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호]

[원로회고] 온통 세상이 변했구려...

마카오 신사와 문화인들

鐵(철)의 삼각지 백병전 속에 朴仁秀(박인수) 댄스 여대생 농락

윤능선_회장.jpg

글 / 尹能善(윤능선 (주)미래사회연구원 회장)

休戰(휴전)협정 무렵의 영국제 신사

임시수도 피난시절의 3년은 어렵고 괴로운 시기라 10년은 된 듯 싶다.

그래서 한 회를 더 이 시절의 추억을 더듬어 볼까 한다. 52년경 6·25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철의 삼각지대 전투가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그러나 53년(휴전성립은 7월 27일) 휴전회담이 무르익어 가자 촌토를 뺏기지 않으려는 휴전선 일대의 공방전으로 혈전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후방에서는 차츰 휴전을 앞둔 안도감으로 사람의 마음이 다소 느긋한 감이 없지 않았다. 부산 번화가에는 비참했던 거리 색깔을 씻는 듯 소위 마카오 신사가 나타난 것이다.

포르투칼영인 마카오는 그때까지 동남아, 동아시아의 서구풍물의 집산지였다. 후에 부(富)를 누린 홍콩 전성시대의 길잡이처럼 등장했었다.

여기서 전시에도 불구하고 사치품이 수입(물론 밀수도 많았을 것이다)되고 국내 미군의 보급소인 PX와 더불어 유행 사치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도 미군 PX에서 새어나오는 군복, 군화는 군수품이지만 질이 좋은 외래품으로서 민수품으로 둔갑하여 필수품처럼 한몫 보았다.

그래서 대개의 샐러리맨들은 미군복을 곤색, 흑색으로 염색하거나 기술이 발전하여 멋지게 탈색을 해서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 가운데서 영국제 진짜 양복을 입은 신사가 나타났으니 모두가 눈이 휘둥거려지면서 이들을 그냥 마카오 신사라 했다.

6尺 장신의 멋쟁이 沈相俊(심상준)

그 중에는 젊은 경제인이 신흥 무역붐을 타고 멋쟁이로 등장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계 인사 중에서는 맨 먼저 환금장유(丸金醬油)의 심상준(沈相俊) 사장을 들 수 있다. 6척의 후리후리한 키에 쭉빠진 외제 양복을 걸치고 조끼에는 금시계 줄을 늘어뜨리고 나타났으니 우리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카오-구상무역(물물교환)-보세가공무역-그리고 정상 수입으로 발전해 온 우리나라 무역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것이다. 이때에 LG의 구인회(具仁會)씨는 독일에서 치약 원료와 기술을 담은 가방을 가지고 와 럭키치약을 만들어 공업화의 선구자로 한국재벌의 효시의 하나가 되었다.

PX물자에 물들은 한국인이 끝내는 국산 치약을 쓰게 될 것이란 선견지명은 아직도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일본의 재일동포인 ‘롯데’의 신격호(申格浩)씨가 물밀 듯 들어온 껌이 언젠가는 국산(일본)품으로 대체될 것을 예견하여 ‘롯데껌’을 개발, 사상초유의 선전, 그것도 TV 대형광고로 오늘의 신화를 만든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徐廷柱(서정주), 卞榮魯(변영로)의 酩酊(명정) 40년

정비석과 황산덕의 지상논쟁

한편 시각을 돌려 임시수도란 좁다란 곳에 모인 문화인들-작가, 문필가, 예술인들도 살기 위하여 오히려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다.

생활의 긴박성과 좁은 공간이란 특성이 상승작용하여 발휘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때의 작품이랄까 예술적 표현물이 유난히 훌륭했기 때문이다.

요즈음 미국으로 간다는 서정주(徐廷柱) 시인과 변영로(卞榮魯)씨는 명정 40년기(酩酊 40年記)란 주옥같은 시와 수필을 썼고 정비석(鄭飛石), 김동리(金東里), 박종화(朴鍾和), 선우휘(鮮于輝)씨도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여 메마른 전쟁풍도에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필자도 문화에 관심이 큰지라 전쟁 직전 문예(文藝)지의 현상 모집에 당선된 신예 여류 작가 강신재(康信哉)씨의 당선작 단편 ‘정순이’를 읽고 크게 감동한 기억이 난다. 그 후 이 분과는 어느 방송 출연에서 만나 그 때 일을 서로 나눈 바도 있다.

당시의 잡지란 몇 회만 계속되면 끝이라 ‘문예’지도 없어졌고 ‘잡지는 4호가 사(死)호라’ 할 만큼 나오면 이내 끊기고 마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김동리, 김래성(金來成) 작가들의 명작을 나중에야 읽었다.

저 유명한 일로 정비석의 자유부인(自由夫人)은 내용과 묘사가 절박한 가운데서 탈출하려 몸부림치는 인생의 단면을 날카롭게 묘사한 대학교수 부인의 탈선을 써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더구나 현역 대학교수인 황산덕(黃山德) 교수와 작가 정씨 사이의 몇 차례의 지상론박은 연재한 서울신문의 구독자를 껑충 뛰게 하였다고 한다. 문화란 좁은 고장, 밀집된 지식인 그리고 대중이란 토양속에서 자라나는 것 같기도 했다.

심상준.jpg

<심상준 (沈相俊)>?

신격호.jpg

<신격호(申格浩)>

서정주.jpg

<서정주(徐廷柱)>

정비석.jpg

<정비석(鄭飛石)>

김동리.jpg

<김동리(金東里)>

朴仁秀(박인수)의 혼인빙자 간음사건

“보호 가치없는 貞操(정조) 보호 없다”

하나, 전시 사회의 숙명이라할 무질서와 문란함은 점점 더해갔고 환도 후 4·19 혁명을 거쳐 5·16까지 온 사회는 영일이 없는 데모, 경제 사회적 혼란의 극에 치달았다.

그 하나의 상징처럼 소위 박인수(朴仁秀) 사건이란 것이 있다.

박씨는 잘생긴 얼굴에 능란한 댄스솜씨로 유명 여자대학의 학생 10수명을 유혹하였는데 버림받은 여대생의 고발로 혼인을 빙자한 간음죄란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는 공판에서 태연히 자기가 범한 여학생 중 하나도 처녀가 없었다고 뇌까린다.

이에 인산인해를 이룬 1심 공판정에서 소장(小壯)판사인 권순영(權純永) 판사는 판결이유로 “지켜줄 만한 가치가 없는 정조는 보호할 필요가 없다”고 무죄를 선고, 이 폭탄선언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아무리 사회가 어지럽더라도 사법부란 최후 보루가 무너져서야 되겠느냐, 기성세대들의 질타는 컸다.

급기야 여론의 압력으로 2심 공판에서는 유죄가 되어 영오의 몸이 된 것이다.

이때 그럴듯한 조크까지 생겼는데 박씨만 보면 다짜고짜로 어느 공파(公派)냐?고 묻는다. 요즘 자기 조상의 파까지를 아는 사람이란 없다. 그래서 머뭇거리니 당신이 정희공판가, 장로공판가 또는 인수공파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즉, 정희공파란 박정희(朴正熙公) 대통령을 일컬으고, 한참 천년성이란 종교촌을 경기 소사에 창설하여 모 고위 정치가까지 귀의(歸依)했다는 욱일승천의 박장로(長老公)를, 그리고 유명해진 희대의 한량 박인수(仁秀公) 파인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니컬한 우스개도 있었던 것이다.

南仁樹(남인수)의 이별의 부산 정거장

피난시절 겨레의 심금 울려

자조와 근심 걱정, 그리고 체념과 같은 풍조들이 5·16이후에야 비교적 참신한 군인들에 의해 일거에 숙정된 것은 이제 생각해도 평가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이 혼탁한 가운데 청량제와도 같은 것이 재계인사로서도 훌륭한 문화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건설산업의 회장인 김광균(金光均)씨는 오랜 시인이었고 주요한(朱耀翰)씨도 한국 신시(新詩)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나는 이 분들을 많은 기회에 접할 수 있었기에 매우 행복하였다.(이 이야기는 후에 기회가 닿으면 더 써볼까 한다.)

한편 오락이 없던 전시이기에 예술인들도 무대를 통해 그 존재를 과시하였다.

미진상회 아래층(2층이 대상공회의소, 3층이 무역협회)에는 충무공 기념사업회가 있어 유명한 가수 남인수(南仁樹)씨가 드나들고 ‘이별의 부산 정거장’은 당시의 히트곡이다. 깡마른 체구에도 멋진 가창으로 온 겨레의 심금을 울렸는데 그 후 일찍 돌아간 것은 피난의 추억과 함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연극계는 부산 제일의 동아극장에서 장기 상연된 ‘사랑뒤에 오는 사랑’이라는 유명한 ‘로뎅이야기’를 김승호(金承鎬)와 전옥(全玉)의 주연으로 열연하여 전옥의 눈물의 여왕이란 별명을 만들었다.

오페라도 성행하여 테너인 이인범(李仁範)과 이만섭(李萬燮)은 같은 가극에 교대로 나와 팬들이 많았는데 이인범의 섬세한 고음 바이브레이션이 절찬을 받았고 이만섭은 굵은 목소리와 남성적 기풍이 당당하여 연일 만원을 구가했다. 문화에 굶주린 풍토에서 한줄기 명맥을 이어주는 문화활동에 많은 지식인들과 대중들이 호응, 참여한 것은 전통과 우리 것을 아끼는 자연의 충정이었으리라 믿고 싶다.

강신재.jpg

<강신재(康信哉)>

김재철.jpg

<김재철(金在哲)>

이학수.jpg

<이학수(李學洙)>

指南號(지남호) 선장 출신의 金在哲(김재철) 회장

여기서 혜성같이 등장한 주인공이라 할 심상준 사장 이야기를 단편적이나마 써보고자 한다.

마카오 신사-심상준 사장은 유명한 군납장유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지만 돌출된 성품, 기지와 솔직한 태도 등으로 재계 젊은 기업인을 대표하는 존재였다. 그는 일찍이 아무도 착안하지 못한 원양어업에 투신하여 태평양 연안을 누비는 어선단을 조직하여 세계 어업계에 뛰어들었다.

개척선의 이름은 지남호(指南號)로 명명하고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참치 어업을 시작한 것이다. 미국인은 생선을 선호하지 않지만 참치만은 ‘투나’란 이름으로 바다의 닭고기라고 하여 고급식품으로 삼았다. 심 사장은 미국인과의 연대로 판로의 걱정이 없는 사업으로 융창해갔다. 그러나 고기잡이의 어려움과 각국의 연안 규제, 종업원의 가족 걱정 등 초기 원양어업의 온갖 풍상을 겪은 것은 물론이다.

이윽고 그의 사업은 성장을 거듭하여 태평로에 큰 빌딩을 짓고 신흥재벌로 재계 활동에도 적지 아니 기여하였다. 그때의 지남호의 선장의 한 사람이 오늘날 무역협회 회장인 동원산업의 김재철(金在哲) 회장이었다니 놀랄 만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김 선장의 체험담에 의하면 연중무휴로 태평양바다, 남의 나라, 남의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몇 달만에 돌아와 보니 종업원들의 월급이 끊겨, 집식구들의 생활이 말이 아닌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김 사장은 심 사장과의 담판을 벌였지만 그의 사정도 헤아려 도와주기도 하여 초기 원양어업을 궤도에 올렸다고 한다. 가히 전쟁터의 무용담에 못지 않았다. 혁명주체로 등장했던 이학수(李學洙)씨의 고려해운은 이태리와 프랑스의 공동 차관으로 들어온 중고배 때문에 고전, 실패하였다.

하지만 오늘날 김재철 회장의 동원산업은 수산대학 출신의 지혜와 현장의 경륜으로 탄탄대로를 걸어 오늘날 자랑하는 해양 한국의 대표기업이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개성상인 李庭林(이정림) 회장의 중재

전경련시절 회장이신 고 이정림(李庭林)씨에게 업계의 전망과 인물을 사석에서 물어본 일이 있다. 그는 업종 중 실패와 성공이 알 수 없어 위험부담이 크고 용기가 필요한 업종으로 금광과 원양어업을 들었다. 그리고 광업으로 성공한 강원산업 정인욱(鄭寅旭), 광덕상회(廣德商會)의 황태문(黃泰汶)씨, 금광인 대명광업의 정명선(鄭明善)씨를 들면서 그들은 모험가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도 양회공업에 투신하여 광업만은 아니지만 석회를 캐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전경련에서 심 사장은 S사장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그의 재치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기를 높이 샀고 소장파의 영수로 보았다. 전경련에 파동이 있을 때마다 S사장은 그 와중의 인물이 되었다.

5·16 이후 정치는 모두 군인이 하는 때인데 그는 항상 “민주국가의 주인은 우리들 경제인”이라고 외쳤고 어느 해는 현역 국회의원을 재계에서 공천하자는 소장 경제인들이 나타나 중립을 견지해오던 재계에 큰 파동을 일으켰었다. 재계 중진들의 신중론이 압도적이라 중용을 지켜온 개성 출신 이정림 회장, 황해도 출신 한국유리 최태섭(崔泰涉) 회장 등이 나서서 중재한 결과 태풍일과로 끝났다.

그후에도 정치자금 헌금 문제로 불씨가 남아 선거때마다 정치자금에 조건을 붙이자는 측과 정치관여를 끝까지 반대하는 측의 설전들은 우리 재계사의 한 몫으로 되어왔다.

이 물줄기가 변함없이 계속돼 온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들은 이야기지만 심 사장은 함경도 기질-끈질긴 성품이 대단하여 명문가의 이대 출신 재원을 얻고자 일참(日參)이란 끈질긴 구혼 작전으로 끝내 성공했다는 일화도 있다. 말년에 운현궁의 일부를 떼어다가 서울 성낙원(성북동 저택촌) 자기집 사랑채로 다시 지어 그 고전적 모습과 호화로움에 나도 놀란 일이 있다.

그는 우리 사무국이 어려운 일에 상의하러가 정부에 부탁이 있다고 하면 고향 친구라 할 당시 국무총리인 정일권(丁一權)씨를 전화로 불러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관·재계의 다리 역할도 재계의 투사답게 앞장서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G호텔과 B호텔파의 판유리 결전

이정림.jpg

<이정림(李庭林)>

최태섭.jpg

<최태섭(崔泰涉)>

주창균.jpg

<주창균(朱昌均)>

끝내 중후한 인품의 崔泰涉(최태섭) 승리

한창 재계에서 산업개발의 시대 업종 선점(先占)을 위해 각축전을 벌이던 때다. 기억에 의하면 크고 작은 일들이 비일비재였지만 우리도 휩쓸린 두드러졌던 두산업계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초기 철강업이다. 후에 세계적 기업이 된 포항제철이 있지만 환도 후 철강업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전의 철공장을 복구하여 열간압연(熱澗壓延) 시설을 장치한 한국철강의 신영술(申永述)씨는 선진 기술인 냉간압연(冷澗壓延)을 도입하려는 후진업체와 외자도입을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전경련은 아무래도 신공법인 냉간압연이 필요할 것이란 주제의 조사자료를 내어 본의 아니게 업계에 간접 개입할 꼴이 되었다. 회원간 경쟁은 으레 선의의 경쟁이요, 민주원칙과 자유시장 원리에 의한다는 전경련의 모토에 충실했다 할 것이다.

대세로서 승리한 주창균(朱昌均)씨의 일신제강, 권철현(權哲鉉)씨의 연합철강은 이 나라 기간산업으로서 크게 기여하였고 한국철강은 없어지는 운명을 갖게 된다. 결국 이러한 힘 다루기도 자유경쟁적 시장원리에는 하는 수 없다 할 것이다.

또 하나 유리공장의 신설에 대한 경쟁이다.

한국유리의 최태섭(崔泰涉)씨는 중후한 인격, 기독교의 독실한 신자로서 그 공명정대함에 누구나 수긍하는 바 있었다. 그러나 대한유리공업의 김봉재(金奉才)씨는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을 발판으로 병유리 공장을 증설하여 독점기업인 한국유리에 맞서려고 하였다.

인맥으로는 김 회장과 한국제일인 삼성의 이병철(李秉喆)씨와는 가까운 사이이고 한국유리는 심상준, 이한원씨 등 소장정의파(?)인 G호텔, (당시 대한제분의 이환원씨가 들어있던 그랜드호텔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또 이병철씨가 이제는 없어진 반도호텔에 입주하고 있던 때라 B호텔이라 구분하여 일전을 벌였다. 판유리는 당시 해외 수요를 볼 수 없는 시절이고 또 용광로를 연중무휴로 돌려, 스토크를 두어야 하는 업종의 실정 때문에 김봉재씨는 끝내 포기하게 되어 한국유리는 무사하였다.

산천은 옛 같은데 人傑(인걸)은 간 곳 없네

그 후일담으로 이 G호텔 건물 주인이기도 한 동광기업 조봉구(趙奉九)씨가 부산 근교인 기장에 동광판유리공장을 신설, 업계를 2분하였다.

그러나 이 공장은 먼저 말한 유리공업의 속성 때문에 부실기업이 되고 한국유리에 흡수 합병되었다. 이제는 모두가 고인이 되었기로 하나의 재계 야화로나 이야기하게 되었지만 인생도 사업도 하나의 유수와 같은 것이라 보아진다.

“산천(山川)은 의구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네”라고 한탄한 고려유신 야은 길재(吉再)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같이 인생은 짧고 또 변화무쌍하다. 튼튼한 토대의 공장이나 기업도 항상 시대에 맞게 변신해야만 되는 것 같다.

재계의 소장파로서 일세를 풍미한 왕년의 마타오 신사 S사장은 풍운아로서 그의 생애를 마쳤다 할 것이다. 그의 훤칠한 풍모, 의표를 찌르는 행동, 유수와 같은 달변, 그를 보고 수시로 변하는 모습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바로 엊그제같은 심정이니 말이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