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불씨

[최영훈 칼럼@이코노미톡뉴스] 11월, 독도의용수비대 아카이빙 사업을 위해 대구, 포항 등지로 인터뷰 촬영을 다녔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생존 대원, 배우자, 그 후손들과의 인터뷰였다. 구순이 넘은 생존 대원들은 아주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질문마다 오랜 시간 기억을 되돌려 천천히 말씀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 기억할 것도 많고, 나이 들수록 그 기억력도 떨어지겠지만 잔불처럼 남은 기억력을 합하여 기억해야 할 것은 꼭 기억해서, 그 기억의 불씨를 어딘가에 저장하여 대대손손 물려줘야 하지 않을까? 이 생각이 불러낸 영화가 <더 기버 : 기억전달자>다.

1996년 4월 4일, 김영삼 대통령이 6·25전쟁 직후 스스로 독도 지키기에 나섰던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에게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사진=국가기록원)
1996년 4월 4일, 김영삼 대통령이 6·25전쟁 직후 스스로 독도 지키기에 나섰던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에게 보국훈장을 수여했다. (사진=국가기록원)

<더 기버 : 기억전달자>는 SF 영화다. SF 영화는 세계관의 설정이 중요한데,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 )>과 같은,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나라와 공동체를 만들게 된 배경엔 공통적으로 과거에 발생했던 갈등과 전쟁이 있었다는 설정이 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커뮤니티” 역시 과거에 벌어졌던 전쟁과 기아, 기근 등 모든 재앙들을 예방하고 완벽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늘 같음 상태(Sameness)”라는 개념을 만든다. 그리고 이 개념을 “커뮤니티”와 그 안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 “커뮤니티” 곳곳과 구성원의 삶 전체를 통제한다. 탄생, 성장, 교육, 가족 형성, 직업 선택, 거주지, 관계의 깊이와 표현까지.

모든 구성원은 열두 살이 되면 직위와 직업이 배정 되는데, 그 행사 맨 마지막에 남은 소년 조나스는 “기억을 이어 받는 자(Receiver of Memory)”로 선택 된다. “기억을 이어 받는 자”가 된 조나스는 기억 전달자(Giver)에게 기억을 전달 받는다. 그 전달의 의식이 반복 될수록 조나스는 “커뮤니티”가 밀봉해뒀던 감정을 알게 되고 그 이전 시대의 기억들을 얻게 된다. 그 기억의 누적은 행복하고 좋은 기억에서 점차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나아간다.

이 평온한 커뮤니티에 왜 기억 전달자가 필요할까? 전 시대의 모든 기억을 간직한 이가 왜 필요할까? “기억 보유자”이자 “전달자”는 과거의 기억을 이용해 현재를 조언하는 역할을 한다. 이 평형 상태의 공동체 원로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일을 겪을 때 적절한 조언을 하는 역할이 기억전달자의 역할인 것이다. 그래서 차기 “기억 전달자”는 지능과 정직과 용기뿐만 아니라 사물 저 너머를 보는 능력을 가진 자가 선택 된다.

"더 기버: 기억전달자(The Giver, 2014)" 스틸컷.

기억이음과 기억 이어 받음


지난 11월의 인터뷰는 독도의용수비대 대원들의 업적을 기록하고 그것을 영구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아카이빙 사업을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한지는 제법 됐다. 동료 감독도 지난 몇 년 간 여러 도시의 박물관 학예사들과 경남과 경북, 부산 등지의 민속과 생활사를 기록하는 작업에 참여했었다. 이런 사업을 우리말로는 기억이음 사업이라 부른다. 사소한 민속학, 생활사적 기록에서 굵직한 역사의 증언까지, 그 분야와 대상은 다양하다. 행정구역으로 나눠지기 전 마을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분들을 찾아 공동체와 공간의 역사를 기록하기도 하고, 사라져버리는 직업과 그 직업이 가진 고유의 기술을 기록하기도 한다.

그 기록은 때론 난관에 부딪힌다. 생존 대원이 다섯 명 밖에 남지 않은 독도의용수비대 아카이빙 작업처럼 기억을 간직한 이의 숫자가 줄어들고, 그 기억도 흐려지기 때문이다. 또 이야기를 전해들은 후손들은 간접 체험이기에 그 기억이 옅거나 파편적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기억이 흐려져 가는 아흔을 넘긴 생존 대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난관을 겪고 나니 제대로 된 기억이음을 위해선 후손 중 누군가 그 기억을 이어받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기억이음의 성공은 후손들의 기억 이어받음의 자세가 전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떤 기억을 선택하는지가 중요하다


기억해야 될 사건과 사람들은 선택 된다. 역사의 사건과 사람들 중에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지는 그 사회와 시대의 선택이기에, 그 선택을 통해 그 시대와 사회의 가치관과 역사의식이 판가름 된다. 우리는 이미 정권의 성향에 따라 기억되어져야 할 것들이 왜곡되어 기억되거나 외면되는 것을 봤다. 때론 기억 될 가치 없는 사건과 인물을 부각시켜 기억시키기 위해 애쓰는 행태도 봤다.

이제 모든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됐다. 그들을 검증한답시고 언론과 상대 정당들은 그와 그 가족의 과거를 파헤치는데 열중하고 있다. 한 사람의 쓸모가 미래에 있다면 개인의 사사로운 개인사로 그들을 판단하기보다, 그들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가려 기억하고 있고 무엇을 가려 기억해야만 한다고 말하는가를 기준으로 그 인물의 미래 가치를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수많은 사건과 인물 중 무엇을, 누구를 도드라지게 하여 이 시대의 기억의 제단에 올리는지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역사 선택의 기준으로 정치인의 역사의식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정치인의 역사의식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개개인과 집단의 의식을 개인과 공동체의 역사철학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억, 가정과 국가의 조건


이런 맥락에서 우린 영화 속에서 집(Home)과 거주지(Dwell)가 다른 의미를 띄고 있음에 주목해 봐야 한다. 온라인 웹스터 사전을 보니 Dwell은 “to live in a particular place”로 설명 된다. 말 그대로 살 수 있는, 살기 위한 공간이 곧 거주지다. 반면 Home에는 여러 뜻이 있는데, 첫 번째 뜻이 “the place (such as a house or apartment) where a person lives.”, 즉 사람이 사는 장소다. 두 번째 뜻은 “a family living together in one building, house, etc.”다. 말 그대로 가족이 사는 곳이다. 거주지엔 사는 이의 역사가 부재하고, 집에는 사람의 역사가 깃든다. 그래서 주거지엔 역사가 없지만 집에선 가족의 역사 만들어진다. 더 나아가 그 집에서 만들어진 역사는 가족의 철학이 되어 미래 세대의 비전을 잉태시킨다. 대통령이 가족의 가장과 같은 위치라면 그 가장이 우리에게 어떤 기억을 강조하는지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영화 속, 노년의 선배 기억 전달자는 “신념만이 사물 너머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그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결정하고, 그래서 그 기억을 간직한 이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도 했다. 이 말을 새겨들어 실천한, 어린 기억 전달자의 이름 조나스는 구약의 예언자 요나의 영어식 표현이다. 또 조나스가 다음 “Receiver of Memory”가 되리라 예감되어 품에 안고 함께 탈출한 아기의 이름은 “가브리엘”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예수가 잉태됐다고 말했다. 때론 어떤 기억은 고통스럽기에 외면하고 싶고, 어떤 신의 계시는 바라던 바가 아니어서, 성경의 요나처럼 그 계시를 피해 도망가고 싶다. 그러나 요나가 신의 전령 역할을 충실히 하고, 마리아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기에 구원의 역사가 시작됐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이 땅에 태어난 이에게 역사는 운명처럼 주어진다. 그 주어진 역사의 이음은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도래시킬 수 있다. 때문에 역사의 특정 사건과 인물을 외면하거나 선별적으로 부각시키는 “커뮤니티”는, 다가올 미래가 잉태할 무한한 가능성과 만나지 못할 수 있다. 기억을 이어받을 이의 이름이 요나와 가브리엘인 것은 우리에게 이 점을 다시금 깨우치기 위함일 것이다. 이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맡길 사람이다. 그들이 선택하는 기억을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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