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일산에 850조짜리 金庫(금고) 있다

지하27m엔 철옹성 비밀의 문

證券(증권)예탁원, 금고지기 단 2명뿐


감시카메라잡힌.jpg

<감시카메라에 잡힌 방문객들의 모습>

일산 신도시에 8백50조원의 금고가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소공동 한국은행 금고보다 많은 유가증권과 황금이 가득한 금고가 한적한 통일로변에 위치하고 있다니 군침이 돌지 않을 수 없다.

지난 8월말 현재 8백50조원, 우리나라 총생산 4백84조원의 1.8배, 국민 1인당 1천8백만원 어치의 유가증권이 맡겨진 증권예탁원 지하금고를 말하는 것이다.

방문객에게 쌀쌀한 규칙의 집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에 자리잡은 증권예탁원 7층 빌딩은 쇠붙이마냥 튼튼한 인상이다.

출입구에서부터 경계와 감시가 느껴진다. 무장 경비원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모로나 자유진입이 허용되지 않는다.

웬 비밀이 많아서 이토록 싸늘한가 정이 떨어지는 방문이다. 사전예약을 하고도 이중삼중으로 안내받고 서명하고 들어가는 기분이 좋을 까닭이 없다.

코스마다 안내자가 바뀌는 것은 또 무슨 수인가. 규칙이라고 하니 더 이상 반항할 도리는 없다.

보통의 직업인이나 한 점도 다를 것이 없는 안내자가 방문객을 그토록 매정하게 인도하다니 엄청난 비밀이 감춰져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안내자가 충고하듯 일러주는 말이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고 했다. 뱃심좋은 사장 김동관(金東寬)씨도 “낸들 어찌할 수 없소이다”라고 오히려 양해를 구한다.

결국 국내 최대의 황금금고에 한치의 사심(私心)도 접근할 수 없게 장치되어 있으니 아예 단념하라는 경고인 셈이다.

사방이 황량한 벌판에다 국민총생산을 쌓아두었으니 그만한 배짱은 필요했을 것이다.

제 아무리 날쌔고 신출귀몰한 술수에 능한 도적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일산 금고다. 그러니 허용된 범위내에서만이라도 안내를 받게 된 것이 다행이고 흥미롭다는 소감이다.

지하 27m에 强力, 安全, 自動化 금고

증권예탁원의 두뇌와 눈과 귀는 몽땅 지하에 위치한다.

지상의 사장실은 거미줄같은 센스와 카메라의 중앙에 위치한 결재코너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화장실 내부에서의 사생활 정도가 보호되는 영역일 뿐이다. 그러니 사장도 안전시스템의 하수인(下手人) 신세를 크게 면할 것 같지 않다.

지하금고로 내려가는 육중한 특수엘리베이터부터 언짢다. 강력 스테인레스가 차갑기도 하거니와 안내자마저 수동작이 허용되지 않으니 컴퓨터 조작으로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다.

금고지기 두 명이 겨우 눈썹만 까닥이며 인사를 받는 시늉이다. 물어보나마나 규칙일테니 따라야 했다.

자동화 금고문이 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지루하다. 첫 번째 사나이가 한참을 조작했지만 25톤짜리 금고문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한참 기다리는 사이, 자신도 절차받고 함께 내려온 홍보간부가 자랑을 늘어놓는다.

미국 FRB 금고규격에다 스위스의 SEGA 뱅크 기준을 적용한 세계에서 한둘에 불과한 강력, 안전, 자동화 금고라고 길게 설명한다.

또한 주위 외벽은 1m가 넘는 강력 콘크리트 두겹에다 가운데 공간 1.5m에 물을 채워 외부로부터 피폭이나 강진(强震)에도 까딱없노라고 한다.

그리고 금고 바닥도 2중으로 중간에 물을 채워 놓았으니 물 위에 떠있는 지상 최고의 안전이라고 수다를 떤다.

그제서야 육중한 두께 1m짜리 금고문이 살금살금 열린다. 그러나 다시 철망문이 잠겨있다.

두 번째 사나이가 다가가 조작을 하니 철망문이 열린다. 금고지기 두 사나이가 따로따로 비밀번호를 행사토록 분권(分權)시켜 놓은 것이다.

게다가 수시로 비밀번호를 바꾸기 때문에 금고지기들의 담합도 불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금고문이 열리기까지 이만큼 엄중하고 세밀하게 꾸며놓은 안전이 과잉 아닐까 싶다. 드릴기로도 뚫을 수 없다는 특수강 금고문 여는 과정이 방문객들의 기를 꺾자는 의도인 것만 같기 때문이다.

永久, 安全, 無事 로봇 창고

금고문 안은 창고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천정이 까마득한 넓은 공간에 서가(書架)처럼 생긴 증권박스들만 빼곡하게 쌓여있다.

번쩍이는 황금덩이가 쌓여 있는 것도 아니고 돈다발이 쌓여 있지도 않다. 도대체 화물창고를 지상 최고의 강력, 안전으로 무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창고는 섭씨 23도의 상온으로 보호되어 있다고 한다. 유가증권은 변색을 방지하기 위해 특수 페인팅으로 보호되어 있노라고 한다.

화론개스로 화재도 철벽방어되었다고 한다. 불이 나봐야 순식간에 산소씨를 말리게 되니 불이 타지 못한다는 이론이다. 그러니까 예탁된 유가증권은 영구 안전무사가 보장된다는 말이다.

“왜 이렇게도 비싼 안전비용을 물어야 한다는 말인가. 누가 저런 종이쪽지를 훔쳐간다고 엄청난 최첨단 장비를 동원했다는 말인가”

안내자는 ‘국민재산 관리’라고 말한다. 8백조원이 넘는 무려 1억1천만매의 유가증권을 이 영구(永久) 안전(安全) 무사(無事) 시스템이 보장한다는 설명이다. 한국의 국민재산, 한국의 자본시장 안전보장이 이 정도라는 사실을 내외에 과시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방문객 서명란에 외국인들의 이름이 태반이다. 일본, 중국, 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중동과 구라파인들의 서명도 적지 않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꺼덕이며 한국의 투자시장을 새삼 평가하더라고 소개한다.

보관박스가 6만개가 넘는다. 지하 1층 증권분류장에서 컴퓨터가 지정해준 위치로 자동 입출되는 시스템이다. 실제 수동으로 움직여지는 일은 없다. 무인 로봇이 비밀번호를 인식하여 박스를 제자리에 앉히고 물고 나온다.

기술자는 단지 검색을 확인하는 하수인(下手人)이나 다름이 없다. 한마디로 안전하고 무사하구나 싶다.

지상으로 生還(생환)했지만 감시망속

지상으로 올라와 안전문 앞에 서명을 하고서야 세상으로 생환(生還)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휴대했던 문서를 경비원으로부터 되돌려받고 이젠 자유롭다고 생각하며 안내 받은 곳이 중앙 콘트롤룸이었다.

한마디로 감시실이다. 수많은 화면들이 지하 금고 주변 모든 사물과 출입자를 검색한다.

방금 설명 듣고 확인해 온 과정이 화면과 사진으로 재생되어 나오니 또 한번 당했다는 소감이다.

낱낱이 지켜보며 녹화했다니 예고없는 사생활 침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책임자는 기본 동작 이외의 사생활 부분은 수록시키지 않았으니 안심하라고 달래준다.

그러면서 사진도 화면도 대외유출이 안된다고 한다. 그 놈의 규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는 말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안내자가 주의를 환기시켜 준다.

“저 까맣게 생긴 것이 외곽감시 센서입니다. 모두 1백64개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귀하의 일거수 일투족을 저 녀석이 다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정말이지 징그럽고 정 떨어지는 소리다.

도대체 예탁원 빌딩 어느 구석이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다는 말인가.

4백여명에 달한다는 예탁원 직원들의 처량한 처지가 동정스럽다. 보람있고 처우도 후하겠지만 나는 싫다고 생각한다.

마음 놓고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근무할 수 있는 직장이 많은데 굳이 예탁원 직원으로 속박받을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한국의 국민자산, 8백조원이 넘는 금고가 탐이 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쓸데없는 욕심은 내지 않기로 작정했다.

사람은 자신의 분수대로 살아야 한다고 굳게 믿게 된 것이 사실이다. 공연히 일산 신도시에 엄청난 금고가 있다는 소문에 군침을 흘릴 까닭이 없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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