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호]

태권도의 감격

글 / 宋貞淑 편집위원(송정숙 전 장관, 전 서울신문)

베트남 소녀의 태권도 은메달

올림픽에는 감동들이 보석처럼 열린다. 지난 시드니 올림픽도 그랬다. 특히 우리나라의 효녀 선수들은 여전히 탁월했다.

우리는 으레 그러려니 했지만 외국의 경우도 그랬다. 원주민 출신의 뉴질랜드 젊은 여자선수는 자신의 메달을 자기 종족에게 바치기 위해 애쓰는 모습으로 우리를 미소짓게 했다. 태권도로 은메달을 딴 베트남 소녀의 수상식 모습도 가슴을 저리게 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은메달쯤은 다소 성에 안차하는 처지지만 그 소녀는 은메달을 하나 따고서 시상대에 오를 때 국기로 온몸을 감고 있었다. 조국에 메달을 바친 보람에 눈물을 흘리며 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것이 통일 베트남이 받은 첫 메달이라고 한다. 정작 그 나라에서는 은메달을 받은 줄조차 모르고 있다가 찾아간 기자를 통해 비로소 소식을 접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혼자서 하는 이 소녀의 비장한 시상식을 보며 2, 3년 전에 가 본 베트남의 일이 생각났다. 하노이에서는 ‘도이모이’ 정책 같은 것을 열정적으로 추진시키며 새롭게 발전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이 안쓰럽도록 역력했다. 그런 하노이를 떠나 사이공에 이르자 분위기는 좀 달랐다. 시장경제 냄새가 물씬물씬 나면서 또 다른 활력이 넘쳤다.

이동중인 우리 버스가 도심의 도로를 달리자 별안간 차 양쪽으로 아오자이를 입고 오토바이를 탄 젊은 여성들이 착 달라붙어 여러 대가 따라 오기 시작했다. 오토바이 탄 아가씨들은 그렇게 우리 차를 따라오면서 창문 안으로 연신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의 대부분이 남성들이었는데 그 남성들을 향해 “차에서 내려 따라 오라”는 신호라는 것이었다. 아가씨들은 여러 가지 손짓으로 값이랑 서비스 내용 따위를 설명해 가며 집요하게 따라왔다. 그런 수많은 여성들이 공공연하게 대로변에서 전투적 태세로 호객행위로 하고 있다는 점은 가위가 눌리게 했다.

태권도 세계화가 대견하다

방금 떠나온 하노이에서는 호지명의 유해를 안치한 묘소 기념관엘 들렀었다. 이 기념관은 종교의 성전처럼 엄숙하고 정갈했다. 호지명 샌들이라 불리는 검은 폐타이어로 만든 슬리퍼와 검정색 남성 아오자이 차림의 금욕적인 이 민족지도자가 승리를 이끌어 이룩한 이 땅에서 젊은 여성들이 벌이는 이런 전쟁은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을 품게 했다.

태권도로 은메달을 따고서 조국을 향해 외롭게 환호하는 젊은이의 모습은 가슴을 저미게 하며 사이공을 기억나게 했다. 전쟁에 발목을 잡혀서 뒷걸음을 치지 않았더라면 이 아름답고 발랄한 젊은이들이 지금쯤 얼마나 활달하고 건강했을까.

어쨌거나 태권도가 다른 나라를 위해 이런 애국소녀를 만들어냈다는 일이 대견하다. 태권도가 대견하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다. 20년 전에 가본 덴마크의 작고 조용한 도시에서의 태권도장. 독일의 쾰른 외곽 작은 시골에서 보았던 태권도 도장. 그런 도장들을 들여다볼라치면 반드시 중앙에 태극기가 걸려 있고 구령이며 동작이름이 한국어로 붙어 있다. 종교의식처럼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한국어로 구령을 붙여가며 구령을 하는 외국인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미국의 사회 저명인사들이 태권도 도복을 입고 자부심에 차서 태권도를 예찬하는 장면이 TV에 소개된 적도 있다. 아리조나의 세도나에서 만난 태권도장은 기(氣)가 그득해 보였다.

그런 태권도가 마침내 올림픽에 시범종목으로 들어 이집트에서도 아랍에서도 그리고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기량을 닦은 선수들이 우리 식 경기 용어에 따라 메달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파란 눈의 백인, 가무잡잡한 회교권 심판이 “갈려!!”하고 외치며 선수들을 갈라놓는 그 모습만으로도 경기를 보는 재미가 너무 좋았다.

대한민국에 경의를 표하고 싶구나

아직도 시범 종목인 이 태권도가 올림픽에서 오래 오래 유지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굳이 메달을 욕심내지 않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위 종주국의 이점을 살려 메달 쓸이를 한다면 드세고 콧대높은 서구국가들의 시의를 사서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으로 정착하는 일을 방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나라가 명예스러우려면 예술이나 문학으로 명성을 떨치고 고급 문화를 풍요하게 누리는 나라가 되어야지 체육이나 가지고 열을 내고 그것에 국력을 기울여가며 육성하는 일은 별로 자랑할 일이 못된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안방에 앉아 올해의 시드니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인구 5천만 밖에 안 되는, 세계에 마지막 남은 갈등의 땅. 최후의 분단국으로 오늘에 이른 우리가 거인같은 강대국들을 상대로 경기장마다에서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게 하는 일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닌’것이다.

올림픽을 응원하는 관중석에는 그것만을 위해서 자기 비용을 물어가며 일부러 찾아간 관중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현지 교포도 있지만 한국에서 우정 찾아간 단체들도 꽤 있어 보였다. 전파 매체들의 중계기술은 새록새록 개발되어 가히 첨단적인 능력이었다.

이것은 국력이다. 우리가 다 함께 땀흘려 일해서 이룩해 놓은 국력이다. 열사의 나라에 가서 품팔이도 하고 다리가 붓도록 미싱을 돌리며 일한 사람들, 자동차를 만들어 정신 없이 내다 팔고 조선(造船) 선진국을 따라잡아 ‘조선 왕국’의 자리를 넘보게까지 된 우리. 어마어마한 규모로 쇠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을 비롯하여 과감하게 이끌어온 ‘중공업 한국’, 반도체 개발 경쟁에서 앞선 자리를 지켜온 일 등 우리가 이룩해 온 국력의 총화를 시드니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웃나라 소녀선수들의 애처로운 애국 행렬을 보며 외경스런 마음으로 대한민국을 향해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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