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러브호텔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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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盧癸源 편집위원(노계원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루소의 고백록 속의 12세 소녀

18세기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 베네치아의 프랑스 대사관에 고용됐던 30대 초반 때의 일이다. 가끔 유곽출입을 하던 혈기왕성한 청년 루소는 친구와 함께 한 창녀를 단골로 삼기로 하고 ‘안심할 수 있는’ 여자를 물색중이었다.

한 어머니가 자기 딸을 유곽에다 팔아 넘기려고 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갔더니 그녀는 겨우 12세의 소녀였다. 루소 등은 이 어린 소녀에게 생활비를 내주며 그 집에 자주 찾아갔다. 육욕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같은 애착으로’ 이 소녀를 대하며 생의 즐거움과 위안을 얻었다. 그리고 ‘소녀가 다 성장한 뒤에라도 만일 그녀와 육체적 접촉을 한다면 근친간의 불륜을 범하는 것처럼 혐오를 느낄 것 같을’ 정도로 순수한 인간애로 시종한다. 그는 떠돌이 생활에서 동성애의 유혹과 강압을 받지만 강한 혐오감으로 저항했다.

‘원조교제’ ‘미성년자 매매춘’ ‘동성애’ 따위 험상스런 단어가 예사롭게 회자될 때마다 루소의 ‘고백록’ 속에 나오는 이 일화를 떠올리게 된다. 2백50여년전의 루소가 윤회의 사슬에 매어 이 시대를 산다면 어린 소녀와의 관계가 그처럼 정결하고 순박하게 유지될 수 있을까를 반문해 본다. 그 장구한 시간의 간극에서 인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토록 사람의 심성이 변하게 됐을까.

중세의 유럽에서 권력과 호사를 누리는 부류는 군주와 제후, 성직자 및 고위관리 등 귀족계급으로 한정돼 있었다. 이들의 사치스런 생활에는 막대한 돈이 필요했고, 이를 손쉽게 조달하는 방편으로 귀족의 작위를 부유한 지주들에게 팔았다. 이렇게 확장된 귀족계급은 도시를 이루고 소비문화를 팽창시켰다. 부는 향락을 위한 것이었고, 향락풍조는 유곽을 번성시키면서 그것도 모자라 간통이 ‘흑사병’처럼 만연했다.

자본주의가 창녀문화 덕분인가

경쟁적인 자유연애의 당연한 귀결로 의상과 장식품과 음식의 사치와 낭비가 광기처럼 번졌다. 사치와 낭비는 필요 이상의 과잉소비와 과잉생산 즉, 자본주의체제를 형성한다. 자본주의는 식욕과 성욕에서도 같은 양상을 빚어낸다. 사치는 개인적이고 물질적이므로 감각적 향락으로, 따라서 관능적 충동을 유발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창녀문화(성도덕의 문란)의 덕분이라고 독일의 사회학자 베르너 좀바르드(1863-1941)는 지적한다.

유럽 귀족사회의 창녀문화가 서구자본주의의 원동력이었다면 우리같은 중진국의 러브호텔은 자본주의가 양산한 창녀문화의 쓰레기통인 셈이다.

5공 초기 신군부가 대도시 창녀촌을 철거해버리자 도심에서 쫓겨난 창녀들은 변두리로 일터를 옮기거나, 술집으로 스며들어 접대부를 가장한 무허가 영업을 계속했다. 그들은 중세 유럽의 사치와 낭비의 화신이 아니라 별볼일 없는 서민을 상대로 해서 간신히 모은 푼돈마저 악덕포주와 단속공무원에게 뜯기는 애잔한 육체노동자일 뿐이다.

직업적 창녀들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특정시대, 특정사회의 퇴폐풍조와는 관계없는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에 종사해서 먹고 사는 일종의 전업근로자에 불과하다. 문제는 사회전반의 선남선녀 사이에 만연된 성도덕의 문란, 자유연애 풍조, 즉 ‘창녀문화’의 일반화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촉진된 과잉생산과 과잉소비 구조가 허영과 사치로 표상되는 물신숭배를 부추기고, 물신숭배는 궁극적으로 감각적 희열을 목표로 하며, 감각적 희열의 극치는 먹고 마시고 섹스에 향락으로 귀착한다. 대도시는 물론이고 한적한 시골 구석구석까지 파고 든 갈비집, 횟집, 양식집, 카페, 룸살롱, 마약, 그리고 요즘에 와서야 무슨 난리가 난 것처럼 뜬금없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러브호텔’ 까지가 모두 향락을 지상목표로하는 서구적 창녀문화라는 맥으로 연결돼 있다.

그런데 왜 러브호텔이 우리나라에서만 말썽인가.

체제의 못된 점만 먼저 배워

2백여년의 역사를 거쳐온 서구의 자본주의 선진국들은 그동안 도덕적 자제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이 체제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경험적으로 간파하고, 이에 따른 점진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들을 보완했고, 그러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는 마르크스의 경고도 일조를 했다. 자본주의 경력이 채 50년도 못되는 한국은 이 체제의 장점보다는 못된 단점들만 먼저 배운 것이다.

일본 도쿄의 신주쿠를 비롯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도시에는 예외없이 러브호텔들이 성업중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규정과 절도를 지킨다. 상업지역 안에 국한해서, 그것도 대로변이 아닌 뒷골목 이면도로변에서 은밀히 영업을 하고 있어 일반인의 눈에는 잘 띄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주택가에 바로 인접한 대로변에서 대형 네온사인 간판으로 온 빌딩을 장식해 놓고 요란스런 호객효과를 과시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하기야 러브호텔 업주들도 할 말은 있을 것이다. 엄연히 행정당국의 영업허가를 받았고, 자기들이 보여주는 것은 건물과 간판뿐인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들의 갖가지 퇴폐적 사태를 미주알 고주알 꾸며서까지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상매체들보다야 훨씬 공익적이고 양심적이지 않느냐는 항변 말이다.

행정기관이란 다수 국민의 위주로 공정하게 허가를 결정하고 규제하는 책무와 권한을 갖는다. 그런 까닭에 국민이 세금을 내서 조직을 유지하고,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그 공무원들이 공익을 백안시하고 돈벌이에만 협조한다는 것은 본말을 뒤집는 직무유기요,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다. 자기들은 ‘법규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은 더욱 가증스럽다. 업자들을 봐주기 위해 법규의 맹점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법은 인간이 만들고, 운영한다. 어느 것이 정의냐가 문제다. 법이 정의롭지 못하면 정의롭게 고쳐야 하며, 당장 고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선 정의롭게 해석하고 적용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요 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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