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호]

MB 집권 3년차

진흥왕을 다시 보라

난국돌파 통일의 기반구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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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황원갑 (소설가, 역사연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말은 천 번 만 번 강조해도 부족한 만고불변의 진리다.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저버린 국가와 국민의 내일은 희망이 없다. 나라가 제대로 성장 발전하고 국운이 융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민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훌륭한 지도자의 리더십이 가장 절실하다.

출중한 자질과 탁월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를 바라는 까닭은 나라가 여전히 어지럽기 때문이다.

후발주자로 국가중흥 이끌어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3년차에 접어들건만 국정은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비록 외치(外治)에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는 해도 대북문제는 잘 풀리지 않고, 국내 정치와 경제도 여전히 불안하다. 거의 반대를 위한 반대와 다름없는 야당의 반대와 정부 여당에 대한 공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집권당이 정권 출범 초부터 2년 내내 친이(親李)니 친박(親朴)이니 하고 갈라져서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으니 이를 계속 지켜봐야 하는 국민은 눈은 매우 피로하고 머리는 심히 아프다. 이런 리더십을 두고 훌륭하다는 말은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 옛날 신라는 진흥왕(眞興王) 집권 시 고구려, 백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라는 불리한 여건을 딛고 국가중흥을 이끌었으며, 마침내 그의 위업을 바탕으로 삼한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진흥왕은 ‘준비된 제왕’이었다. 그러나 그는 재위 36년 1개월 동안 자기가 ‘준비된 임금’이란 소리는 입 밖에도 꺼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진흥왕이 처음부터 ‘준비된 제왕’은 아니었다. 천부적 자질을 타고나기는 했으나 그가 즉위할 때 불과 7세의 소년이었으므로 어머니 지소태후(只召太后)가 신라사상 최초로 섭정을 맡았다. 여기에 김이사부(金異斯夫), 김거칠부(金居柒夫), 김무력(金武力) 등 당대의 영웅호걸이 어린 임금을 보필하면서 정치 군사 양면에서 국력신장에 앞장섰다.

신라가 화랑제도를 설치, 문무에서 빼어난 인재를 화랑과 그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 가운데서 등용하기 시작한 것도 진흥왕 때였다. 그는 또한 불교를 국교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불법을 통한 국민의 교화와 민심의 안정을 도모했다. 이처럼 진흥왕은 화랑과 불교를 양대 축으로 삼아 급속한 국력신장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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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때의 영토확장>

삼한통일의 발판구축

진흥왕이 드디어 친정에 나선 것은 재위 12년째인 551년께였다. 그의 나이 만 18세. 그해 정월에 진흥왕은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다. 개국 원년엔 백제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일으켜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했다. 김거칠부를 총사령관으로 삼은 그 싸움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10개 군을, 백제는 6개 군을 점령했다. 그런데 거칠부는 내킨 김에 백제가 천신만고 끝에 70년 만에 되찾은 옛 서울 한성지역의 6개 군마저 암습하여 차지해버렸다. 분노한 백제의 성왕(聖王)은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삼국시대를 돌아보면 한강을 확보하고 지배한 나라가 최후의 승리를 차지했다. 그때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긴 이후 고구려와 백제는 다시는 이 땅을 되찾지 못한 반면, 신라는 이를 발판삼아 삼한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백제는 한성탈환이라는 눈앞의 성취에만 만족하여 신라의 음모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대비책도 없이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격이었다. 당시 신라군의 전격작전을 두고 비겁하다느니 정정당당하지 못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정치가 입으로 하는 전쟁이라면, 전쟁이란 칼로 하는 정치가 아닌가. 먼저 먹지 못하면 먹히고, 승리하지 못하면 패망하는 것이 전쟁의 원칙이다. 진흥왕은 재위 23년(562)에 가야의 반란을 진압하고, 2년 뒤 서해안의 항구 당항포를 통해 중국의 남북조와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29년(568)에는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다시 33년(572)에는 홍제(弘濟)라고 고침으로써 보다 큰 정치를 펼치겠다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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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

사후 태왕으로 추존 황제예우

진흥왕은 신라사상 최대판도의 강역을 개척하고 그 지역을 순행하여 척경비를 세우기도 했다. 사후에 황제와 같은 의미의 존칭인 태왕(太王)으로 불린 진흥왕은 재위 37년째인 576년 43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떴다. 영명한 군주 진흥왕의 일생을 되돌아보며 냉엄한 역사의 교훈과 난국이 거듭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진흥왕과 그의 치세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진흥태왕은 자신이 준비된 임금이란 소리를 하지 않았으며, 못해먹겠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실정(失政)을 야당이나 언론이나 다른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다. 국가지도자, 정치지도자는 리더십이 출중하고 탁월하고 비상해야 한다. 그래야 지도자 자격이 있는 것이다. 매사에 좌고우면하거나 우유부단한 리더십은 패망을 앞당긴다. 국정운영의 최고책임자든, 한 정파의 수장이든, 또는 기업경영의 총수든 자질이 부족하고 무능하면 나라와 회사에 손해만 끼치고, 그것도 모자라면 망쳐버린다는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질이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 비겁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 이상의 자리에 앉으면 본인뿐 아니라 국가나 기업, 심지어는 자기 가정에도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교훈이요 진리다. 천만 번 강조하거니와 국가의 최고과제는 국리민복이요, 지상목표는 부국강병이며, 백년대계는 올바른 교육이다. 그것도 요즈음처럼 시험기계나 양산하는 입시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전인교육, 자주적이며 올바른 역사교육이다. 자질이 부족하고 무능한 사람, 비겁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 이상의 자리에 앉으면 본인뿐 아니라 국가나 회사에도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교훈이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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