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호]

[미국, 중국의 충돌코스]

미국이 키운 호랑이

모택동과 그 후손들의 나라가


글 / 趙泓來 편집위원(조홍래 언론인)

미국과 중국을 상징하는 G2가 세계경제를 살리고 평화도 구현할 것이라는 게 2009년의 희망이었다. 이 꿈은 허망하게 깨어졌다. 2010년에 접어들면서 두 강대국은 충돌 코스로 가고 있다. 미국의 포브스(Forbes) 잡지는 작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두 사람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꼽았다. 지금 두 사람은 세계평화는 고사하고 양국관계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할 처지에 놓였다. 참으로 슬픈 뉴스이다. 양국에만 나쁜 뉴스가 아니다. 글로벌 경기회복, 기후변화 대책, 핵무기 확산 방지, 세계의 분쟁 조정 등 주요 이슈에서 양국의 협력을 필수조건으로 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허탈해졌다.

미국발 경제위기 중국이 흡수

미국과 중국에 관한 한 열(10) 이란 수자는 의미심장하다. 실업률 10%의 미국과 GDP 성장률 10%의 양국이 충돌하면 가공할 사태가 온다. 먹구름이 부딪쳐 폭풍우를 만드는 꼴이다. 미국의 시장주의 경제가 일당독재의 중국 경제와 충돌하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을 낸다. 올 11월의 미 중간선거까지 양국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전략가들은 핵전쟁을 하면 같이 망한다는 이른바 상호확증파괴(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이론을 중시한다. 미국과 중국은 지금 상호확증경제파괴(mutually assured economic destruction) 방향으로 간다. 두 지도자는 이를 잘 알고 있다. 미국은 빚을 갚기 위해 중국의 돈이 필요하고 중국은 상품을 팔기 위해 미국 소비자들을 필요로 한다.

미국발 경제위기의 충격을 중국이 흡수한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미국, 유럽, 일본 등의 소비자들이 중국상품을 팔아주지 않았다면 충격흡수도 중국의 GDP 성장도 불가능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그만큼 상호의존적이란 얘기다. 이 관계는 앞으로 상당기간 계속될 것이다. 중국은 성장의 의존 축을 국내소비로 전환하려 하지만 단기간에 성공하기는 어렵다. G2로 급부상한 위상은 공산당 체제와 갈등을 빚는다. 이것도 중국에는 부담이다.

중국은 작년 제조업과 일자리 보호를 위해 천문학적 돈을 투입했다.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작년 같은 어려운 해에 10%의 성장을 달성했다. 이것이 중국 혼자만의 능력으로 된 건 아니다. 서방에 비해 탐욕적 금융에 덜 노출된 점도 일조를 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가 차츰 회복되자 중국의 독주시대는 갔다.

미국인 44%, 중국을 경제대국

최근의 퓨(Pew)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44%는 중국을 세계의 주도적 경제대국으로 인정했다. 미국을 경제대국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27%에 불과했다. 미국경제는 언젠가는 회복된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에는 시간이 걸린다. 유권자들이 지갑 걱정을 하는 한 민주당과 공화당 정치인들은 근로자 보호에 열을 올린다. 미 의원들은 중국의 무역 불균형 시정과 통화 절상을 요구한다. 하지만 10%의 실업률을 가진 나라가 10%의 성장을 구가하는 나라에 하는 설득이 먹힐 가능성은 없다.

중국은 중국대로 불만이 많다. 자유무역을 주창하는 미국이 왜 보호주의로 회귀하느냐고 따진다. 양국 무역 균형 파괴가 중국의 성장 때문임을 잘 아는 미 의원들은 중국에 대한 단호한 제재를 주문한다. 이 외에도 양국 충돌 요인은 허다하다. 이란과 북한 핵무기, 티베트 문제, 인권, 대만에 대한 미국무기 판매 등이 모두 걸림돌이다.

양국이 전면적 무역 전쟁으로 가지는 않을 듯하다. 그런 충돌이 가져올 피해를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의 상황은 오바마와 후진타오의 명운을 좌우할 게 확실하다. 이 싸움의 전략은 다르지만 두 사람이 직면한 최악의 도전이란 점에서는 같은 배를 탄 형국이다.

모택동이 무서운 호랑이로

무서운 호랑이로 변한 중국을 보면 마오쩌뚱(毛澤東)이 떠오른다. 헤리티지 재단의 선임연구원 리 에드워즈(Lee Edwards)는 최근 칼럼에서 중국의 정체에 의문을 던졌다. 그의 칼럼에 의하면 20 세기 최악의 학살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히틀러와 스탈린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대분일 것이나 이는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택동이다. 모택동은 새로운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6천 5백만 명을 죽였다. 잔혹한 살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거듭되었다. 누구든 그의 일을 방해하는 인간은 가차 없이 제거되었다. 처형, 투옥, 강제 아사 등 모든 반인륜적 방법이 동원되었다.

모택동의 최대 적은 지식인이었다. 인민을 학살한 점에서 그는 진시황(秦始皇)을 능가했다. 진시황은 460명의 학자를 생매장했지만 모택동은 4만 6천 명의 지식인들을 생매장했다. 모택동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계속된 문화혁명을 통해 중국을 거대한 “공포의 집”으로 바꿔 놓았다. 그는 이것을 “위대한 업적”이라고 자랑했다.

가장 반인륜적 만행은 집단농장을 건설을 위해 시작된 “대약진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수많은 거짓말로 포장되었다. 식량증산을 한다며 모든 차 밭을 논으로 변경했으나 결과는 인류사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량 기근이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50% 이상의 농민들이 굶어죽었다.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아사한 사람만도 3천만 내지 4천만 명이다. 캘리포니아 주 인구와 같은 수자이다. 혁명의 열기가 식었다고 판단한 그는 대약진운동 개시 5년 후에 문화혁명을 선포했다. 14세에서 21세 사이의 젊은 남녀로 조직된 홍위병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이른바 수정주의자들과 국가의 적을 소탕했다. 교사들이 주된 타깃이었다.

천안문 광장엔 아직도 모택동

괴기스러운 복장에 모택동 모자를 쓴 선생님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개처럼 짖는 시늉도 했다. 일부는 맞아 죽고 인육으로 먹히기도 했다. 모든 난동은 모택동주의를 선양한다는 명분으로 진행되었다. 견디다 못한 반모주의자들이 봉기해 공산당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나 1백만 명 사망이라는 대가를 치러야했다. 모택동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1천 명 단위로 구성된 강제노동수용소를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수용소에서 19년을 복역한 해리 우(吳弘達)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5천만 명의 중국인들이 수용소에 감금된 것으로 추산했다. 2천만 명이 열악한 수용조건과 하루 14 시간의 중노동으로 죽었다. 알 카포네를 무색케하는 잔혹성은 “권력은 총열에서 나온다”(Political power grows out of the barrel of a gun)는 철학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의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다. 톈안먼(天安門) 광장의 모택동 영묘에는 매일 수많은 모택동 숭배자들이 찾아온다. 광장에서 자금성(紫禁城)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에는 거대한 모택동 초상화가 걸려 있다.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지금도 모택동 정신에 따라 지식인과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한다. 대표적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는 지난 달 반국가 선동을 했다는 혐의로 11년 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의 죄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기본적 인권을 요구한 “08 헌장”에 서명한 게 전부다.

중국은 미국 기업과 투자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거대한 시장이다. 그러나 일부 미국 기업들은 모택동 같은 살인자를 성인으로 숭배하는 나라에서 계속 사업을 해도 되는지 자문하기 시작했다. 구글(Google)도 집요한 사이버 테러에 견디다 못해 중국 철수를 고민중이다. 중국정부는 보안을 이유로 수많은 서방 인터넷 사이트들을 해킹하고 차단한다. 모택동은 아마 지하에서 이 광경을 보고 박수를 치고 있을지 모른다. 모택동과 그 후손들이 하는 짓거리는 한 마디로 “지식인 강간”이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