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동생 만나 엉엉 울며

설움 절반 풀었다로“

부일철강 정대식 사장의 혈육 상봉

어머니 보고파 악착같이 벌어

연변서 늙은이 된 동생 만나

<정대식 사장>

11살 철부지의 단신 월남

돈은 벌어야 한다. 많이 벌수록 좋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력은 그 사람의 지위를 확인시켜주고 명예를 안겨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에 위치한 부일철강의 정대식(鄭大植) 대표(62)가 지난 수십년간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려 온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그에겐 50년전 헤어진 어머니와 형제들을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11살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평균적인 아이라면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 던져놓고 놀이터로 향하는 철부지의 모습이 일반적일게다. 그러나 50년전 11살의 소년 정대식은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수많은 총구를 뒤로한채 어떻게든 살아나 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뛰고 또 뛰어야 했다.

1939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정대식 사장. 경찰관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던 그가 다섯 형제들과 헤어져 혈혈단신 사선을 넘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경찰관으로 재직했던 아버지는 해방 이후 이북 땅에 공산주의체제가 들어서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됐고 급기야 1946년 월남을 결심했다. 아버지가 월남한지 3년이 지난 어느날 어머니는 3남 3녀 중 차남이었던 정사장을 불러 옷을 갈아입히고 시집간 큰 누님댁이 있는 평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린 정대식은 어머니가 건네주신 5백원의 여비를 손에 쥔채 열차 승무원이었던 매형의 손에 이끌려 사리원을 거쳐 해주까지 이르는 긴 여정에 올랐다.

38선 넘어 아버지와 눈물의 해후

1주일이 지나 해주땅에 도착했을 때까지 무작정 안내원을 따라왔던 정대식은 거기서 실낱같은 희망 한가지를 얻는다. “이제부터 저 안내원을 따라가라. 그렇게 30분만 가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라는 안내원의 말 한마디를 신앙처럼 가슴에 새긴채 안내원을 놓칠새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전전긍긍하던 11살의 아이. 하지만 남한땅에 외롭게 혼자 지내고 계신 아버지를 위해 남한으로 향해야 했던 11살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 버거운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주 갯벌가 보리밭에서 썰물이 될 때까지 숨죽이고 기다리던 어린 정대식은 마침내 누군가 외치는 “뛰어!”라는 한마디에 어머니가 새로 사주신 고무신을 놓칠새라 허리춤에 움켜쥐고 뛰고 또 뛰었다.

헤어져선 안된다며 손에 손을 잡고 뛰던 일가족이 총탄에 맞아 꽃잎처럼 스러져가는 모습을 목격했고, 정대식은 발 끝에 채이는 서늘한 주검을 느끼며 치를 떨었다. 어린 정대식은 그렇게 38선을 넘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소년 정대식은 3년전 헤어진 아버지를 어렵잖게 찾았다. 월남 이후 처음 만난 순경으로부터 경찰관 생활을 시작한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마침내 아버지와 눈물의 해후를 하게 됐다.

그때 어린 정대식은 쉴새 없이 울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서러워서가 아니었고 아버지와 만난 기쁨에 흘린 눈물도 아니었다. 이제 다시는 북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들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예감이 너무도 강하게 그를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부둥켜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어린 나이에도 직감적으로 느껴지더군요. 다신 어머니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그런 불길한 예감은 왜 그리도 꼭 들어맞는지…”

<부일철강 정대식 사장의 모친(사진 가운데) 칠순잔치떄의 정경>

흥분 못 감추게한 연변 소식

그로부터 어언 50년이 지난 1998년 10월 30일. 그에게 중국 연변으로부터 믿기지 않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중국 연변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친지를 통해 정대식 사장이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남동생을 찾았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유난히 소리가 맑았던 괘종시계와 어머님이 쓰시던 독수리 그림이 그려진 재봉틀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었어요. 동생이 그러더군요. 그 두가지만 기억한다면 친형이 틀림없다고…”

남동생을 찾았단 소식에 아들의 결혼식 다음날 중국으로 날아간 정대식 사장. 언제부턴가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려 무진 애를 써야 했던 그가 한달음에 중국으로 달려가 만난 어머니.

그것은 소년 정대식의 어머니, 옥같이 고왔던 젊은시절의 어머니가 아닌 칠순을 맞은 백발 노모의 모습, 반명함판 크기의 초라한 흑백사진 속의 어머니였다.

과연 친동생, 친어머니일까? 하는 의혹을 안고 있었지만 사진을 대하는 순간 정사장은 ‘어머니’를 목놓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좀처럼 떠올릴 수 없었던 어머니의 얼굴이 그 속에 있었다. 정대식 사장이 어머니를 찾아 헤맨지 꼭 20년만의 일이었다.

지난 1979년 정사장의 사업이 궤도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미국으로의 이민 수속을 밟는 일이었다.

미국 시민권이라도 얻으면 북한 방문의 기회가 생기거나 적어도 소식을 전해들을 수는 있을 것이란 기대감에서였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미국행을 포기했고 그대신 중국 등 제3국이나 조선족에게 가족명단을 건네 가족의 생사를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소요되는 경비에 대한 부담감도 컸지만 번번히 실망하게 되는 현실이 정사장에겐 더 견디기 힘들었다.

“제가 남동생에게 그랬습니다. 먹고 살기 힘들었다고 해도 너희가 나보다 훨씬 행복한거 아니냐구요. 어머니와 다섯형제들이 어찌됐건 서로 기대가며 살았을 테니까요. 아무리 제가 경제적으로 풍족하다고 해도 뼛속까지 사무치는 외로움은 어디에 견줄 수가 없을 겁니다”.

어머니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정 사장의 어머니는 지난 83년 78세의 연세로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평생 남쪽으로 내려보낸 둘째 아들 대식이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어머니의 고통도 죽음으로 끝이 났다. 어머니의 사진을 품에 넣고 달려온 남동생은 정대식 사장보다 네 살 연하. 하지만 처음 본 남동생은 70이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다름 없었다.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넘어 중국 연변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열차를 갈아탄 끝에 꼬박 8일이 걸려 남과북의 두 형제가 만난 것이다. 그 남동생으로부터 전해들은 가족들의 소식에 정사장은 또 여러번 눈물을 삼켜야 했다.

장남이었던 큰 형님은 31세때 장마에 휩쓸려 죽음을 당했고, 둘째 누님 역시 지난해 작고하셨다. 막내 여동생은 폐결핵으로 건강히 쇠약해진지 오래고 정사장을 찾아온 남동생과 73세의 큰누님만이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정 사장은 남동생과 호텔방에서 일주일을 함께 묵으며 50년의 세월을 이야기했다. 정대식 사장은 나이 28세때 일찍 타계하신 아버지의 죽음을 전했고 동생은 남쪽으로 내려보낸 둘째 아들을 생각하며 “제일 쓸 만한 놈을 남쪽으로 내려 보냈으니…”하는 말을 되뇌이다 화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를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직전 속바지 주머니를 뒤져 통장 하나를 유품으로 남기셨다고 해요. 통일이 되면 둘째 형을 꼭 찾아서 통장을 건네주라구요. 끼니 잇기도 힘든 형편에서 2천원돈을 모으셔서 간직하고 계셨더군요.”

남동생의 한달 봉급이 80원인 것을 생각하면 어머니는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으로 둘째 아들을 위한 ‘통장’을 목숨처럼 사수해 왔다. 은행이 부도나 이제는 돈을 찾을 수 조차 없는 통장. 하지만 어머니는 통일의 그 날 아들손에 쥐어 줄 통장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혈육의 정보다 물질에만…

정 사장은 동생과 헤어지면서 미리 준비해간 옷가지들과 생필품, 여러종류의 약품들은 물론 현지에서 자전거, 설탕, 콩기름, 이불, 그리고 형제들과 사촌, 조카들의 모습을 담을 수 있도록 카메라 한 대까지 총 2.5톤 분량의 물품을 구입해 동생편에 보냈다.

그리고 북한땅에선 상상조차 할 없는 3천6백달러의 거금을 전해주며 형제들과 나눠쓰고 폐결핵에 걸린 여동생에게 약을 꼭 전해줄 것을 당부했다.

남동생과의 만남 이후 약 4개월 후 중국으로부터 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헤어질 당시 4살이었던 여동생이 오빠를 만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나온 것이다. 여동생이 확실하다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정사장은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날아갔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했던가? 여동생을 보는 순간 아내는 “당신 여동생이 틀림없네요”라고 외쳤고 땀과 먼지, 그리고 형편없이 깡마른 모습 속에서도 혈육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나 만남의 기쁨도 잠시, 정사장은 커다란 배신감을 느껴야 했다. 형제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라고 남동생에게 전해준 물품과 달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은 물론, 폐결핵을 앓고 있었던 여동생에게 약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형제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에 정사장은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이내 남동생을 그렇게 만든 ‘가난’을 탓하기로 했다.

이후 남동생과의 두번째 만남에서 정사장은 형제애보다 ‘물질’에 눈이 어두웠던 동생을 두고두고 원망했다. 그러면서도 헤어지는 날 정사장은 또 그에게 필요한 물품과 돈을 챙겨 주었다. 50년을 혈육의 정에 굶주린 정사장에겐 미움보다 끓어오르는 혈육애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형제들이 가난과 굶주림과 평생을 싸워왔다면 정사장은 지독한 외로움과 싸워야 했다. 경찰관으로 전국을 전전하던 아버지와 떨어져 정사장은 중·고등학교시절부터 이웃, 친구들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쳤다.

도저히 대학갈 형편이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대학을 가야겠다는 일념하에 중고등학교 시절 유도선수로 활약했다. 경기에만 이기면 입혀주고 재워주고 대학까지 보장될 수 있다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운동에 매달렸고 그의 한가지 목표는 오로지 1등, 우승이었다.

“체육 특기생으로 경희대학교에 진학하게 됐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때까지 늘 전 이웃, 친구의 도움을 받기만 했습니다. 단 한번도 친구들에게 밥한끼 사준 적이 없었어요. 그게 지금까지도 가슴에 커다란 빚으로 남아있습니다.”

정 사장은 신세진 많은 분들을 일일이 찾아 빚을 갚는 것보다는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직원들의 복지향상에 더 힘쓰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고 전한다. 그리고 정 사장은 그가 세워놓은 목표에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다.

죽음 문턱에서 기적처럼 생환

경희대학교 체육과 졸업 후 한때 교편을 잡기도 했던 정사장에겐 어쩜 철강회사 대표보다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직이 천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머니와 형제를 찾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기에 정 사장은 교직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결혼 후 큰 처남이 소개한 가스제조업체에서 봉급 9천원을 받으며 기술을 익힌 정 사장은 그 박봉에서 4천원을 떼어내 적금을 부었다. 4년동안 점심식사는 늘 라면이었고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린 덕택에 4년만에 50만원을 만들어 그 돈을 기반으로 사업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다행히 그렇게 시작한 사업은 날로 번창해 3년만에 커다란 돈을 손에 넣게 되었고 집도 한채 장만했다. 그렇지만 정 사장의 불행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일까?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진 정 사장은 장티푸스 판정을 받아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꼬박 2년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모아두었던 돈이며 겨우 장만한 집도 병원비로 다 날아가 버렸다. 그때 수없이 되뇌인 것은 ‘제발 아이들이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만 살게 해 주십시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다시 정사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기적이다’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까지 다가갔던 정사장은 기적적으로 병이 나았고 38선을 넘은 이후 두 번째 사선을 넘은 셈이었다.

억척으로 이룬 철강회사

이런 질곡의 인생사를 걸어온 정대식 사장이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아들 규철(34)씨다. 정 사장은 자신이 평생 이루어놓은 과업을 잇게 할까 하는 욕심에서 아들을 설득해 연세대학교 금속공학에 입학시켰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규철씨는 결국 휴학계를 내고 미국 버클리 뮤직 컬리지에 입학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규철씨는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다음 커뮤니케이션’의 음악 프로듀서로 활동을 하고 있다.

정사장에게 있어서 삶은 즐길만한, 되돌아볼만한 여유있는 것이 아니였다. 이게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인가에 대한 회의조차 없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찾아야 한다는 지상 목표가 있었기에 자신의 삶은 늘 뒷전이었다. 그러니 당당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규철씨가 가장 부러울 수밖에 없다.

매출액 5백50억을 바라보는 건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한 부일철강주식회사. 부일철강주식회사는 포항제철과 소비자를 이어주는 서비스업을 담당하고 있다. 포항제철로부터 코일상태로 들여온 강철을 자동차, 가전 등에 쓰이는 제품으로 정밀하게 가공하는 것이 부일철강이 하는 일이다.

매출액 5백50억에 이르는 부일철강주식회사. 그렇지만 지금도 부일철강주식회사의 사장실은 검소하기 짝이 없다.

포항제철의 모 상무가 방을 옮기며 버린 책상을 얻어다 수년째 쓰고 있고 벽에는 경영목표를 써넣은 액자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말보다, 구호보다 행동으로 옮기라는 것이 정사장의 철학이다.

포항제철 판매점 중에서 가장 막내로 출발한 부일철강주식회사지만 철저한 관리와 운영으로 이미 타 판매점과 어깨를 견줄만큼 정상궤도에 올라섰고 이제 정사장의 목표는 50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부일철강을 평생직장으로 여길 수 있는 믿음직한 회사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또 한가지, 경영인으로서의 정대식 사장은 가마솥같은 사람이다. 금새 팔팔 끓는 냄비와 달리 서서히 끓고 오랜동안 식지않는 넉넉함을 지닌 가마솥같은 경영자다.

“20여년간 포항제철의 대리점으로 일해오는 동안 단 한번도 납품기일을 넘긴적도 없고 결제일을 어겨본 적도 없습니다. 말솜씨도 없고 영업력이 뛰어난 편도 아닌 제게 있어서 한 20여년간 쌓아온 신뢰가 유일한 영업수단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철두철미한 회사운영자세는 철저한 자기관리에서 비롯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눈이오나 비가 오나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집앞의 수영장으로 향하고 2Km 수영을 마치고 새벽 6시 30분이면 회사로 향하는 일을 벌써 20년째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무조건 도와야 할 곳

“제게 있어서 지금이 가장 행복한 순간입니다. 50년만에 형제를 찾았고 어려운 순간마다 든든한 동반자로 용기를 준 아내와 1남 1녀의 자녀가 건강하고, 며느리와 손녀까지 얻었으니까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정 사장은 직원들이 휴가를 다 마치고 돌아온 8월 25일께 뒤늦은 휴가를 준비하고 있다. 남동생과의 세 번째 만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형님을 만나려는 목적이 설사 ‘돈’ 때문이라고 해도 그는 중국행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니 어떤 이유로든 자신을 찾아주는 형제가 있어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사람이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일각에서는 왜 이리 저자세냐? 언제까지 주기만 할꺼냐? 하는 의견도 있지요. 하지만 형제관계에서 네것 내것을 따지지 않듯이 우리는 한 동포 아닙니까? 남북관계는 무조건 도와야 하는 관계입니다. 만약 통일이 됐을 때 우리가 이렇게 잘먹고 편안히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면 같은 한동포로써 느끼게 될 배신감, 괴리감은 어떻게 치유할 것입니까?”

남북한간에 철도만 놓이게 되면 북한 남포공업단지에 ‘부일철강주식회사’를 세우는게 꿈이라는 정대식 사장.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신념을 지닌 정사장은 북한 땅에 부일철강주식회사를 세우고 그곳에 형제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함께 여생을 보낼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글/朴信姸(박신연 방송작가,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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