록의 푸르름으로 살아나고, 외국 관광객들의 투어 코스로 빠지지 않는 명소가 됐다. 내국인도 계절의 낭만을 만끽할 수 있게 교통편이 잘 되어있다. 서울야경을 즐기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순환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남산 소월길의 반공 청년운동 기념비

관광 코스와는 별도의 위치에 케이블카 승강장 건너편에(소월길 근처) 반공청년운동 기념비가 있다. 69년 6.25일에 건립된 추모비다. 나는 당시 제막식에 참가했다. 벌써 43년 전이다.

8.15 해방에서부터 6.25전쟁 전후 공산좌익분자들과 맞서 싸우다 순국한 17,274명의 반공청년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였다.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에” 라는 비문과, 순국자들의 명단을 보면서 젊은 날의 난, 참 많은 상념에 젖었다.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것은 유족으로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행색들이 너무 초라하고, 남루한 차림이었다. 행사를 주관하는 집행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반공청년운동의 단체를 단일화 한 대한 청년단 옛 동지들이었다. 1953년 이후에는 청우회(晴雨會)라는 반공애국단체였다.

옛 동지들이 사재와 성금, 김성곤 의원 성금, 박정희 대통령의 하사금으로 추모비를 제막하게 됐다는 경과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당시 이런 의문을 가졌다. 왜, 이런 훌륭한 의인들의 숭고한 정신을 어느 애국단체가 주관해야 되는가?

해방이후 이들의 반공투쟁은 값진 것이었다.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을 맞자 북한의 김일성은 공산괴뢰 정권을 세우고, 남한내에서는 남노당이 조직되어 전국을 적화 하려는 음모가 진행됐다. 그들은 살인, 테러, 방화, 태업을 조직적으로 행했고 폭력혁명으로 적화를 꿈꿨다. 우리의 조국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이런 상황에 궐기한 것이 애국 청년들이었다. 애국충정의 일념으로 일어난 순수한 젊은이들이 전국 방방곳곳에서 공산도당과 맞서 투쟁한 것이다.

공산괴뢰국가가 되느냐, 자유민주독립국가가 되느냐 하는 운명적인 시대, 시간들이었다. 좌익계 청년분자와 민주진영 청년학생 단체간의 치열한 투쟁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됐다. 당시 대한독립청년단, 광복청년회, 서북청년회, 민족청년단, 대동청년단, 청년조선 총동맹 등의 단체가 오직 애국심 하나로 투쟁했다.

48년 5월 10일 총선을 거쳐 대한민국이 수립된다. 공산도당은 총선거에 온갖 파괴 공작을 책동했으나 애국청년단체들의 활동으로 무사히 치르게 된다.

6.25 전쟁중 애국청년 조직은 군, 경의 작전에 협력했고 적 치하에서 향토를 사수하기 위해 반공구국 전선에서 수많은 이들이 몸을 바쳤다.

월남 공산화는 예견, 예측됐다

우리는 월남의 패망, 월맹군에게 한순간에 넘어간 공산국의 베트남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베트남의 인구는 8,000만명이었고, 미군의 군사무기를 대량(50억 달러)으로 지원받아 군사력에서 북베트남을 훨씬 앞지른 세계 4위의 국가였다.

남베트남은 육군 128만, 항공전력 1,800대이었지만 월맹은 고작 육군 30만에 불과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해방되면서, 북 월맹의 호치민은 중국과 러시아의 세력을 업고 베트남의 무력 통일에 몰입했다.

자유 남베트남은 반미 반전데모, 간첩과 시민종교단체의 선전·선동결과 미군의 전면 철수 후 공산화 되고 만다. 수백만이 유랑 난민이 되고, 숙청되거나 보트 피플로 세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73년 휴전이후,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좌파 애국단체, 그들이 양산한 수십개의 좌파언론들이 좌경화 공작에 앞서고, 민족간의 내전을 명분으로 미국을 고립시켰다. 그리고 패망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명, 전체 인구의 0.5%의 세력이 사회근간을 뒤흔들었고, 5만명의 월맹 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하여 시민, 종교단체는 물론, 정부의 핵심에까지 침투 장악하고 있었다.(김성광 목사/월남패망원인 인용)

당시 여론의 대세는 국방과 안보를 강조한 사람은 전쟁에 미쳤거나, 정신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월남 패망의 요인, 빌미는 국가지도층의 만연된 부패, 부정축재, 비리 등이었다. 이는 우리도 주목해야 할 대목이다.

75년 9월은 월남의 대통령 선거 예정일이었다. 혼란을 조정했던 월맹군은 그해 1월 월남 침략을 강행, 세계 4위를 자랑하던 월남군은 월맹군에 먹히고, 미국은 지원하지 않았다. 월남의 공산화는 예견되고, 예측된 것이었다. 대비하고 준비하기에는 좌파들의 전략 전술을 너무 몰랐다.

지금은 추모식도 없는 잊혀진 역사

돌아보면, 우리의 해방정국 6.25전쟁 당시의 상황이 월남의 정국과 너무 닮았다. 그리고 그런 시대적인 상황의 연장이 이시대의 한국의 모습이라면 너무 비약된 논리일까?

해방과 더불어 창궐한 공산세력과 맞서 싸웠던 그리고 목숨을 바쳤던 반공애국청년들의 값진 희생에 숙연해진다. 이들이야말로 민주대한의 초석이요, 조국의 수호신이라 아니할 수 없다.

74년에 6·25, 추념식을 한다는 통보를 받고 유족으로 참석했다. 조촐한 행사장에 유족이 50명 정도 참여하고 있었다. 식이 끝나고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고인들이 무슨 공명심이나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해 목숨으로 공산화에 저항 했을까요. 누군가 해야 할 일을 앞장선 것이지요.”

유족들은 별도 모임을 갖고, 관계 기관에 유족들의 처우문제, 망자의 명예 등에 건의하자는 의견들도 있었지만 나는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추모행사도 없어진 듯 하였다. 그렇게 잊혀진 역사의 사건으로….

6월이면 나는 혼자서 그 추모비를 찾는다.

“짧은 일생 영원한 조국에….”의 비문을 올려다보면서 “당신들의 고귀한 순국이 있어 이 나라는 절대 공산화되질 않는다고…”

6월의 한낮에 올려다본 신록의 남산은 평화로운 여유로움으로 싱그러움을 피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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