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교수컬럼]

북한 보도에 대한 반성

글 / 金東益(김동익 성균관대 석좌교수,중앙일보 고문)

북한체제 연구 취재 있었나

남북관계에 급격한 변화가 생기면서 우리 사회에 자주 쓰이는 어휘가 있다.

‘반통일적사고’ ‘보수논리’라는 말이 그것이다.

엄격히 따지면 통일반대세력은 없는 것이다. 통일을 원치 않더라도 그것을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세력’으로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문제, 통일문제를 너무 쉽게, 너무 성급하게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는 신중론을 굳이 반통일적사고, 보수논리라고 몰아친다면 그것 자체 또한 환상적 통일지상론, 또는 균형감각을 잃은 급진논리라고 지탄받을 수 있을 것이다.

큰 변화가 한가지 논리로 평가될 수는 없다. 그 변화가 제대로 수용·소화되자면 적극적 긍정론도 필요하고, 소극적 신중론도 필요하다. 이런 논리의 장(場)은 정치에서, 학계에서, 혹은 사사로운 술자리에서도 이루어지지만 매스컴이 중요한 장이 된다. 많은 논리를 국민에게 전달해줄 뿐 아니라 북한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또 통일문제를 말해주기 때문에 가장 주목할 장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미디어가 통일지향적이냐, 반통일적이냐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공통되게 안고 있는 과제와 고민이 생겨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남북문제는 통일을 최고의 가치, 최종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북한보도도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대전제로 본다면 그간의 북한보도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통일은 무엇인가.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통일을 민족적 염원, 민족감정의 결정(結晶)이라는 정서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상대방을 제대로 파악·이해해야 하고 둘째, 구체적 통일방식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선 우리가 북한을 파악·이해하는데 매스컴은 어떻게 기여했을까.

북한은 극도로 폐쇄된 사회여서 파악이 쉽지는 않지만 북한보도는 그동안 북한의 속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겉만 본 것은 아닐까. 북한사회의 본질, 북한체제의 특수체질에 대한 연구·취재는 거의 없이 북한의 암울한 측면, 조그만 내부적 붕괴조짐에는 과민했던 것이 사실이다.

북한정권의 공고성은 보지 않고 경직성만 본 것, 북한사회의 통합력은 덮어둔 채 낙후성만 지적한 것, 북한정책의 지향성은 무시하고 그 비능률성만 들추어낸 북한 보도의 폄론(貶論)체질, 감상주의는 한번 반성해 볼 일이다. 깎아내리고 낮춰 보는 것만을 정론(正論)으로 여기지 않았는지를 한번 되돌아볼 일이다.

감상적 통일접근 아니었을까

다음은 통일에 대한 인식의 문제다.

통일이란 헤어졌던 형제가 만나고, 함께 사는 것인가. 형제가 뜨겁게 만나는 것처럼 통일을 이룩하자고 한다면 너무 소박한 얘기다. 이렇게 소박하고 감상적으로 통일문제에 접근한다면 ‘가슴’ ‘뜨거운’ ‘민족’이라는 말만 앞세우게 된다.

뜨거움으로써가 아니라 냉철한 현실과제로 통일문제에 부딪쳐야 한다. 통일은 뜨거운 가슴을 맞댄다고, 민족을 부르짖는다고 촉진될 사안이 아니다.

이산가족의 만남은 인도적 입장에서나 남북교류의 첫 단초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이산가족에 대한 보도는 자칫 남북문제를 감상적으로 파악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금강산 관광 보도는 더욱 그러하다. 금강산 여행은 북한 문화를 접하는 것도 아니고 인적교류도 아니다. 북녘땅에 대한 애정표출이거나 단순한 유람관광일 뿐이다.

우리가 그랜드캐년을 여행한다고 해서 그것이 미국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고 더구나 한·미 민간교류도 아니다. 그 많은 금강산 보도는 혹시 그 여행이 남북교류나 통일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간과된 채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통일은 우리들에게 찬란한 무지개가 아니라는 인식하에서 북한보도는 출발해야 한다. 무지개는 그것을 바라보고 아름답게, 찬란하게 느끼면 그만이다. 그 느낌 속에 아름다움을 추억하고 찬란한 미래를 꿈꾸면 그만이다.

그러나 통일은 무지개처럼 떠오르지도 않고, 통일이 되었다고 해서 환호만 올릴 나날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꾸준한 인내와 엄청난 부담, 경우에 따라서는 뜻밖의 위험과 고통을 겪어야만 통일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통일을 현실적 문제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북한 보도의 ‘틀’에 결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흡수통일론의 환상이 그것이다. 통일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말까지의 북한 보도는 거의가 흡수통일방식의 잠재의식 속에서 행해졌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의 통일전선전략에 따라 남이 공산화되는 것도 흡수통일이고 북의 붕괴로 남이 북한을 흡수하는 것도 흡수통일이다.

북에 의한 흡수통일은 북의 일관된 대남전략이었고, 남쪽의 정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정부’를 지향했기 때문에 북한 보도가 이런 흡수통일을 경계하는 ‘틀’속에 있었던 것은 자의건, 타의건, 체질적이건, 논리적이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구권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된 이후 남에 의한 북의 흡수통일이 또 하나의 틀로 구축된 것은 기이한 일이다.

상황변화 특색을 짚어보자

통일 이전의 동서독 관계는 우리의 남북관계와는 매우 다르다.

분단의 동기, 분단의 상황이 다를 뿐만 아니라 서독은 동독을 껴안을 능력이 있었다.

우리는 동서독과 달리 전쟁을 치렀고 베를린 장벽 이상의 높은 벽이 너무 많았다. 남쪽은 북쪽을 감당할 경제적 능력이(서독에 비한다면) 거의 없는 상태고, 북한도 동독처럼 만만하게 흡수당할 상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하면 막연하게나마 흡수통일을 염두에 둔 것이 우리들의 북한 보도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언론의 중국 보도는 중국이 6·25전쟁 중 북한을 지원했을 때의 중국 보도와 비교해볼 때 너무 변화했다.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취재대상인 중국 자체도 개방정책을 쓰고 우리 정부도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필요했기 때문에 국교를 정상화했다. 이런 상황변화에서 중국보도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 보도도 상황의 큰 변화 때문에 대전환이 불가피해졌다. 그 상황변화의 몇 가지 특색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6·15 남북정상회담은 기존정권과는 다른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에서 가능했던 일이다. 기존의 대북정책은 그 표현이 어쨌든 간에 대북압박론이 깔려 있었고 이런 대북정책은 4강(특히 미국)의 대북정책과 호흡을 맞췄거나 그보다 강경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의 대북정책은 대북유화·포용을 근간으로 했고, 이 정책은 미국의 대북정책과 부분적으로 차질을 빚는 것이다.

두 번째 상황변화는 북한의 변화다. 북한의 외교정책은 ‘반미와 남반부적화’에서 ‘통미봉남’(通美封南)으로 약간의 전환이 있었는데 여기서 다시 ‘남북화해와 교류우선’으로 방향을 바꾼 듯하다. 정상회담에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북한은 이제 서서히 국제사회에 등장할 채비를 하고 있으며, 이는 개방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상황변화는 통일방식이 정리됐다는 점이다. 7·4공동성명을 비롯한 몇 차례의 남북합의서나 공동성명은 모두 통일을 위해 노력한다고 다짐했으나 통일의 단계·방식은 언급한 적이 없다.

그러나 6·15선언문은 제2항에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있으며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고 천명했다. 이는 통일론에서 남북한 이견(異見)을 접합시킨 것이고 통일의 단계·방식에 관한 합의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中·日간 기자교환의 경우

그렇다면 북한 보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우선은 6·15선언을 계기로 한 큰 변화의 물길을 거역할 수 없고, 또 거기에는 어려운 과제가 따르기 때문에 많은 고민이 있어야 한다. 가장 큰 과제는 편향보도의 문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편향보도의 위험성은 일본 언론의 경우로 미루어 결코 기우일 수 없다. 전후 일본의 중국 보도의 경과를 보면 그것이 우리의 앞으로의 북한 보도의 전철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중·일이 국교정상화하기 이전 정식으로 기자교환을 한 것은 64년이었다.

중국은 당시 ‘폐쇄된 사회’가 갖는 희소가치를 최대한 이용해서 서방측 언론은 조종했다. 중국에 비우호적인 보도를 하는 언론사의 입국을 거부했고 몇 가지 조건을 붙여 특파원의 상주를 허용한 것이다.

중·일 기자교환협정에 의해 중국에 특파원을 보낸 언론사는 9개사. 그러나 그들의 기사는 객관성도, 설득력도 없었으며 모든 보도가 중국 페이스였다.

이 당시 일본의 중국 보도는 일본 독자뿐 아니라 세계 언론계로부터 경멸을 받았다. “일본 언론이 중국 문제에서는 보도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했다”라고 당시의 사토(佐藤) 총리까지도 비판했지만 일본 언론계는 이에 대해서도 침묵할 따름이었다.

전시에는 군부의 통제가 있었다는 핑계로 곡필한 일본 언론이 중국 보도에서는 상식을 초월한 자기통제를 가한 것은 “우리도 중국에 특파원을 보냈다”는 격식을 갖추기 위한 것이며 결국 상업주의, 경쟁의식 때문에 곡필을 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언론비평가들은 일본 언론의 이 치욕의 역사가 기자교환 시작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기자교환협정(1964)의 당사자는 양국 신문협회였으나 접촉창구는 양측 무역상사였다. 또 이 협정에는 친중파의 두 중의원 의원이 깊이 개입해 있었다.

정치적, 경제적 동기를 가진 무역상사나 정치인의 개입으로 신문의 독립성, 자율성이 영향받지 않겠느냐는 언론계의 내부반발이 있었으나 상업주의적 대세에 밀려 협정은 그대로 체결되고 기자파견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특파원 파견이 이루어진 3년후, 특파원 3명이 문화혁명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추방됐다. ‘산케이’ 신문은 특파원 체험담을 ‘나는 추방됐다’는 제목으로 연재하려 했으나 내부의 난상토론 끝에 연재계획은 취소됐다. 이 당시 산케이신문의 내부찬반토론은 흥미롭다. 연재를 하자는 주장은 “진실을 보도하지 못한다면 특파원을 보낼 의미가 없다. 진실보도가 가능할 때가 오면 특파원을 보내게 될 것이다”, 연재반대론은 “오늘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 것이 내일을 위해 유리하다” 등이었다.

경쟁의식이 자유보도 짓밟았다

산케이 기자를 포함한 기자 3명의 추방에 대해 일본의 언론사 편집국잔 회의와 신문협회가 항의성명을 내려 했으나 이 공동성명 발표에도 곡절이 있어 결국 불발되었다. 아사히신문이 반대한 것이다. 아사히의 반대 이유는 “북경 특파원이 송고를 못하더라도 적어도 역사적 사실의 확인자로서, 또 후세를 위해서라도 특파원은 주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적 사실의 확인자로서’라는 일견 그럴 듯한 구실은 후에 많은 평자들의 조롱을 받았다. 어떤 사건이든 중국 정부의 발표때까지 입다물고 있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의 확인자일 수 있는가, 역사에 대한 위증도 역사적 사실의 확인일 수 있는 가라고 비난받은 것이다.

세 기자의 추방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는 다시 확대됐다. 이 수습에는 다시 친중파 정치인이 개입했는데 기자교환협정에 이른바 정치 3원칙(일·중 무역협정에서 중국측이 요구한 조건으로 ①중국에 대한 적대정책을 쓰지 않는다 ②2개의 중국을 만드는 음모에 가담하지 않는다 ③일·중 국교정상화를 방해하지 않는다)을 수락한다는 비밀조항이 있었다는 게 노출됐다.

이 비밀협정의 충격이 있기 몇 달전에는 아사히신문 사장과 NHK 회장이 중국에 사과문을 보낸 사건도 있었다. 이 진사 사건에도 중의원 의원이 개입됐었다. 중국측의 진사요구를 그가 전달한 것이다.

진사요구의 원인은 무엇인가. NHK가 대만을 취재, 보도할 때 거리풍경 화면에 ‘대륙반공’(大陸反攻)이라는 슬로건이 나왔다는 것이고, 아사히는 그 프로를 소개했기 때문이라는 것.

비밀협정이 사실이라면 이 보도는 정치 3원칙 제2항에 저촉되는 것이 사실이다.

언론비평가들은 대신문 아사히, 대방송 NHK가 이런 일쯤으로 중국에 사과문을 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통렬히 비난했다.

정치 3원칙을 지킨다면 중국보도는 중국찬양기사 이외에는 쓸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타사는 몰라도 우리사만은 특파원을 보내야겠다는 경쟁의식이 진실보도, 자유로운 보도를 짓밟았다고 개탄했다.

비판없는 일사불란 보도 경계

우리 언론의 앞으로의 북한보도는 일본 언론의 중국보도를 심각하게 거울 삼아야 한다.

북한은 이미 한국의 특정언론사, 특정언론인을 배척하고 있으며 8월의 언론사 사장단 방북에서 보듯 남북 언론교류에 이미 정부와 정치력이 개입돼 있다. 사장단 방북은 돌연한 계기에 정부인사가 개입했으며, 큰 흐름에 언론이 참여하기 위해 방북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앞으로의 교류는 언론 자체가 주도해야 한다.

그것은 언론의 독립성, 보도의 진실성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다.

언론교류를 스스로 주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과제가 있다. 그것은 자유세계 언론의 기능과 체질을 북측에 이해시키는 일이다.

사회주의 국가가 서방언론을 선별해서 상대하는 것은 선전정책의 전술적 측면이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회주의의 언론관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언론은 당(공산당)의 노선을 인민에게 알리는 선전 수단이며 인민의 힘을 혁명적 힘으로 결집하는 선동의 수단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이 신문원론은 북한의 언론학 교과서에도 그대로 나와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노선의 선전, 선동에 기여하지 않는 언론은 그 존재를 상정할 수 없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제1의 사명으로 삼는 것이 자유주의의 언론임을 북한측이 이해하고 수용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곡절을 겪어야 하지 않을까.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해 한국 언론은 이를 환영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나 앞으로의 남북관계 진전에 대해서는 몇 가지 우려도 표명되었다. 첫째 경제협력(대북지원)을 감당할 능력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 둘째 남북간 협의는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는 점, 셋째 가치관의 혼돈 또는 국가정체성이 훼손돼서는 안된다는 점 등이다.

이런 우려와 지적은 그것이 소수의견이든, 다수의견이든 당연히 있어야 한다. 비판없는 일사불란한 남북문제 보도는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 앞으로의 남북관계 진전을 냉철하게 관찰해야 할 사회적 장치는 언론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북한 보도는 보도의 자세 또는 보도의 역할에 관한 남북간의 판단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분란의 소지가 적지 않다. 2천년 들어 우리의 북한 보도는 그런 고난을 겪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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