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오일쇼크의 재음미

글 / 權和燮 편집위원(권화섭 세계일보 객원편집위원)

국제유가가 크게 뛰면서 물가불안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닥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지난 1970년대에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세계경제를 심각한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의 공포가 다시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오일쇼크는 1973년12월 이후 단기간에 국제유가가 5배로 급등함으로써 촉발되었고 이로 인해 우리경제는 1974년2월에서 75년6월까지 16개월간 경기침체 속에 심각한 물가불안에 봉착했다. 그리고 1979년에 닥친 2차 오일쇼크 기간에는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단군이래 최악”의 불황을 경험했다.

그러면 최근의 국제유가급등은 제3의 오일쇼크로 발전할 것인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쇼크’는 그 말뜻이 갑자기 닥치는 어떤 의외의 사태를 가리킨다. 70년대의 두 차례 오일쇼크는 각각 중동전쟁과 이란혁명으로 촉발되었고 또 석유소비국들은 ‘석유안보’ 측면에서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제3의 오일쇼크 가능성?

이에 비해 현재의 고유가 사태는 그러한 외부적 충격이 아닌 미국의 원유재고량 감소와 동절기를 앞둔 수요증가라는 지극히 시장적인 요인으로 촉발되었다. 그리고 주요 선진국들은 총 12억배럴에 달하는 전략적 원유비축재고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과 다른 주요 선진국들이 진정으로 유가안정을 원했다면 OPEC에 대해 증산을 구걸하기보다는 전략비축재고를 적절히 방출했어야 한다고 뉴욕타임스의 사라 라이얼 기자는 지적했다. 즉 최근의 고유가 사태는 OPEC보다는 주요 선진국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유럽에서 일어난 고유가 항의시위는 마치 70년대 오일쇼크와 유사한 공황(恐慌)사태를 연출했다.

유럽국가들 중에 항의시위가 가장 격렬했던 것은 영국이다. 무려 76.2%에 달하는 높은 세금으로 인해 영국의 기름값이 세계에서 가장 높아서 그동안 영국 운전자들의 불만이 그만큼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휘발유값이 높다. 역시 높은 석유류세가 그 원인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영국처럼 북해 유전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므로 석유류세를 더한층 올릴망정 결코 내려서는 안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들의 고유가 처방은 오로지 유류소비절약과 에너지 효율개선, 에너지 절약형 산업구조 전환을 되뇌는 것뿐이다. 지극히 당연한 주문이지만 당장의 고유가 처방치고는 너무나 한가한 원칙론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원칙론은 평소에 꾸준히 실천해야할 문제이다. 지금 우리에게 다급한 문제는 걸프전 이후 최고 수준으로 급등한 높은 원유가격에 여하히 대처하느냐 이다.

석유류세 조정의 필요성

고유가 충격으로 인해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있을 때는 에너지 절약형 산업구조라는 정책과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스태그플레이션 그 자체를 극복하는데 전념하는 것이 옳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경기침체와 인플레를 동시에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정책당국자들을 딜레마에 빠뜨린다.

이러한 딜레마에 관해 하버드대 그레고리 맨큐 교수는 이원적 접근을 권고한다. 즉 인플레 수습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 맡기고 정부는 재정정책을 통해 경기침체를 극복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차 오일쇼크 직후 미국의 경제정책은 그러한 접근방식을 취했으며 그 결과 1981-82년에 거의 10%에 달했던 인플레율을 1983-84년에는 4% 수준으로 끌어내리는데 성공했다.

맨큐 교수는 이것을 전적으로 당시 연방준비제도이사회 폴 볼커 의장의 공로로 돌린다. 왜냐하면 볼커 의장은 ‘인플레이션 투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강력한 긴축통화정책을 취한데 반해 레이건 행정부는 사상 유례없는 예산적자를 누적해 가는 팽창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가정적 상황을 검토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레이건 행정부가 팽창정책을 쓰는 대신에 볼커 의장과 보조를 맞춰 긴축정책을 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필경 그 결과는 1979년에 6% 수준이던 실업률이 10%선을 훨씬 넘어 유럽의 경우처럼 상당기간 두 자리 수의 고실업 사태를 유발했을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나라는 한가지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97년12월의 외환쇼크에의 대응책으로 IMF가 요구했던 과도한 통화긴축과 재정긴축을 고지식하게 추종한 결과 사상 최악의 불황과 2백만 실업자의 준(準)공황 사태를 연출한 것이다.

후일 IMF마저도 이때의 정책처방이 오류였음을 인정했으니 이제 더 이상 그 시비를 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국제유가 파동이 장기화할 경우 인플레이션 공포증으로 인해 우리가 다시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점이 걱정스럽다.

절약과 생산성 구호의 함정

유가급등과 같은 외부적인 충격이 있을 경우 우리 전문가들의 상습적인 정책구호는 허리띠 졸라매기다. 특히 국민들만 그래서는 안되고 정부가 앞장서 물자절약과 긴축정책을 펴야한다고 주문한다. 오로지 한가지 목적은 유가충격이 다른 수입 원자재 가격상승과 맞물려 국내 물가불안으로 확산되는 것을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질없는 사후약방문이다. 이미 크게 뛰어버린 원유와 다른 수입 원자재 가격상승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가격충격을 여하히 흡수하는가 이다. 이른바 레이거노믹스를 원용한다면 인플레 수습은 통화정책에 맡기고 석유류세 인하와 여타 규제완화를 통해 경기침체의 완화를 꾀하는 것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 전문가들이 즐겨 외치는 또 하나의 정책구호는 생산성 향상이다. 그런데 IMF 사태이후 구조조정을 인력감축과 동일시하는 우리의 정책풍토에서 이 구호가 새로운 고용불안의 빌미가 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좀더 사려깊고 책임있는 인간적인 경제전문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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