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세상만사는 事必歸正(사필귀정)

조철권(趙澈權) 전 장관 신앙고백

모함 옥고 대법원서 결백판결

신앙 몰두, 이웃사랑 삶 실천


<대통령자문회의 노동분과 위원장 시절의 조 전장관>

글/申貞姬(신정희) 부장

고위 공직출신의 신앙고백

공직에 오래 몸담았던 한 유명인사의 신앙고백록이 우송되어 왔다.

군인 티가 나지 않지만 군장성 출신이고, 자상하면서도 공사구분이 엄격한 조철권(趙澈權) 전 노동부장관의 고백록이다. 일선 소대장에서 장관에 이르기까지 근 45년에 걸쳐 공직생활을 지낸 그는 천주교 신자로 재경 전북 풍남신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세례명이 요셉으로 무척이나 신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조 회장의 신앙고백 중 가장 눈에 띠는 대목은 수년 전 언론에 보도되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이 대법원까지 올라가 끝내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다 지난 이야기라서 새삼스럽습니다만 몇 년 전의 보도를 기억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모함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제가 독직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였습니다. 그러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대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신앙으로 쾌활, 분주한 일상

조 회장은 한 시절을 풍미했던 육사 8기생이다.

5·16에는 가담하지 않았지만 JP와 동기생이자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와 극히 친밀한 사이다. 그러나 권력자는 못되었다. 다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전문가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런 조 회장이 평소의 인품과 달리 독직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보도는 실로 뜻밖이었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혐의를 벗고 결백이 입증되었으니 당사자 뿐 아니라 공직사회를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 회장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종교에 더욱 심취하게 되고 이웃사랑의 실천과 친구들과의 교유(交遊)가 더욱 깊어졌노라고 한다.

지난 5월 28일 전북 익산에서 개최된 제17회 전국 천주교 공무원대회에서의 신앙고백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신앙적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조 회장의 인품을 잘 말해주었다고 볼수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속 빠진 사람 아니냐고 답답해 할 지 모르지만 저 스스로는 밝고 쾌활한 생활의 연속입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바쁩니다. 메모를 해두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스케줄이 빡빡하니까요.”

조 회장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깨알같은 글씨가 적혀있는 수첩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런지 올 일흔 셋의 조 회장은 젊게 보이고 매우 건강하다. 한 주일에 골프를 한 두 번 치고 국내외 여행도 즐긴다. 얼마 전에는 미국과 중국을 여행하고 몽골에도 10여일 다녀왔다고 한다.

<매봉산 전투 전적비 참배를 하고 3군단장을 위로하고 있는 조철권 전 장관>

불운의 군 예편 후 官界(관계) 입문

공직을 떠난 지 오래지만 조 회장의 일과는 항상 규칙적이다.

새벽 4시에 기상, 가벼운 아침운동과 세수를 하고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나면 5시 30분, 그리고 걸어서 25분이면 정확히 새벽미사 시간을 맞춘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하루 일과의 시작인 셈이다. 저녁에는 9시 TV뉴스가 끝나면 곧장 잠자리에 든다.

낮에는 많은 이들을 만나 세상 이야기를 듣고 안부를 확인하는 일이 재미다. 조 회장은 인연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박태준 전 총리와는 아주 오랜 인연이 있습니다. 육사 2년 선배인 박 총리가 국방부 인사과장으로 계시던 1958년 인사계장을 맡으면서부터 가까이 지냈습니다. 박 총리가 포항제철을 설립할 때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해 왔지만 사양했지요. 박 총리가 승승장구할 때는 제 일만 묵묵히 하며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조 회장은 박 전 총리가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떠나던 날 공항에는 출영인사가 별로 없어 무척 쓸쓸해 보였다고 한다.

국무총리나 집권여당의 최고위원, 포항제철 회장 재직 시에는 구름 떼같이 몰려다니던 측근이나 관리들이 거의 보이지 않더라는 말이다. 국회의원 몇이 나와 악수하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권력무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박태준 전 총리는 미국을 거쳐 일본에 머물다가 최근 귀국한바 있다.

조 회장은 육사 동기생인 김종호(金宗鎬) 전 건설부장관과의 교우관계도 소개한다.

“1974년 35사단장으로 근무할 때 이리농림학교 동창생 몇과 점심을 같이 한 일이 문제가 됐었습니다. 학교선배 되는 재일 교포 한 분과 동석을 했었지요. 그 자리에는 당시 제일은행의 조병창 지점장, 공군의 최규순 장군, 협성해운의 김병수 사장 그리고 미원의 고관영 이사 등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재일 교포 선배 분이 1973년도에 있었던 울릉도 간첩사건 연루자와 관련된 것이 말썽이었던 거죠.”

조 회장은 이때 27년간 입었던 군복을 벗고 평생을 군인으로 살려던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회고한다. 그때 국방부 군수차관보를 맡고있던 김종호 장군도 같은 일로 군복을 벗게 되었다. 그러나 조 회장이 전라북도 지사로 임명되던 날 김 전 장관 역시 전라남도 지사로 발령이 났다. 두 사람은 인생의 우여곡절을 함께 겪은 것이다.

고난을 이겨내야 참 영광

조 회장은 이렇듯 순탄한 세월만을 살아 온 것이 아니지만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산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털어놓는다.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보세요. 대체로 역경을 이겨낸 선수들입니다. 편하고 좋은 일만 있으면 자랑스런 기회가 찾아와도 그 참된 가치를 간과하게 되기 쉬운 법입니다. 또한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영광을 쟁취했다고 오만에 빠지면 또 다른 시련을 자초하기 마련입니다. 살아오는 동안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늘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 회장은 요즘의 정치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진단한다.

“유력 정치인들이 차기 대권을 목표로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가 불안하고 국민이 불편한 겁니다. 국민의 정부는 이전 정권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신중한 행보를 해야 할 터인데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발전이 없지요. 가신(家臣)들의 농간이나 이권투쟁 등 정치구습(政治舊習)을 방치했다가는 큰 망신을 당하게 될 겁니다.”

최근의 한빛은행 사건만 보더라도 장관 등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제때 책임을 지지 않고 윗사람의 눈치만 보기 때문에 대통령의 짐이 더 커지고 있다고 풀이한다.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들이 자기책임 아래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공연히 나섰다가 이미 따놓은 장관자리마저 날아갈까 봐 눈치만 보는 형국입니다. 자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잘잘못은 법정에 가서 가리더라도, 일단 물러나 주는 것이 국민이나 임명권자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정말 억울한 누명을 쓴 것으로 판명이 나게되면 얼마든지 보다 더 나은 자리에서 국가에 봉사할 기회가 주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태도는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책임지는 장관 선례 남겨

조 회장은 노동부 장관 시절 책임 행정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노동부 소관 시험문제 출제 잘못이 중앙 일간지에 기사화 되어 말썽이 나자 책임을 지겠다고 사표를 제출했으나 반려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당시 조선일보 유근일 칼럼 등 언론에서는 “누가 잘못했던 간에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장관이 있으니 다행”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조 회장에게는 원호처장 시절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장남이 순직한 일이 가장 큰 시련이었다.

“1984년 제 큰아들은 군의관으로 육군 대위가 되어 최전방에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뜻밖에도 순직해 국립묘지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아비가 가야할 곳인데 서른 한 살의 꽃다운 나이로 큰아들이 먼저 간 것입니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자제들이 불법 군 면제로 재신검을 받는 등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데 비하면 너무 큰 차이가 있다. 의당 후방병원에 배치되어야 할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아버지 주장으로 전방에서 근무하도록 한 결과 희생시킨 것 같아 아직까지도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을 느낀다고 한다.

“아들의 순직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원호처장으로서의 일을 묵묵히 했습니다. 겪고 보니 그 아픔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것이어서 다른 원호가족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리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정부조직법을 고쳐 당시의 원호처를 국가보훈처로 개칭하고 '국가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종래의 원호개념에서 보훈개념으로 국가유공자와 그 가족을 예우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 이후 광복회에 소속된 애국지사들은 월 2백만 원 가량의 연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 자식도 저승에서나마 매월 50여만 원씩을 처자식에게 바치고 있는 셈입니다.”

조 회장의 맏며느리인 박성희(朴聖姬) 박사는 안과 전문의로 고3인 외딸과 함께 살며 순천향의대 주임교수와 대학병원 안과과장을 겸임하고 있다.

<부인과 함께 변산반도를 방문한 조철권 전 장관>

가난했던 시절의 어머님 사랑

조 회장의 삶은 기복이 많은 편이었다. 공직생활 시절은 뜻밖의 일로 사임을 하기도 했고 우연한 기회에 명예회복이 되어 공직에 다시 나갈 때도 있었다.

조 회장은 국가보훈처장 1년 반만에 노동부 장관으로 발령이 난다.

“기쁠 때 슬픈 시절이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인가 봅니다. 찌들어지게 가난했던 학창시절,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사관학교에 갔던 일, 6·25 때 육군중위로서 38선 방어임무로 사선을 넘나들던 일 등을 생각할 때 장관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리농림학교 재학시절 용돈을 몸에 지녀본 적이 없으며, 해방 후의 혼란기에는 빵 한 개 사먹을 돈이 없었던 일을 조 회장은 결코 잊지 못한다.

새벽엔 5km를 뛰어가 기차통학을 했다. 밤늦게 귀가해서는 아랫목에 묻어준 밥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기 일수였다.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곡마단이 고향인 김제에 들어왔을 때입니다. 학교 친구가 입장권을 한 장 주기에 어머니께 구경하시라고 드렸어요.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와 여쭈어 보니 날짜가 지난 표라고 입장을 거절당해 그냥 돌아왔다고 목 메인 소리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때의 그 불효의 상처가 오늘날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조 회장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50년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유학 중이던 한 해를 빼고는 매년 어김없이 어머님 기일에 시골에 가서 성묘를 하고 있다.

淸(청)·愼(신)·勤(근)의 공직 수칙

조 회장이 노동부 장관을 맡았던 시기는 유신시절 유보되었던 노동계의 요구가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올 때였다.

“노동부 장관의 중임을 맡았던 1980년대 중반은 사북사태가 대변해 주듯이 대규모 노사갈등이 빚어지고, 노학연계 등 사회불안을 수반하는 노사분규가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발로 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올바른 판단을 위해 노동계와 학계, 종교계 지도자들을 부단히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며 지혜를 구하고자 힘썼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러한 노력의 대가는 항상 더 열심히 뛰게 할만큼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 장관은 노사안정이 사회안정과 국가경제발전의 토대가 된다는 인식아래 근로자들의 복지향상을 위한 최저임금제의 도입을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시기상조론이나 성장우선론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청와대 경제수석이 성장논리를 앞세우니 조 장관의 주장은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장관직을 떠나면서도 억울해 하거나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자신의 탓으로 감수했다. 그런 조 회장은 공직생활을 하며 스스로에게는 무척 엄격한 원칙을 적용했다고 회고한다.

“공직자로서 청(淸)·신(愼)·근(勤)의 세 가지 수칙을 몸에 지녔습니다. 청(淸)은 몸가짐의 청결이고 신(愼)은 분수에 넘치는 일을 삼가는 것이며 근(勤)은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조 회장은 자녀 혼사를 치르면서도 이 수칙을 지키려 노력했다. 전북 지사 재직 시 3자녀를 서울의 한 교회에서 한날 한시에 합동결혼식을 치뤘다. 이때 사돈들과의 협의아래 축의금은 물론 방명록 서명도 사양했다.

“결혼식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치렀습니다. 결혼식장에 가는 길에 양복 한 벌을 사 입고 자녀들에게는 여행가방 한 세트 사 주는 것으로 혼수를 대신했습니다만 아이들도 자랑스러워하고 제 마음도 홀가분했습니다.” 그러나 합동결혼식 사실은 뒤에 중앙일보의 가십기사로 주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혼사를 치른 세자녀 가운데 따님 명희(明姬) 씨는 소프라노로서 성악교수로 활동 중이고 사위 천규승(千奎承) 박사는 KDI 기획팀장, 둘째 아들 백상(百相) 씨는 외무부 외교정책실 특수정책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모두를 용서하는 삶 살고 싶어

“모두를 용서하고서야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시련은 저를 더욱 하느님께 의존하게 만들었지요. 제가 신앙고백을 하던 지난 5월 28일 전북 익산시 실내체육관에는 전국의 5천여 공무원 천주교 신자들과 그 가족이 모였습니다. 그 많은 신앙의 동역자 앞에서 변변치 않은 고해성사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본인의 겸양과는 달리 조 회장의 삶의 체험이 담겨있는 신앙고백은 많은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특히 그는 역경을 딛고 일어선 미국의 링컨 대통령 이야기로 많은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링컨 대통령은 무척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손가락질을 당하던 사생아였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를 아홉 살 때 여의고 18살에는 사랑하는 여동생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정치에 나서 연거푸 낙선의 고통을 겪는 등 링컨의 일생은 온통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링컨은 고난의 세월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의 존엄성을 깨달았다고 한다.

고난과 아픔을 인생의 귀중한 자산으로 삼은 결과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 회장이 이렇듯 신앙고백을 통해 링컨의 삶을 이야기한 이유는 시련과 고난을 이겨냄으로서만이 진정한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조 회장의 바램대로 고난을 이겨 참 영광을 이루어 가는 이들이 이곳저곳에서 사회의 기둥이 되어 풍요롭고 여유 있는 인간관계를 형성해 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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