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호]

김정일은 뭘 원하는가

글 / 김동길(연세대 명예교수,태평양위원회 이사장)

식견있는 지도자, 위원장

세상이란 이토록 간사한 것일까.

어제까지만 해도 김일성이라는 이름에 존칭이나 직함을 붙이는 것 자체가 반국가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한 장본인이 김일성이라는 극악무도한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명이 김성주라는 자로서 독립운동의 투사요 애국자이던 김일성(金一成)의 이름을 도용하되 ‘일(一)’을 ‘일(日)’로 바꿔쳤을 뿐임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었던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헛소문만 떠올라도 강남의 어느 음식점에서 ‘축 김일성 사망’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내걸 만큼 그는 대한민국 국민의 증오의 대상이었다.

그의 아들이라는 김정일이 북한의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권력을 독점하고 포악한 정치를 자행하는 가운데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감행하며 국민을 더욱 무서운 공포와 굶주림으로 몰고 가는 가운데 아직 처형되지 않고 갇혀있는 정치범도 20만에 가깝고 이미 굶어 죽은 북한의 동포가 2백만은 될 것이라는 보도가 나돌게 되어 우리는 김정일이 그 아비 김일성보다 더 고약한 인간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비가 죽고 그 아들의 시대만 돼도 북한은 체제의 붕괴가 불가피하다고 믿고 있던 한국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제의 일이고 오늘은 어떠한가.

세상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것인가 정말 어리둥절하지 아니할 수 없다. 청와대에서 그를 ‘식견있는 지도자’라고 치켜세웠을 때 내 귀를 의심했는데 이제 김정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과 명실공히 대등한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를 헐뜯는 사람도 없고 나무라는 사람도 없다. 그의 이름 뒤에 ‘위원장’ 또는 ‘장군’이라는 직함을 붙이지 않으면 불경죄로 연행될 가능성도 없지 아니하다.

과거의 반공은 무의미했는가

“통일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을 김정일 장군으로 합시다”라고 내가 외친다해도 나의 사상이나 이념을 문제삼을 사람도 없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이건 큰일이다. 대한민국은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1948년 왜 단독정부라도 세워야만 했는가. 1950년 6월 25일 국군은 왜 인민군의 남침을 저지해야 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반공법이니 보안법이니 하는 것들을 만들면서까지 남으로 파송되는 무장간첩, 위장간첩을 색출해서 체포·구속함으로 그들을 선량한 국민으로부터 격리시켜야만 했는가. 오늘의 남북관계가 정상이라면 그동안 반공이니 승공이니 하며 떠들어댄 것은 모두 무의미한 어리석은 짓이 아니었는가.

나는 오늘의 집권자에게 감히 묻는다. 감히 따진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딜 향해 가는 것이고 당신은 결과에 대해 역사앞에 책임을 질 수 있느냐고. 나는 이미 70이 넘도록 살만큼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근에 풀려나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의 이념과 신념이 투철한 것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이념과 신념이 투철하다는 점에서는 비전향 장기수에 뒤지지 않는다. 적당히 타협하여 오래 살고자 하는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다. 이미 각오는 단단히 되어 있다. 어느 몽둥이에 맞아 죽을지 모르지만 조금도 겁나지 않는다.

“통일된 조국의 초대 대통령을 김정일 장군으로 합시다”라고 내가 외친다해도 나의 사상이나 이념을 문제삼을 사람도 없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이건 큰일이다. 대한민국은 건국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시장경제를 도입하려는가

김정일은 무엇을 원하는가. 성공사례로 꼽히는 대한민국의 경제를 본받아 이른바 시장경제를 인민공화국에 도입하려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런 마음이 털끝만큼이라도 있다면 줄곧 무장간첩만 남파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만일 남한에서 무엇이라도 배울 생각이 있었다면 대한민국을 대하는 그의 자세가 그렇게 경직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땅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데 조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는 인물이라면 그의 얼굴에는 지금쯤 반성의 빛이 역력할 것이다. 많은 우리의 동족을 죽이고 굶긴 죄를 민족 앞에 뉘우쳐야 마땅할 것이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그리고 자기 자신의 독재와 영구집권을 보장해준 그 체제를 보전하기 위하여는 누구든지 무엇이든지 다 희생시킬 각오가 다 되어 있는 가공할 인물이다.

그런 그가 졸지에 ‘식견있는 지도자’로 둔감하였으니 대한민국에서 누가 감히 그 짓을 했는가. 누가 그를 국민 앞에 영웅으로 만들고 있는가. 김일성은 군대라도 몰고 와서 대한민국을 정복하려 했는데 그의 아들은 그런 수고도 없이 대한민국을 슬쩍 삼키겠다는 것인가.

만일 대한민국의 누구라도 그럴 가능성을 그에게 보여준다면 그는 천인공노할 민족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김정일은 대한민국에서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미자나 나훈아의 노래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대한민국은 모조리 잘못됐고 모두 더럽기만 하다고 믿는 그가 북의 체제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무엇을 우리에게서 본받으려 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그는 대한민국을 앉아서 통째 먹었으면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왜 남한의 지도자들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알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그 진정한 동기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정말 알 길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돈 아닐까

나는 공산주의의 이념과 실제가 가장 잘못된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타협이 불가능하다.

나는 한반도가 민주주의로 통일되는 것을 갈망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공산주의·사회주의로 통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에 나의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공산주의로 통일이 되는 날에는 우리가 무너진 소련처럼 되고 쓰러진 동구권의 여러 나라들처럼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러시아와 헝가리와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이 저렇게 붕괴되는 것을 목격하고도 아직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잘못된 이념에 도취된 무리들을 고치는 약은 없다.

일전에 어느 주일예배때 목사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 그동안 북의 김정일 위원장과 북의 체제를 잘 모르면서 비판하고 비난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라는 말을 듣고 이 나라가 정말 망해간다고 느꼈다.

자유민주국가라는 것들이 레닌과 스탈린의 등장을 막지 못하였기 때문에 3천만의 죄없는 러시아 인민이 그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히틀러 같은 흉악한 자의 등장을 영국도 프랑스도, 카톨릭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막지 못하였기 때문에 6백만의 유태인이 학살된 것이다. 유태인들뿐인가, 본회퍼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지성인과 양심가가 그의 손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닌가.

윈스턴 처칠 같은 지도자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면서, 히틀러 같은 독재자는 찍어눌러야 한다고 외치지 않았더라면, 프랭클린 루즈벨트 같은 지도자가 나타나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나치 독일을 밟아야 한다고 부르짖지 않았더라면 민주주의는 오늘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지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가 대오각성할 때가 이때가 아닌가.

김정일은 우리에게서 무엇을 원하는가. 몰라서 묻는가, 김정일이 대한민국에서 원하는 것은 돈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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