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호]

停年(정년) 유감유감

글 / 柳子孝(유자효 SBS 라디오본부장)

장기근속이 직장 퇴물인가

직장인들의 꿈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년까지 일하는 것일 것이다. 정년까지 건강하게 일해서 명예롭게 퇴직하는 것. 그것이 많은 직장인들의 소망일 것이다.

입사해서 정년 퇴직할 때까지, 그 긴 시간에는 한 사람의 전 인생이 녹아 있다. 청춘의 꿈과 소망. 사랑과 결혼. 출산과 저축. 그리고 육아 등. 그 인생에는 밝고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숱한 좌절과 갈등. 가난의 고통. 가까웠던 사람과의 이별. 먼 곳에 있지 않았던 죽음. 잠 못 이루게 하던 후회의 시간들. 가을 안개와도 같이 허망한 아쉬움들.

그 많은 슬픔과 기쁨, 고통과 즐거움이 한 인간의 직장생활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숱한 곡절들을 이기고 정년을 맞아 퇴직했을 때, 우리는 그가 정년까지 견뎌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는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설령 그가 이 땅의 이름없는 숱한 민초들 가운데 하나였다 할지라도 그의 직장생활은 오늘의 우리 사회를 지탱한 힘 가운데 하나였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그처럼 많은 직장인들의 힘이 뭉쳐 이루어낸 결실인 것이다. 이것을 우리 사회는 인정해야만 한다.

그런데 직장생활의 정년을 보는 눈이 과연 그러한가? 어느 때부터인지 정년을 앞둔 직장인은 퇴물처럼 여겨지지는 않았는가?

이것은 지난 IMF 관리체제 아래서 구조조정이라는 명분 아래 숱한 직장인들이 퇴직했을 때 절실하게 가슴을 쳤던 생각이다. 정년을 몇 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은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보따리를 싸야했다. 평생 직장생활만을 해왔던 그들에게 직장 문밖의 세상은 불가측과 공포의 시공이었다.

65세 정년과 연금이라는 노후보장에 목을 걸고 박봉과 상대적 박탈감을 견뎌내오던 교원들에게도 정년 단축은 충격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지켜오던 자존심마저 내놓아야 하는 제도적 폭력이었다.

老 교사들의 조기퇴출 사연

숱한 교원들이 쫓기듯이 학교문을 나섰다. 그들을 교문 밖으로 내몬 것은 정년 단축이라는 제도적인 힘과, 기회를 놓치면 연금수혜의 폭이 줄어든다는 공포감. 그리고 얄팍한 명예퇴직금이었다. 평생을 교단에 몸바친 그들에게 그것은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런 나이든 교원들의 퇴출에는 이상스러우리만치 저항이 적었다. 집단이기주의라고 불릴 만큼 직종들의 이해에 민감한 것이 요즈음의 세태인데 늙은 선생들이 일찍 보따리를 싸는 데에는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를 않았다. 그것은 젊은 세대들이 늙은이들의 퇴출을 방관한 탓이었을까? 해직을 경험했던 세대들도 노 교사들의 퇴출은 역사의 당위라고 생각했을까?

우리 사회가 정년에 인생의 무게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정년을 셈하는 방법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정년이 만58세라고 하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 하나는 만58세까지는 일을 한다는 해석이다. 즉 만58세의 마지막 날이나 만59세의 첫날에 퇴직한다는 개념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만58세가 되면 직장을 떠나야 한다는 해석이다. 57세까지만 인정하겠다는 개념인 것이다.

말의 뜻만으로 볼 때 만58세 정년이란 58세까지는 일을 한다는 쪽으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정년을 적용하는 회사들은 그렇지 않다. 만58세가 되면 칼같이 정년을 적용해서 퇴사를 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관례화되어 있어서 그 누구도 그런 식의 적용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반면에 정년 58세를 58세까지 일한다고 해석하는 것에는 인간미가 풍긴다.

거기에는 인생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그리고 그의 직장생활에 대한 존경과 전 인생에 경의를 표한다는 의미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만58세가 되는 날, 직장을 떠나야 한다는 해석에는 서릿발이 느껴진다. 정년의 날을 초침을 보며 기다려온 서슬 푸른 칼날이 느껴진다. 거기에는 사랑이나 인간미를 찾아볼 수 없다. 단지 수학적인 계산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빨리 떠나달라고 등을 떼미는 독촉과 성화의 손길이 느껴진다.

마지막 1년을 축복해 줬으면…

당신은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당연히 사랑과 인간미가 있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 누가 자신의 퇴장을 초침을 지켜가며 기다리고 있는 조직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차이의 시간은 불과 1년이다. 그 1년을 기다려주지 못해 직장인들은 정년을 아쉽게 맞는 것이다. 수십년 직장생활의 마지막 1년을 존경과 축복, 그리고 노후에 대한 배려 속에서 맞을 수 있는 조직은 복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정년의 셈법을 정년 연령을 다 일하고 난 시점으로 계산하기를 제안한다.

내년부터 공무원들의 연금혜택이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퇴직공무원은 50세가 돼야 연금을 받을 수 있고, 이 연령을 60세까지 연차로 늦춰갈 것이라고 한다. 연금비용 부담률도 월 급여액의 7.5%에서 9%로 인상되리라 한다.

연금수혜 폭의 축소가 공무원에만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런 정책이 나온 것은 연금재정의 고갈 때문인데, 공무원들이 연금재정을 고갈시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연금비용을 부담해 왔다.

노후를 대비한다고 평생 봉급에서 일정액을 떼어왔는데 그들이 혜택을 받아야 할 때가 되자 이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정년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직장 문을 나서야 하고, 줄어든 정년을 감수해야 하고, 정년이 되는 나이가 되자마자 직장을 떠나야 하고, 연금수혜의 불이익을 겪어야 하는 현실이 슬프기만 하다.

그런 면에서 정년 문제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정년에는 예외가 없다. 누구나 맞아야 하는 인생의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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