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하중호.

기록문화는 학문과 지식의 보고이며 지혜와 문화의 소산이다.

유네스코의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세계인이 한결같이 놀라는 훈민정음(해례본), 500년의 역사기록이며 군왕도 보지 못한 조선왕조실록, 서양 구텐베르크의 성경보다 78년이나 앞선 세계 최초 금속 활자본 ‘직지심체요절’ 등 어느 것을 보아도 전쟁의 유물이나 백성을 괴롭힌 흔적이 아닌 민족의 문화수준을 말해주는 유산들이다.

100만 백성의 피와 원성인 만리장성이나, 10만 백성을 20년이나 혹사한 파라오의 무덤인 피라미드 같은 대형 유적과는 확연히 차별화된다.

인조대왕과 사관이야기

이처럼 선조들은 우리에게 백성의 원성인 대형 토목공사인 유적보다 더 유용한 문화유산을 남겨주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인간의 지혜와 백성을 위한 지도자의 리더십까지 엿보이는 귀중한 역사서이며, 역사만큼이나 많은 일화가 전해져온다.

조선의 임금 곁에는 항상 사관이 있었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인조대왕은 사관이 사사건건 쫓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하루는 대신들에게 “저 방에서 회의할 것이야”라며 사관을 따돌렸다. 사관이 마마를 놓쳤지만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까지 찾아왔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라며 짜증을 냈지만, 사관은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대로 적었다. 인조는 그 사관이 너무 괘씸하여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양을 보냈다. 그랬더니 다음에 온 사관이 또 그 사실을 적었다.

임금도 못 본 500년 실록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사관은 종7품~종9품 사이로, 지금 제도로 보면 높아야 사무관 정도이다. 그러한 직급이 감히 왕을 사사건건 따라다니며 적었고, 흘려 적은 것을 정서한 것이 ‘사초’다. 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편찬위원회가 구성되고 4부가 출판되었다. 사람이 쓰면 더 경제적이겠지만, 정확성을 위하여 큰 비용을 들여 굳이 목판이나 금속 활자본을 만들었다. 이렇게 조선왕조실록이 탄생한다. 문제는 공정한 기술 여부일 것이다.

세종이 등극 후 아버지 태종의 실록을 보고 싶었다. 맹사성이 간했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보시면 사관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기술을 못 합니다” 세종이 참았다. 몇 년 후 또 보고 싶어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거울삼아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이번에는 황희 정승이 나섰다. “마마께서 보시면 다음 왕도 또 다음 왕도 보려 할 것이니, 마마께서 보지 마시고 다음 왕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이것을 세종이 들어주었다. “네 말이 맞다.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고 누구도 볼 수 없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해 보았더니,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합리적인 정치와 리더십

문제는 왕도 못 보니 그 누구도 볼 수 없었다. 힘들게 왕의 행적과 모든 정치상황을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이나 쓰다니 누구를 위하여 또 누구에게 보이려는 것인가? 이것은 임금과 신하들이 백성을 위하여 합리적인 정치를 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되었고, 임금의 왕도와 리더십을 형성하는 배경이었다.

그리고 먼 훗날 후손인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쓴 것이리라. 당파싸움만 하며 소일하다가 500년 만에 망한 형편없는 조선이 아니라 500년이나 유지한 대단한 왕조의 노하우가 여기에 있다. 군왕도 못 본 책,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의 보물만이 아닌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인류의 보물이며 기록유산이다.

이처럼 어렵게 기록된 실록을 왕들이 보지 못해, 선대왕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후대 왕들이 알게 하려고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쓴 또 다른 기록유산을 남긴다. 왕의 공식 업무와 일상을 500년간 정리한 승정원일기와 왕의 일기인 일성록(日省錄)이 그것이다. 이 또한 세계사에서 보기 힘든 기록이며 나라가 망한 1910년까지 썼다.

문화민족의 기록유산

이러한 기록의 리더십은 문화수준을 말하며 왕실만의 관행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은 사선을 넘나드는 해전을 치르며 매일 일기를 썼다. 지구상 어느 전쟁영웅이 전투를 치른 날 밤 부하들을 잠재우고 등불 앞에 홀로 앉아 일기를 쓰면서 전략 수립에 고심한 장군이 있었을까?

전쟁 중 최전선에서 일기를 매일 쓴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절대 불리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는 포성 속에서도 스스로의 절제와 수련을 통한 인격적 승화로 탁월한 리더십을 보인 감동의 기록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77호(2014년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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