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DJ정권도 같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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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金潤坤 편집위원(김윤곤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9월초까지도 한여름이나 다름없던 무더위가 추석을 며칠 앞두고는 드디어 물러갔다. 그리고는 오지 말았으면 더 좋았을 태풍이 명절의 즐거움을 많이도 앗아갔다. 비록 좀 일찍 오거나 늦게 오는 일은 있어도 계절의 변화는 어김없이 제 틀에 따라 찾아오고, 때로는 이상 기상으로 재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정권에도 계절의 변화와 같은 어떤 순환의 틀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집권 초창기에는 그럴싸한 구호와 장미빛 비전 제시로 꽤 인기를 모은다. 그러다가 그러한 구호와 비전에 의한 정책의 효과가 나타날 때가 되었다고 기대하고 있으면, 그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권력의 핵심에서 엄청난 금융부정 사건이 터져 국민에게 충격을 준다. 그래서 대통령의 인기는 급격히 추락하고, 일찍이 레임덕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권을 행사하려 몸부림치면서 세자책봉도 최대한 늦춘다. 그 결과 자신으로서는 탐탐치 않게 생각했으나 스스로 자란 후계자에게 정권을 내주고 퇴임 후에는 불편을 겪는 신세가 되고 만다.

정권 인기에도 순환현상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처음에는 정의사회 구현을 내걸며 국민에게 어필하려 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정당 이름도 민주정의당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의사회가 오기 전에 엄청난 장영자 어음사기사건이 터졌다. 전대통령 처가쪽 친인척이 저지른 이 사건에서는 영부인이 관련되었다는 의혹까지 나돌아 세상이 뒤숭숭했다. 그 후 전두환 대통령은 사상 처음으로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업적을 세우며 이미지 개선에 안간힘을 쏟았지만 끝내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임 후의 영향력 행사를 목표로 하는 법 체제를 마련하면서 후임자의 부상을 견제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집권하자 백담사로 유배되었다.

노태우 대통령 또한 처음에는 민주적인 공정 선거에 의해 당선된 대통령으로서 주목되었다. 스스로 보통사람으로 내려앉은 그는 ‘저를 한번 믿어주세요’라는 호소로 기대주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지나 수서사건이 터져 청와대 비서관이 구속되며 세상이 들끓었다. 또 얼마 후에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노 대통령에게 거의 정기적으로 5억원 정도의 거액을 갖다 주었다고 폭로했다. 이후 노 대통령 주변에는 돈의 구린내가 점점 더 짙어지면서 그의 인기는 바닥에서 맴돌았다. 임기 후반 북방 외교의 성과도 그의 인기를 되살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레임덕을 의식하지 못하고, 이미 강력하게 떠오른 후임 후보에게 정권을 물려주기 싫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감옥에까지 가는 대가를 치렀다.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은 취임하자 “앞으로는 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깨끗한 문민정부의 이미지를 드높였다. 그 자신이 어지럽다 고 할 정도로 여론조사에서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그가 입만 열면 나오던 개혁과 변화로 정말 새로운 시대가 열릴 줄 알았다. 그러나 곧 한보비리가 터지고 대통령의 아들이 국회 청문회에 섰다가 감옥에 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대통령은 실정에 대한 사과가 잦아지면서 인기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저를 기록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역시 후임 후보로 강력하게 떠오른 인물을 견제하다가 끝내는 정권을 물려주지 못하고 사상 초유의 여야 정권교체를 연출한 장본인이 되었다. 퇴임후의 그는 전임자들보다는 좀 나은 신세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으나, 후임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면전에서 경제를 망친 대통령으로 망신당하기도 했다.

DJ인기도 변화징조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그 자신이 강조했듯이 전임자들과는 다른 대통령으로 기대를 모았다. 특히 IMF관리를 받는 경제위기를 극복함으로써 국정 리더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묘하게도 임기 절반을 넘기면서 권력의 핵심이 관련된 것으로 의혹을 산 대형 금융부정 사건이 터졌다. 대통령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박지원 문화관광부장관과 권노갑 민주당 최고위원 및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 등의 이름이 이 사건과 관련하여 보도되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어쩌면 이를 계기로 김대중 대통령의 인기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 역대 전임자들이 걸었던 길에 들어서지 않을까 걱정된다. 거기에다 여당의 선거비 실사 개입 의혹도 불거져 있으니 말이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나 전두환 정권이라면 이런 정도의 의혹은 서둘러 덮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민주주의를 지상의 가치관으로 삼고 있는 국민이 민주화의 화신과도 같은 지도자가 리드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문민정부 시대의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국민의 정부에 들어와 민주주의 의식은 한 차원 더 높아졌다. 권위주의 수법으로 의혹을 덮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세상이다. 의혹이란 서둘러 봉합하려면 오히려 더 커지는 속성을 갖고 있다. 국민의 정부를 자처하면서 도대체 무슨 힘으로 온 국민이 쑥덕이는 사건을 잠재울 수 있다고 판단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사건에 잘못 대처했다가는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레임덕이 더 빨리 오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국민의 정부에는 레임덕이 없다고 큰소리치지만, 그럴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전임자 가운데 누구도 레임덕을 자인한 사례가 없었지만 레임덕은 오게 마련이었다. 5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6년간 감옥살이 한 끝에 쟁취한 대통령이라 해서 레임덕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벌써 여당에서는 김대중 이후를 겨냥한 경쟁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야당에서는 이미 뚜렷한 대통령 감이 지목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 시점, 이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자신의 권력행사에 집착하다가는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우울한 말년을 보내고 퇴임 후에는 분노를 삭여야 할지 모른다. 전임자들과는 다른 김대중 대통령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마음을 비우고 참 민주주의의 신화를 창조하는 큰 정치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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