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9월 15일 계묘. 맑음. 조수(潮水)를 타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기를, 병법에는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을 지키면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지금 우리를 두고 이름이라, 너희 여러 장수가 조금이라도 영을 어긴다면 즉각 군율대로 시행하여 작은 일일망정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엄중하게 다짐을 받았다. 이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어떤 신인(神人)이 지시하면서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크게 이기고, 이와 같이 하면 지게 된다는 꿈이었다.

여든 노모 생각하며 밤을 지새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난중일기(亂中日記)’의 한 대목이다. 정유년은 선조 30년(1597)이고 음력 9월 15일은 저 유명한 명량해전 바로 전날이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진중에서 쓴 일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선조 25년(1592) 임인년 정월 초하루부터 공이 순국한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 무술년 11월 17일까지의 기록이다. ‘난중일기’ 초고본은 모두 8책으로 국보 76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난중일기’는 이따금 날짜를 건너뛴 부분도 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투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거의 빠짐없이 기록된 전쟁일기로서, 임진왜란의 전개 과정은 물론, 인간 이순신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난중일기’에는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선의 하루하루, 쉴 새 없이 벌어지는 왜적 함대와의 전투 등 전쟁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나라와 겨레의 참상을 걱정하는 불타는 애국심, 팔순 노모의 안위를 염려하는 지극한 효심, 부하 장졸을 때로는 너그럽게 포용하고 때로는 엄하게 다스리는 최고사령관으로서 추호도 사심 없는 신상필벌의 자세 등 지도자가 갖춰야 할 탁월한 통솔력까지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을미(선조 28 : 1595년) 정월 초하루. 맑음. 등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나랏일에 생각이 미치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또 병드신 팔십 노모를 생각하며 근심으로 밤을 새웠다. 새벽에 여러 장수 및 각급 군사들이 와서 해가 바뀐 인사를 했다.”

임란과 이순신 연구에 가장 귀중한 사료


국난극복의 생생한 교과서요 국민필독서라고 할 수 있는 ‘난중일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순신의 뜨거운 나라와 겨레 사랑, 지극한 효성을 되새겨 본받고, 오늘의 난국을 헤쳐나가는 의지와 용기와 지혜를 얻자는 뜻에서다.
이순신은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54년의 길지 않았던 일생을 보내는 동안 온갖 고난 속에서도 오로지 충효인의와 애국애민정신으로 일관한 우리 민족사의 대표적 위인이다. 전쟁에 임해서는 필승의 신념과 비상한 전략전술로 백전백승한 불세출의 명장 이순신, 그는 마지막 싸움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고 고귀한 목숨을 바칠 때까지 지극한 충성심으로 헌신했고, 극진한 효성심과 자애로움을 다했으며, 부하들을 너그럽게 감싸주고 창의력을 길러주며 참다운 삶의 길을 제시해준 겨레의 큰 스승이었다.
이순신은 인종 1년(1545) 3월 8일(양력 4월 28일)에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 건천동은 지금 중구 인현동1가의 한가운데이고, 그 이웃은 오늘의 필동2가인데 그 동네에선 이순신보다 세 살 위인 서애 유성룡이 자라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난 두 소년은 곧 벗이 되어 자주 어울려 놀았다. 뒷날 이순신을 장수로 천거한 유성룡(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이렇게 썼다.
“순신은 말수가 적고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얼굴은 수려하면서도 근엄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가슴 속에는 대담한 기운이 있어서 한 몸을 버리고 나라를 위해 갔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온 결과라고 하겠다.”

어려서부터 장수되는 것이 꿈

이순신이 어렸을 때 그의 부친은 가세가 곤궁하여 현재 충남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현충사 자리에 있던 처가로 낙향했다. 이곳에서 8세부터 32세에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으니 아산은 그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형을 따라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했으나 이순신의 꿈은 어려서부터 장수가 되는 것이었다. 20세 때 상주 방씨와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고, 선조 9년(1576)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니 그 해에 32세였다. 훈련원의 미관말직부터 시작하여 함경도 국경지대에서 근무하던 이순신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올곧은 성품 때문에 시기와 모함도 많이 당했고 파면과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예나 이제나 재주라고는 남을 헐뜯고 시기하는 소인배들은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조판서로 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대사간 유성룡을 통해 한 번 만나자고 전해왔다. 율곡은 동성동본으로 나이는 이순신보다 9세 위였지만 항렬은 19촌 조카뻘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나와 율곡은 집안간이니 못 만날 것도 없지만 그가 판서로 있는 동안은 만나는 것이 옳지 않다”면서 끝내 만나지 않았다. 이순신이 비로소 정3품 당상관인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줄여서 전라좌수사가 된 것은 그의 나이 47세 되던 선조 24년(1591) 2월. 임진왜란 14개월 전이었다.
그 이듬해 4월 14일,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마침내 조선침략을 시작했다. 100년간의 내전으로 단련된 데다가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쳐들어온 왜군은 20여 만, 700척의 전함과 1만 명의 수군은 별도였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없이 무인지경을 가듯 북상했고, 5월 17일에 급보를 받은 조정은 당대의 명장이라는 이일과 신립을 보냈으나 대패했다. 선조와 조정은 급히 서울을 버리고 개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란을 갔다. 6월 2일에 서울이 함락되고, 13일에는 평양마저 점령당했다.

육군은 지리멸렬, 이순신의 수군만 연전연승

하지만 이순신의 수군만은 달랐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부터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화포와 화약, 군량을 비축하고 거북선을 만드는 등 대비하고 있던 이순신은 그 해 5월 7일부터 시작된 옥포해전, 5월 29일부터 시작된 당포해전, 7월 8일의 한산대첩, 9월초의 부산포해전 등에서 연전연승하면서 적선 200여 척을 격침하는 대승을 거두고 80% 이상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군과 달리 수군은 이순신의 함대만 만나면 연전연패한다는 보고를 받은 풍신수길은 “조선수군을 만나면 싸우지 말고 도망치라”면서 대대적인 전함 건조를 지시했다.
이순신이 조선 수군의 총사령관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것은 1593년 8월, 49세 때였다. 그러나 명나라까지 끼어든 강화회담으로 전황은 소강 상태에 빠져 있다가, 4년 뒤인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직후 이순신은 왜군의 간계에 말려든 멍청한 조정에 의해 임금을 속이고 싸우라는 명령을 어겼다는 누명을 뒤집어쓴 채 파직당하고 서울로 잡혀 올라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목숨만은 건져 의금부에서 풀려 났지만 백의종군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난중일기’는 그 날의 일을 이렇게 썼다.
“정유 4월 초1일. 맑음. 옥문을 나서게 되어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으로 갔다. 봉·분·울과 사행·원경과 한 방에 같이 앉아서 오래 이야기했다. 지사 윤자신이 와서 위로했다. 비변랑 이순지가 찾아왔다. 슬픔이 더해짐을 이길 수가 없었다. 윤 지사가 돌아갔다가 식사 후에 술을 가지고 다시 왔다. 기헌도 왔다. 정으로 권하며 위로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양할 수 없었다. 억지로 마셨더니 몹시 취했다. 이순신(동명이인)이 술병을 차고 또 왔으므로 함께 취하며 간담했다. 영의정(유성룡)이 종을 보냈고,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찬성 김명원, 참판 이정형, 대사헌 노직, 동지 최원, 동지 곽영 등이 사람을 보내 위문했다. 술에 취하여 땀이 몸을 적셨다.”

백의종군하다 다시 통제사에, 전멸한 수군재건

무등병으로 강등당한 이순신은 금부도사에게 끌려 원수부가 있는 합천 초계로 내려갔는데, 도중에 순천에 피란 갔던 83세의 노모가 배를 타고 올라오다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왔다. 참으로 무심한 하늘이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시신을 집으로 모셨으나 조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는 금부도사의 재촉에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합천으로 떠났다. 당시의 비통한 심경을 ‘난중일기’는 이렇게 전한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이미 죄를 얻었고, 어버이에게 효도를 하려 했건만 어버이마저 먼저 가버리셨구나. …오호라! 천지간에 나 같은 운명이 또 있으랴! 차라리 일찍 죽는 것만도 못 하구나.”
그 사이, 후임 통제사 자리에 올랐던 원균이 7월 14일에 칠천량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신도 전사했다. 이순신이 피땀 흘려 육성한 조선수군이 하루아침에 궤멸해버린 것이었다.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빠지자 선조는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불타고 부서지고 남은 배는 겨우 12척, 그리고 9명의 장교와 그보다 적은 6명의 병사뿐이었다. 겨우 120명의 군사와 무기를 수습했더니 조정은 바다를 포기하고 육지에서 싸우라고 했다. 수군을 없애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이순신은 비장한 결의를 담은 장계를 올렸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수군을 폐지하면 적이 바라는 바로, 적은 호남을 거쳐 쉽게 한강까지 진격할 것입니다. 오직 그것이 두려울 뿐입니다. 비록 전선이 적으나 신이 아직 살아 있으므로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계해전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 명량대첩

그해 음력 9월 16일 울돌목에서는 동서고금을 통해 전무후무한 바다의 대혈전이 벌어졌다. 왜적은 133척의 대함대인 반면 조선수군은 겨우 13척, 게다가 전멸하다시피 대패한 뒤라 장졸들의 사기도 엉망이었다. 이순신은 겹겹이 포위한 적선들을 뚫고 손수 활을 쏘고 영기(令旗)를 휘두르며 독전했다. “안위야! 네가 군율에 죽겠느냐? 도망치면 살 줄 아느냐?” “김응함아! 너는 중군으로서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네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싸워서 우선 공을 세워야 하리라!” 죽음을 무릅쓴 이 같은 악전고투 끝에 적의 대장선을 비롯해 왜선 31척을 격침하자 남은 적함은 뱃머리를 돌려 도주했다. 참으로 기적적인 대승이었다. 이로써 울돌목을 거쳐 서해로 북상, 서울을 포위하려던 왜군의 기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조선수군은 재기의 발판을 더욱 튼튼히 다져 임진왜란 승리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 일시 고군산군도로 진을 옮긴 이순신은 격전의 피로가 쌓여 여러 날을 앓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아산 본가에서 21세의 막내아들 면이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본가가 잿더미로 변했다는 비보를 받는다. 이순신은 병석에 누워서도 이렇게 썼다.

▲ 필자 황원갑

“정유 10월 14일. …저녁에 어떤 사람이 천안으로부터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는데, 개봉도 하기 전에 뼈와 살이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대강 겉봉을 뜯고 열의 편지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면이 전사한 것을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박정함이 어찌 이와 같은가! 간담이 타고 찢어졌다. 네가 죽고 내가 사니 이런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느냐? 천지가 캄캄하고 백일(白日)조차 빛이 변하는구나. 아아,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영특한 기질이 범속하지 않기에 하늘이 세상에 머물러 있지 못하게 했느냐? 내가 지은 죄로 화가 네 몸에 미쳤느냐? 이제 내가 세상에 있은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란 말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너의 형, 너의 누이, 너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목숨을 이어가기는 하지만,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서 소리쳐 울 따름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79호(2014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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