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李明博의 제2 성공도전]

벤처와 NGO로 재가동

복권 이후 성공요소 풀가동

“정치는 곧 경영” 전문가 시대 예고


<재계와 정계를 떠난 요즘 독서에 빠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이명박(李明博)>

李明博이 다시 뛰고 있다

70년대 성공의 지표이자 직장인들의 우상이던 이명박(李明博) 전 의원이 뛰고 있다.

각종 모임에도 열심히 얼굴을 내밀고 자신이 이사장으로 있는 서초동 동아시아연구원에 상근하며 아태환경 NGO 한국본부 총재로도 폭넓은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14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투신했던 이전의원의 정치적 야망은 시중의 화제였다. 30대 샐러리맨으로 한국 최고의 건설회사 사장으로 고속출세했던 그가 정계에서도 큰일을 도모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했었다.

그러나 15대 국회때 선거법 위반으로 낙마하여 해외로 나가 공부나 하겠다던 그의 본의 아닌 정계은퇴로 잠시 시중의 관심권을 벗어나고 말았다.

이명박의 야망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천성으로 부지런하고 집중력 뛰어난 그도 정치권 내부에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패권싸움의 와중에서 선거법위반이란 올가미를 벗어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명박은 무더기 복권 은전(?)으로 풀려나 새로운 기회를 스스로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뜻밖에도 그는 환경NGO 총재로 변신하여 특유의 추진력을 과시하고 있다. 이명박이 21세기 지구촌 사업에 뛰어들어 또다른 야망을 불태우고 있다는 소문이 그래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結者解之(결자해지)의 NGO 활동

아태환경 NGO 한국본부는 지난 94년에 설립되었다. 유엔환경기구에 등록된 단체로 광역적인 지구환경 보전과 생태계 보존을 위한 정책연구를 비롯하여 기술개발 환경교육 등을 추진하는 지구촌 환경운동의 일환이라 한다.

이명박 전 의원은 올 2월 2대 총재에 취임했다. 정치권에서 벗어난 그를 NGO측이 영입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총재는 취임 후 첫 활동으로 중국에서 열린 동북아 환경심포지엄에 참가, 두만강 오염문제와 한반도를 위협하는 중국의 황사문제에 관한 동북아의 공동노력을 역설하였노라고 소개한다.

“두만강 수질오염은 동해와 한반도 생태계 파괴로 이어집니다. 이를 중국과 북한에 맡겨두고 지켜볼 수만 있는 일입니까. 황사문제도 중국이 혼자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까.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 등 동북아가 함께 나서지 않고는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총재는 이같은 한반도 주변 환경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는 각국의 협조와 내부의 노력을 결집시키는 것이 아태환경 NGO의 역할이라고 설명한다.

이 총재는 출세한 직업인으로 세간의 높은 평판을 받기까지 도로를 뚫고 댐을 건설하는 산업화의 주역이었다. 반면에 환경문제는 산업화에 의한 번영의 부산물이자 그림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인지 그는 “산업발전에 참가하고 산업화의 그림자를 만든 이들이 이를 걷어내는 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변호한다.

아태환경 NGO 한국본부는 관계 전문가 2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제협력분야에서부터 수질공학, 의생물학, 해양환경, 환경교육, 토양학, 환경평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환경과학, 환경공학, 환경사회과학 등 환경관련 전방위 전문가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이 총재는 이들 전문위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현안문제들을 발굴하고 해결책을 연구하여 이를 바탕으로 실천적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밝혔다.

NGO 활동에도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것은 물론이다. 아태환경 NGO 한국본부도 순수 민간단체이지만 회원들의 회비와 민간기업의 출연금외에 약간의 정부보조금을 지원 받노라고 한다.

<美 상원의원 제시 헬름스(Jesse Helms)와 함께 (1999년)>

21C 동북아의 세계역할 준비

이명박 전 의원이 설립한 동아시아연구원은 한때 그의 정치야망의 무대로 인식되었었다.

이명박은 현대건설 최고경영자로 활약할 때부터 동북아의 국제정치, 경제 현안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래서 80년께부터 서초동 모임을 주선했었다고 한다.

그뒤 국회로 진출하여 당시 초선의원들의 구심점 역할을 자임하면서 94년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발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임원 12명, 이사 10명 도합 27명의 리더그룹이 연구원의 성격과 진로를 잘 설명해 준다.

임원진 구성의 면면을 보면 유태영 연변 과기대 겸직교수를 비롯하여 어윤대 고대 교수, 김신일 서울대 교육행정연수원장, 정해구 단국대 경상대학장, 이준일 중앙대 정경대 교수, 홍연숙 평통 상임위원, 이재후 변호사, 박범신 소설가, 천신일 주식회사 세중 회장, 임종일 주식회사 건영 대표, 도영희 주식회사 우방 사장 등 저명인사들이다.

이 연구원이 한창 잘 나가던 이명박 이사장의 정치적 배경으로 인식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명박이 불운으로 98년 미국으로 떠난 후 겨우 명맥만 유지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이명박이 개척하고 있는 새로운 기회도래와 함께 연구원의 활동이 기대된다.

이 이사장은 “21세기 동북아의 세계적 역할을 준비하고 한국의 위상을 높여가야 할 때”라는 말로 연구원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분단 한국과 통일 한국의 두 경우를 검토하며 급변하는 남북상황에 따라 통일의 촉진과 견제, 그리고 주변 4강의 역할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한 결과를 경제와 사회현실에 적응시켜 나가는 것이 주요 사업”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벤처로 제2의 성공시대 도전

이명박은 조용히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경제기자들은 정주영(鄭周永)식 풀가동 엔진이라고들 논평한다.

그 스스로 이 말에 대한 긍정이나 반론은 없지만 아무것이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거의 정주영 스타일이다.

최근 대외활동으로 분주하면서도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인터넷 금융회사를 경영하는 벤처기업가이다.

“금융산업이 낙후하면 세계화도 지식기반경제도 가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산업화과정에서 열심히 일하며 많은 경험을 쌓았지요. 그러나 정보산업에 경험이 없이 정보화시대에 접어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미국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껏 전혀 해보지 않은 새로운 기업을 구상했던 것입니다.”

그는 정치무대에서 사라져 있는 시각에도 그냥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이다. 기성세대가 정보화에 뒤떨어져 벤처세대에게 밀려나는 것을 보고 문제의식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창업한 인터넷 금융은 사이버증권이다.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던 미국적 한국인을 파트너로 20여명의 정예요원들과 사업에 착수했노라고 한다.

이명박은 사이버금융을 통해 21세기 IT산업에서도 성공신화를 창조하겠다는 의욕이다.

“IT산업이 젊은 세대들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습니다. IT산업도 기존산업사회와 연계돼야 발전할 수 있습니다. 산업화 주역세대들이 너무 빨리 물러나는 것은 IT산업을 위해서도 불행하다고 봅니다. 벤처열풍이 식고 벤처투자자들이 실망하고 있는 것도 젊은 벤처가가 신기술 한가지만 믿고 산업화세대들의 경영마인드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장의 벤처 진단은 상식적으로 수긍이 간다. 당장 산업화의 경영마인드를 외면하고 아직 시장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신기술이 독자번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사장은 “벤처산업의 침체조짐은 정보산업의 위기신호를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정보산업이 충분한 준비없이 서둘러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같은 인식하에 그는 벤처로 제2의 이명박의 성공시대를 꿈꾸고 있다는 느낌이다.

<벤처 금융을 시작하여 사이버 산업에서도 기수가 되
겠다고 말하는 이명박(李明博) 전의원>

“정치는 곧 경영이다”

이명박의 대외직함은 다양하지만 주위에선 자연스럽게 의원님으로 호칭된다. 그 자신도 의원님을 마다하지 않는 눈치다.

과연 이명박이 정치적 야망을 던져버렸으까. 대답은 하지 않지만 그럴 수 없고 그럴 것 같지 않다는 관측이다.

지난 5월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가 김대중 대통령과 영수회담때 이명박 전 의원에 대한 사면복권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사면복권이되어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몸이다.

당시 언론에서 “복권이 되면 정치를 재개할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복권된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고 답변했다.

이제 이명박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지 않느냐고 볼 수 있다. 일단 정계에 뛰어든 사람이 순수 자발적으로 정계를 은퇴하는 경우는 볼 수 없었다.

이명박도 이점에서 예외일 만한 특별한 증빙자료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는 한국정치에 대한 집념과 소신이 뚜렷하다.

“한국의 모든 면이 발전했지만 정치는 초기 산업사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민주냐 반민주냐의 시대는 가고 독재와 반독재를 구분하던 때도 벌써 지났지요.

정치란 국부(國富)를 늘리고 국민을 편안케 만들기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목청을 높여 남을 제압하는 정치판은 안됩니다. 진실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정치는 조용조용히 말해야 옳습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는 미래지향적인 정치를 펼치자면 정치인도 전문성 있는 경쟁력을 구비해야 할 것입니다. 전문성이 곧 정치인의 능력이자 경쟁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전문성이란 이명박 자신의 상표다. 곧 기회가 오면 정치를 재개해야 한다는 소망이자 당위성으로 들리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정치를 선수(選數) 텃세가 지배하는 정치현장을 체험했다”면서 “다선위주의 기득권이 지배하는 국회에서 정치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느냐”고 되묻는다.

이명박은 “오랜 정치경륜이 존경받아야 한다면 경영분야에서 쌓은 노하우도 인정돼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정치는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고 정치지도자는 나라를 경영하는 경영인이 아니냐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명박의 전문성은 어디에 활용되어야 할까. 당연히 정치분야라는 결론이다.

“대통령에 도전한 적 없습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자서전 ‘신화는 없다’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무렵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은 출판기념회는 깜짝 놀랄만했다. 세종로 일대 교통이 마비되었었다.

정치인들의 자서전은 일방적 홍보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명박의 ‘신화는 없다’는 무려 50만부를 돌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이명박의 인기가 서울시장 출마로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 이명박이 공천을 받으면 가망이 있다는 지적이 많았었다.

이때 김영삼(金泳三) 대통령과 독대를 통해 서울시장 출마의 뜻을 밝혔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은 출마하지 못했다. 그의 첫 좌절이었다.

이명박은 YS에게 “서울시장 자리는 국정의 본보기요 지방자치의 표본이니 나라를 자신있게 경영해 볼 사람을 밀어주십사고 진언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YS는 대선때 선개대책본부장을 맡고 행정경륜이 높은 정원식(鄭元植) 전 총리를 밀겠다고 밝혔다.

이명박은 “선거의 논공행상이라면 임명직으로 보상해야지 선거직은 합당치 않다”고 거듭 진언했지만 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의 시장출마는 좌절되고 정원식 후보는 3위로 낙선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때의 일을 두고 세간에서는 대통령께 도전했었다는 풍문이 와전되었었다고 해명한다.

이어 이명박은 다시 정치의 전문성과 국가경영론을 강조한다.

“이제 국민이 정치도사나 세칭 정치 9단의 경륜을 내세우는 정치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국민이 잘 사는 나라를 건설하자면 서울시장이든 대통령이든 전문능력을 지닌 사람을 뽑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정치일선에도 전문지식인이 부각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명박에게는 시대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회가 접근해 오지 않았느냐는 해석이기도 하다.

당당하면 오너도 얕보지 못한다

이명박의 소신발언에 정치의 전문화가 자주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는 느낌이다. 새파란 나이 20대 이사에 30대 사장 40대 회장이라는 출세의 이력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문경영인이란 사장 월급을 받는 사원”이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오너보다 회사와 일을 더 사랑해야 하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그 자신의 출세코스가 그러했음을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전문경영인은 “오너보다 전문성이 앞서야”하며 “적절한 시기에 회사를 떠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명박 자신이 현대를 적절한 시기에 떠나 후진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그는 현대맨이나 삼성맨이라는 세속적 용어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특히 이명박다운 자신있는 조언은 “전문경영인이 목표달성을 위해 도전정신을 앞세워 당당하게 일하면 오너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 일러준다.

그가 현대에 재직하고 있을 때 오너가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는 전과를 설명하는 말로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은 최근의 재벌개혁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때 현대그룹이 정부와 불편한 관계로 전전긍긍한 적도 있었으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다소 비판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뜻밖에도 냉정하다.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 전경련을 해체하고 업종별 전문단체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룹식 경영은 이제 종착역에 왔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재벌도 사회분위기와 시대환경 변천에 따라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게 변화해야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재벌의 자구책(自救策)이 바로 재벌의 구조조정이라는 판단입니다.”

반면에 IMF 위기극복에 대해서는 필요이상으로 희생을 감수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한다.

IMF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우리가 이를 쉽게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구조조정도 정부와 공기업이 솔선수범하고 그 다음에 금융과 기업의 순서로 진행돼야 하지 않았을까.

이같은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명박은 개혁의 순서가 바뀌어 기업에게 지나친 희생을 강요한 셈이라고 풀이한다.

대북지원 서두르지 말아야…

이명박은 통일과 대북정책에 관해 상당히 높은 안목을 지녔다. 평소 깊은 관심과 연구가 있었다는 느낌이다.

“북한에 대해 경제지원이라기 보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원조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해외에 원조해 줄 형편은 아닙니다. 게다가 대북지원을 정치논리로만 밀어붙여서도 안됩니다. 국민과 기업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걱정스럽습니다. 남북문제를 정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휘둘러서는 곤란합니다.”

현실을 직시할 때 대북지원은 불가피하지만 정부가 일방적으로 북의 의도에 따라 끌려가는 듯한 자세가 옳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이명박은 남북문제와 당면한 경제문제에서 닥쳐올 위기가 정치의 빅뱅을 가져올 가능성을 내다보고 있다. 지금 기성 정치권에서 붕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 않느냐고 진단하기도 한다. 이를 낙후된 우리의 정치가 궁극적으로 발전하는 변화의 기류라고 해석한다.

이명박은 선진국이란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어 국민이 신뢰하는 나라”라고 규정한다.

단순히 GNP만 올라간다고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국가의 지상목표가 국민소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다가온 21세기의 한국은 모든 부문에 걸쳐 불합리를 합리로 바로잡는 것이 국가적 과제라고 말한다.

우선 공직사회가 개혁되어 부정을 저지르고는 살아남지 못하는 질서가 잡히면 선진국으로 가는 길도 결코 멀지 않다고 전망한다.

이를 위해 정부의 결단을 촉구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은 돈으로 정치세력을 키우는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투명한 사회, 투명한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명박의 눈은 정치개혁, 정치선진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소감이다.

요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바쁜 일과를 시작한다는 이명박이다. 새벽기도와 아침운동도 거르지 않는다고 한다. 이어 한시간 가량 인터넷으로 뉴스를 읽고 식전에 e-mail 사무로 중요한 업무를 처리한다.

그리고는 동아시아연구원, 아태환경 NGO, 벤처금융사를 순회한 후 강연이나 세미나 참석 등으로 각계인사들과 풍부한 대화를 나눈다.

다시 움직이는 이명박이 뛰고 있는 것이다. 그의 천성과 집념이 분명 새로운 것을 성취하여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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