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박(朴),이(李) 정권 한미관계 악화때 붕괴

「냉전시대의 우리 외교」 金東祚(김동조) 전외무장관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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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도끼를 땅에 묻자” 한일 본회담이 처음 열리던 51년 10월 우리측 수석대표인 양유찬 주미대사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다듬은 기조연설을 마친 다음 한 말이다. 이 말의 뜻은 화해를 제의한 것이다.

일제의 만행으로 우리 민족이 겪은 지난 일들을 접고 양국 관계의 새출발을 도모하기 위해 꺼낸 말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후 진행된 한일회담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한국외교사의 산 증인인 김동조(金東祚) 전외무장관이 그의 회고록 ‘냉전시대의 우리 외교’ 책자 속에 소개한 내용이다. 반평생을 외교 일선에서 몸바쳐온 그는 건국 초기 이승만 대통령 시대부터 박정희 대통령 시대까지 겪었던 외교의 이면사(裏面史)나 비화(秘話)를 사실에 가깝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회고록을 쓰기로 생각을 바꾼 다음 신병 요양차 미국 하와이에 머무는 동안 기억을 더듬어 자료들을 정리했다고 한다.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자료들은 옛 동료, 보좌관들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김형욱씨 만나 귀국 설득

비화도 소개

58년 4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던 제1회 유엔해양법회의에서 미국의 ‘영해 폭 3해리안’에 우리 정부가 전폭 지지하기로 했는데 당시 김용우 주영대사가 정부 뜻과 달리 부(否)표를 던지는 바람에 미국 뜻이 좌절케 된 배경, 월남의 고 딘 디엠 대통령 방한 환영행사에서 당시 장면부통령이 완전히 소외되어 별도 채널을 통해 명동성당의 아침미사에서 잠시 만난 일, 로비스트 박동선씨와 처음 만난 일, 미국의 식량차관 감축에 책임을 느끼고 외교특보직을 사임한 뒷이야기 등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는 또 주미대사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미움을 사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김형욱, 김성곤씨를 만나 이들을 설득, 귀국토록 종용한 비화도 소개했다. 김성곤씨는 얼마후 귀국, 대한상의 회장으로 일선에 복귀한 반면 김형욱씨는 “집필을 마친 회고록 영문판을 만들기 위해 시간이 필요하다”며 귀국 후 자신이 할 일등에 관해서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그때 체면이 설만한 장관자리나 도미니카에 무슨 연고가 있는지 모르지만 도미니카 대사직도 괜찮다는 등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 회고록에서는 일본에서의 김대중씨 납치사건을 박정희 대통령은 전혀 몰랐던 것으로 적고 있다. 그 날 아침 자녀들을 깨우던 육영수 여사가 한쪽 귀에 라디오 리시버를 낀 채 놀란 얼굴로 박 대통령을 깨우며 김대중씨 납치소식을 전해 대통령 자신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72년 10월 유신조치에 앞서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인 유혁인씨를 직접 미국과 일본에 파견, 유신조치의 불가피성을 알리는 친서를 받은 일, 그리고 그 내용을 회고록에 소개했다.

김 장관은 이 회고록을 통해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접하면서 느낀 그의 인물평도 했다. 그는 한일회담 막바지에 보낸 수차례의 친서, 주미대사시절 한국군 현대화 계획, 주한미군 감축문제 등 국가보위와 안보문제에 관한 일련의 친서, 그리고 10월 유신전후에 대통령의 심정을 담은 친서 등을 종합해 보면 박 대통령은 분명 민족중흥의 선구자적인 면모를 풍기는, 꿈을 가진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외무장관 재임시절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씨와 직제 문제로 격돌했던 일화도 밝혔다. 경제담당공사를 주요국 대사관에 파견, 각 부처에서 보낸 재무관, 상무관 등을 대사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직접 관장한다는 직제개편안에 대해 ‘내가 장관으로 있는 동안은 결코 안된다’며 JP와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꿈을 가진 위대한 인물

그는 회고록 말미에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노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외교 전반에 걸쳐 언제나 목적 의식이 뚜렷했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으며 뛰어난 지략(智略)도 갖고 있었다. 특히 대미외교에 있어서도 그는 미국의 주장에 무조건 추종하는 일이 결코 없었으며 자주외교의 틀을 벗어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친 고집과 정보부족으로 간혹 큰 실수를 한 적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를 테면 58년 인도네시아군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수마트라에 혁명정부를 수립했을 때 李 대통령이 반란군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돌연 성명을 발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다. 때문에 세간에서 李 대통령을 흔히 ‘외교의 귀신’이라고 평한 것은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정희 대통령은 정책의 일관성면에서는 이 대통령과 다를 바가 없으나 그의 외교의 특징은 철저히 실리를 추구했다는 점이다. 그의 외교는 오직 국가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의 재임기간 중 가장 중요한 외교사실(外交史實)은 한일국교 정상화와 월남파병을 꼽을 수 있다. 한일국교 정상화는 당시 정서적 명분론을 최대한 실리지는 못했다고 할망정 박 대통령의 실리외교가 성취한 큰 업적이라 말할 수 있다. 월남파병은 전적으로 실리외교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월남파병으로 미국의 대한방위공약을 다시 한번 확고하게 다짐받을 수 있다는 실리를 기대했던 것이다.

회고록은 마지막으로 두 정권이 몰락한 배경으로 이 대통령은 말년의 정보부족, 박 대통령은 측근의 정보차단으로 인해 총명과 예지가 흐려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하나 공통점은 두 정권 모두 말기에 한미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시점에서 붕괴됐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 글/ 申天均(신천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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