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호선 지하철 내에서 독서유랑단 회원들이 책을 읽는 플래시몹을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서울 2호선 지하철 내에서 독서유랑단 회원들이 책을 읽는 플래시몹을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최영훈 칼럼니스트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2년 전 늦가을 무렵이었던 듯하다. 지하철로 이동 중에 위안텅페이의 <삼국지 강의>를 읽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불쑥 “야, 요즘도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네. 무슨 책 읽으시는가?”하며 격찬을 동반한 호기심을 보이셨다. 좁은 지하철 안이라 민망한 마음도 들었으나, 생각해 보니 어르신 칭찬이 지당한 것도 같았다.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 만나는 게 드문 일이 된 요즘이니까.

단체 관광 같은 독서모임


독서 모임은 흔해졌다. 관련 자료를 보니 서울시에만 시청과 시립도서관, 교육청등 유관기관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독서 모임이 천 개가 넘는다. 부산시립시민도서관이 주관하는 원북원 부산 운동이 2021년에 지원하는 독서 동아리는 총157개다. 이중 121개는 일반인 동아리고 학생 동아리는 36개에 불과하다. 아내의 독서 모임도 이 일반인 동아리 중 하나다. 이들 모임의 책 구매는 관련 기관도 거든다. 적당한 독후감만 후에 제출하면 된다. 덕분에 지난 몇 년, 나도 몇 권 얻어 읽었다. 이런 전폭적인 지원 덕인지 이제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은둔형 시 낭송 모임은 찾기 힘들고, <변호인>에서처럼 사회과학 책을 읽는 모임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 찾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부산만 그런가? 독서모임은 많아졌는데 오히려 고독한 독서가를 찾기 힘든 그 이유를 추측해 봤다.

아내의 독서 모임을 비롯하여 주변 지인과 SNS와 온라인에서 독서모임을 찾아 살펴보니 요즘 독서 모임은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고, 긍정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모임이 주를 이뤘다. 이런 자아실현과 자기계발, 심지어 친목도모를 위한 긍정의 독서 모임은 읽은 책의 권수를 늘리기 위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서로를 격려하고 있었는데, 그 격려와 독려의 구호와 모양새가 영업팀의 그것이나 다단계 기업의 그것과 설핏 닮아보였다. 또 이들은 영업부서나 다단계 기업처럼 회원 수를 늘리고 모임의 횟수도 늘려야 하니 모임의 문턱과 가독의 문턱을 경쟁하듯 낮추고 있었다. 그러니 주로 선택되는 책들은 대체적으로 백과사전 흉내 내는 교양 인문학, 말랑말랑한 심리학, 부대낌 없는 소설, TV와 온라인에서 소위 뜨는 책들이 주를 이뤘다.

이런, 소위 잘 팔리는 책의 내용을 잘 간추린 콘텐츠는 인터넷에 흔하다. 책 내용을 정리해 주는 유튜버도 많고, 블로거도 많다. 그러니 이런 책은 읽어도 안 읽은 것 같고, 안 읽어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런 책은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 사이에 그 감상의 표현에 크게 격차가 없어 모임의 인원과 횟수 늘리기에 편리하다. 이런 모임이 읽은 책들의 목록은 겹치기 마련이다. 덕분에 모임을 갈아타기도 쉽고, 모임과 모임의 교류 또한 편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나 이건 문제가 될 수 있다. 각기의 모임마다 대동소이한 책들을 읽어 왔고, 읽어 나갈 것이라면 각자의 모임과 그 모임에 참여하는 개개인의 교양의 지평과 의식 세계는 모임을 하면 할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서로를 닮아간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의외로 좀 심각한 문제이지 않을까? 초등학생들이야 아직 자기 세계관이 없으니 선생님과 부모의 독서 지도를 받으니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납득할 수 있지만 나름 생각이 있다는 다 큰 어른들의 독서 목록이 엇비슷하다면, 코스도 감흥도 규격화 된 단체 관광객 같은 단체 독서가를 양산하는 것이니 말이다.

고독한 독서가의 조건


여행도 단체 관광이 아닌 개별 여행이 있고, 심지어 혼행족도 흔한 시대이니 고독한 독서 또한 즐겁지 않을까? 실재로 혼독이라는 말도 몇 년 전부터 젊은 층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조만간 혼독의 대유행이 오지 않을까? 고독한 독서가의 희열만 알게 되면 그 유행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독한 독서가의 희열은 뭘까? 그 힌트를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오프닝 멘트에 담긴, 공복을 채우는 행위에 대한 철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시간이나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으로 공복을 채우는 때, 잠깐 동안 그는 자기 멋대로 되어 자유롭게 된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 고고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에서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에 밑줄을 긋고, “공복”과 “음식”을 각각 “지적 호기심”과 “독서”로 바꿔보자. 그럼 고독한 독서가의 기쁨의 조건이 그려진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어느 것에도 얽매임 없이 지적인 허기를 독서로 채우는 행위, 바로 이 행위가 고독한 독서이자, 그 독서가의 기쁨의 원천이지 않을까?

그 고독한 독서가의 독서는 어떤 결과를 만들까? 일단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이 그러하듯 고독한 독서가의 감동 또한 독백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전시되어지지 않는 앎이고, 혼자 전율하는 깨달음이자, 일인분의 공기를 바꾸는 감동이다. 감동과 이해의 독립성은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 그 책이 푸드 코트 같은 대형 서점에서 산 베스트셀러이든, 은둔 고수가 운영하는 맛 집 같은 독립 서점에 산 독립출판사의 구하기 힘든 책이든 상관없다. 그 감동과 이해를 타자에게 이해 받기 위해 타자의 언어, 공동체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순간, 그 부질없는 시도를 하는 순간, 일인분의 그것은 사라진다.

고독한 독서가의 기쁨


우리가 각종 독서 모임에서 나눠야 할 건 책 내용이나 그로인해 얻은 상투적인 교훈과 감동이 아닌 뭔가 달리 본 것, 다른 해답과 철학 같은 것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나눔은 다른 감동, 다른 해석, 심지어 그 책의 무가치함까지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 모임에서나 가능할지도 모른다. 권위적인 해석자가 부재하는, 그래서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그 다름으로 인해 논쟁하여 내 안의 지성의 칼날이 벼려지는 모임. 이해 받지 못함을, 이해 받을 수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임. 이해 받지 못하여 결국엔 그 모임 밖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독서가와 그런 독서가들의 결투 같은 만남에서 가능할지 모른다.

그런 모임이 가능하다면 어쩌면 모이 되 모두가 고독하게 존재하는 고독한 독서가의 모임이 되지 않을까? 그런 모임들이 고독한 독서가를 또 만들어내지 않을까? 그런 모임들이 결국엔 독서는 스스로 인증하는 행위이자, 스스로 자신을 다져가는 수행 같은 행위임을 깨달은 수많은 고독한 독서가를 탄생시키지 않을까? 그런 독서가들이 많아지면 그야말로 독립 서점이 기다리던 백인백색의 독서 시대가 오지 않을까? 그 남에 눈치 보지 않는 고독한 독서의 즐거움을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사실 독서란 아마도 격리된 공간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파트너와 함께 추는 춤, 묘석과 함께 추는 즐겁고 열광적인 춤이다." 이 춤은, 그건 멀리서 보면 광기이고 가까이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몸짓이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내면에서 벌어지는 퍼포먼스다. 그 고독한 행위를 지하철에서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 열광의 시간을 매일 출퇴근 때마다 갖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만으로도 고독한 독서가의 하루는 즐겁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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