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한국은행·조선은행 거쳐 새로 탄생

▲ 구 한국은행(조선은행)

한국은행은 1950년 설립 이후 64년이지만 1909년에 설립된 구 한국은행을 뿌리로 계산하면 100년사가 넘는다. 구 한국은행은 1909년 11월, 일본 통감부와 대한제국 간 협정에 따라 한국은행으로 설립됐다. 구 한국은행이 설립되기 이전에는 일본 제일은행이 돈을 찍는 발권업무와 국고(國庫) 수납업무를 대행했다.

6.25 2주전 발족 업무개시
한국은행의 수난사
구 한국은행·조선은행 거쳐 새로 탄생

구 한국은행·조선은행 거쳐 한국은행

구 한국은행이 한일합방 뒤 1911년 8월 1일 조선은행법 제정으로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어 중앙은행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태평양 전쟁기간에는 은행권을 남발하여 일본의 전비조달을 지원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미군정이 법령을 통해 조선은

▲ 초대 구용서 한국은행 총재

행에 발권, 국고업무 및 대외지급 준비자산 보유, 시중은행에 대한 재할인 등 중앙은행 고유 업무를 부여했다. 그러나 해방공간의 극심한 인플레의 요동으로 중앙은행 역할을 다 할 수 없었다.
패전으로 일본인들이 급히 귀환하면서 주요 산업체는 가동을 중단하고 국토의 분단으로 남북경제의 보완관계도 일시에 붕괴됐다. 여기에다 해외동포들의 귀환과 북으로부터 내려온 피난민들로 조세징수 체계가 뒤흔들렸다. 결국 조선은행은 통화증발로 막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려야 했다.
미군정 당시 중앙은행은 조선은행법이 그대로 준용되고 조선식산은행령과 저축은행령 등 일제하의 금융법 체계가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6.25 2주일 전 한국은행 업무개시

오늘의 한국은행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중앙은행법 초안이 마련되어 정부·국회 및 미경제협조처(ECA) 건의로부터 탄생했다. 당시 재무부가 이 중앙은행법 초안을 기초로 재정금융위원회를 설치하여 정부안으로 작성했다.
그러나 미비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논리로 1949년 6월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 전문가 파견을 요청하여 1950년 2월에야 중앙은행 개편안을 확정, 정부에 제출했다. 곧이어 정부가 국무회의를 거쳐 국회에 상정하여 통과된 후 5월에 공포하여 6월 12일부터 업무를 개시했다. 이때가 바로 6.25 남침전쟁 2주일 전이었다.

▲ 1950년 7월 22일 발행된 최초의 한국은행권 100원권과 1000원권

초대 구용서 총재와 조선은행 공채생들

한국은행사에 따르면 한은 설립위원장은 당시 최순주(崔淳周) 재무부장관, 부 위원장은 조선은행 총재 구용서(具鎔書), 설립위원은 김도연(金度演) 의원, 윤영선(尹永善) 농림부장관, 전용순(全用淳) 대한상의 회두(會頭) 등 8명, 간사는 송인상(宋仁相) 재무부 이재국장, 조선은행 조사부장 장기영(張基榮)씨가 맡았다.
한국은행 설립 후 초대 총재는 구용서 조선은행 총재가 그대로 승계했다.
초대 구용서 총재는 1899년 경남 동래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경무사(警務士)의 아들로 태어나 동래보통학교에서 곽상훈(郭尙勳) 전 국회의장, 홍성하(洪性夏) 한국은행 설립위원 등과 함께 공부했다.
그 뒤 일본유학으로 동경고상(동경상과대학)을 졸업하고 1924년 4월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추천을 통해 조선은행에 특채됐다. 초임시절에는 조선은행 동경지점에서 근무했지만 나중에 서울본점으로 옮겨 1936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본점 지배인 대리로 승진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조선인 공채를 재개하여 많은 금융인을 배출했다.
1933년 조선은행 공채생은 박두병(朴斗秉) 전 두산그룹 회장, 김상영(金尙榮) 전 국회의원, 이호상(李豪商) 전 조흥은행장, 이의두(李義斗) 전 한일은행 상무 등. 1934년에는 백두진(白斗鎭) 전 국무총리, 장기영 전 경제기획원장관, 박수희(朴璹)熙) 전 농업은행 총재, 1935년에는 김영찬(金永燦) 전 상공부장관, 문상철(文相哲) 전 조흥은행장 등이 공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대 한국은행 총재도 조선은행 공채생 가운데서 많이 나왔다.
초대 구용서 총재를 비롯하여 김유택(金裕澤·2대) 유창순(劉彰順·6대), 민병도(閔丙燾·7대), 김세련(金世鍊·9대), 김성환(金聖煥·11대), 신병현(申秉鉉·12대) 등.

6.25로 한국은행 금괴 뉴욕으로 피난

한국은행은 설립 2주일 만에 6.25를 만나 혼비백산한 지경이었다. 6.25 당일은 일요일이라 구용서 총재 등은 종묘(宗廟)행사를 참관하고 최순주 재무부장관은 상공·농림장관 및 ECA처장 등과 제주도를 시찰하고 있었다.

▲ 6.25 전쟁 당시 폭격당한 한국은행의 처참한 모습

인민군 남침 급보에 놀라 낮 11시에 경무대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주재 비상 국무회의가 열리고 미국 대사관에서는 각종 문서 소각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당일은 휴일이었지만 전쟁소식에 예금인출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한국은행은 전비조달 관련 국고금 관리가 비상이었으며 지금은(地金銀) 긴급반출도 위급했다. 전쟁 이틀 6월 27일, 국방부 제3국장인 김일환(金一煥) 대령이 금괴반출을 협의 독려했다. 곧이어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송요찬 헌병사령관에게 지시하여 헌병대 20명이 트럭을 몰고 왔다.
4톤 반에 달하는 한은 지금은(地金銀)은 진해 해군 창고로 임시 보관했다가 이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경주박물관의 국보와 함께 미국으로 이송했다. 한국은행 금은 150만 달러, 경주박물관 국보는 100만 달러의 보험에 가입하여 미국으로 피난했다. 금은 뉴욕의 연방준비위에 보관했다가 뒷날 IBRD와 IMF 가입시 출자금으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0호(2014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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