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권희로의 비극

글 / 柳子孝(유자효 SBS 라디오본부장)

충무공은 왜적이 살려냈었다

임진왜란때, 육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했지만 오직 충무공의 해군만은 연전연승이었다. 그것도 중앙 정부의 지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도망치기에 바쁜 중앙 정부가 남해안의 해군을 도울 정신도 힘도 없었다. 열세의 병력으로 지형을 이용한 뛰어난 전술과 자체 개발한 병기로 왜적을 격파해 호남을 범접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중앙 정부가 충무공에게 했던 것은 잠시 평화가 오자 그를 서울로 달아올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왜적이 재침해오자 졸병으로 싸우라며 풀어주었다. 충무공을 살린 것은 왜적이었다는 아이러니가 성립한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왜적의 마지막 부대가 철군을 시도할 때 충무공의 해군은 노량에서 막아섰다. ‘이 원수를 갚게 하시면 죽어도 한이 없나이다!’ 이 기도처럼 그는 적탄에 맞아 숨졌다. 전후 논공행상에서 조정은 그를 1등 공신으로 봉했다.

그러나 충무공이 살았더라면 그는 중앙 정치 무대의 권력다툼에서 부지할 수 있었을까? 그가 죽었기 때문에 그에게 관대했던 관료들이 전쟁의 영웅으로 개선한 그에게도 끝까지 관대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보면 충무공은 죽을 때를 잘 택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번 죽어 영원한 성웅으로 남았으니 그는 죽음의 복을 타고 났다고 할 것이다.

죽어서 영원한 삶을 누린 경우

제갈량이 천하를 제패할 주군을 따르려면 유비보다는 조조가 현실적인 선택이었으리라. 그러나 조조와 제갈량은 만날 운명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있으면서도 조조가 끝내 천하를 얻지 못한 것 역시 조조의 운명이었다.

관우, 장비, 유비가 차례로 죽고 나약한 군주 유선을 모시게 된 제갈량은 홀로 천근 짐을 지고 계곡을 건너는 심경이었다. 그가 잇따라 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것은 자신의 죽을 곳을 찾는 행위였다. 폐결핵을 앓고 있어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일을 이루어 내야만 했다. 제갈량은 자신의 건강과 시간과 싸웠던 것이다.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쓰러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촉은 망한다.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몸을 던져 운명과 싸운 제갈량은 비극적인 인간상이다.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그는 실패한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역사상 최고의 인물로 제갈량이 중국과 대만에서 모두 꼽히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눈물겨운 출사표에 이은 그의 장렬한 죽음 때문이다. 그는 한번 죽어 영원한 삶을 택했다.

케네디가 살아있었다면…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세계인을 매료시켰다. 젊고 잘 생긴 대통령에 여배우처럼 아름다운 부인, 인형처럼 예쁜 딸과 아들, 세상의 모든 복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댈러스의 총탄에 숨지고 만다. 그의 사망 뒤 부인은 그리스의 선박왕에게 재가해 미국인들을 실망시켰고, 그의 아들은 비행기 사고로 젊은 나이에 숨져 다시 한번 세계인들을 비탄케 했다.

케네디에 대한 세계인들의 사랑은 대단하다. 알링턴 국립 묘지의 그의 묘소에는 추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보스톤의 기념관에도 방문객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그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미국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의 수위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그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어떠했을까? 마릴린 몬로를 비롯한 숱한 여성들과 가진 그의 섹스 행각이 여론의 포화를 맞진 않았을까? 그래서 빌 클린턴보다 먼저 증언대에 오르진 않았을까? 그의 정적들은 그를 버려 두었을까? 온갖 흠결을 다 집어내 그를 공격했을 것이다. 간신히 닉슨을 이겼던 그는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젊은 나이에 은퇴한 그는 그후의 생을 어떻게 보냈을까?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까?

70 노인의 귀환 그 뒤의 비극

권희로씨는 박해받는 재일 한국인의 표상이었다. 그가 일본인 경찰을 죽이고 여관 투숙객들을 인질로 농성을 벌였을 때 한국인들의 시각은 박해받은 재일 한국인의 의거를 보는 듯 했다. 그가 단순한 살인 폭력배에 불과하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은 한국인들에게 조금의 공감도 불러오지 못했다.

그는 긴 영어 생활을 통해 점차 한국인들의 영웅이 되어 갔다. 그의 석방운동이 이어졌으며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가 나왔다. 그의 석방문제는 한·일 외교 당국의 현안이 되기도 했으며 옥중의 그와 결혼을 하겠다는 여성도 나타났다. 종교 단체와 인권 단체들이 나서서 그의 석방문제는 국제적인 쟁점이 되었다.

마침내 그는 석방됐다. 70이 넘은 노인의 모습으로 그는 한국으로 귀환했다. 마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한에서 환대받듯, 그는 개선장군처럼 한국에서 환대받았다.

그러던 그가 다시 뉴스의 초점이 됐다. 이번에는 칼을 들고 온몸에 피칠을 한 모습이었다. 그것도 70대의 치정 폭력범으로서… 질투에 몸을 떠는 이 노인의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석방시키려고 그토록 애썼던 바로 그 사람인가?

권희로의 생애에서 볼 때, 가장 잘된 종막은 그가 일본의 감옥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인들에게 민족차별 반대자의 모습과 인권투쟁자, 모국을 그리다 숨져간 재일 한인의 모습으로 영원히 남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사건이 발생하자 ‘그것 보라’며 조소하는 듯한 일본인들의 시선이 있을 수 없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권희로씨는 죽을 복을 타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사람의 생애는 어떻게 살았는가와 함께 어떻게 죽었는가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로부터 잘 죽을 수 있는 복을 5복의 하나로 쳤던 것이다. 그 5복에는 고통없는 죽음이라는 측면과 함께, 죽어 더욱 명예를 얻는 복도 포함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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