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여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돌연사는 아니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버지는 혈압도 높은 편이었고 고지혈증이나 동맥경화가 있어 늘 조심스러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그저 그런 병이 있나보다 싶었고 병명에 대해서 골똘히 생각해 봤다거나 진심어린 염려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영안실에 도착해서도 우두망찰했을 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자 그제야 천천히 받아들여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아버지를 이제 영영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생활수필]

세월지나 철들고 나서
아버님의 기일(忌日)

여성 친화적 아버지의 삶

필자는 서울 용산구 용문동에서 태어났다. 친정아버지의 직업은 건축설계사였다. 그 시절 아버지는 설계뿐 아니라 건축자재 수입이라든가 집에 관한한 모든 것을 관여했다. 현실적으로 남다른 사업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한 셈이었다.
아버지는 설계사무소장이라는 직함 외에도 불리어지는 별호가 시시때때로 달랐다. 아버지의 친구들 간에는 변호사, 어려운 일을 당한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해결사, 잔칫날에는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가수... 그런가 하면 한 번 본 사람을 기필코 팬으로 만들고 마는, 어찌 보면 상대방 스스로가 팬이 되기를 자처하는 고도의 친화적 기술도 갖고 있었다. 게다가 필체가 좋고 순발력이나 기지가 뛰어나 죽은 이를 위한 만장을 써 주기도 했는데 명실공이 일필휘지라 보는 사람마다 혀를 내두르는 지경이었다.
특별히 여자에 대한 철학과 지론이 파격적이었다. 아버지는 여자와 자동차를 동일시했다. 기름이 채워지는 만큼만 움직이는 차와 여자는 똑같은 원리라는 논리였다. 굳이 그런 기발한 발상이 아니더라도 팔척장신에 옹골차기까지 한 아버지는 남자로서의 장점을 두루두루 갖추었으나 아버지를 흠모하는 장안의 여자들에게 물심양면 기름(?)을 넘치도록 퍼부어주었으니 ‘아버지의 여자’이기를 소망한 그네들의 숫자가 나날이 늘어났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아버지의 여자’ 셋과 다자녀

안 할 말로 (그래서야 안 되겠지만) 다른 남자들 같으면 불륜으로 인한 상대의 임신을 안 순간 본인의 능력에 맞게 얼마간의 금일봉을 쥐어주며 조용히 해결할 것을 신신당부함과 동시에 이별을 통보할 텐데 아버지는 반대였다. 임신을 확인하는 순간 집안으로 들어앉혔다.
주변 여자들의 열망과 아버지의 세기적인 휴머니즘이 조화를 이루어 급기야 세 여자를 거느리고 살게 되었다. 생각하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본가를 중심으로 두 채를 앞뒤 쪽으로 나란히 지어놓고 당당하고도 염치없는 행보를 계속했다.
하나 둘... 둘째, 셋째집의 동생들이 늘어날 때마다 아버지에게 말할 수 없는 회의를 느꼈다. 집으로 오가는 길에 행여 아버지와 부딪칠지도 모른다는 거부감이 들어 의식적으로 주변을 살피며 걸어 다녔다. 정말로 언젠가는 마주 오는 아버지를 못 본 척하려고 땅만 보고 걷다 전봇대에 이마를 부딪쳐 퉁퉁 부어오른 적도 있었다. 또 언젠가는 아버지와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난 후 숨이 멎을 듯한 급체로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었다. 그렇듯 아버지는 상대하기 어려운 낯선 어른이었고 껄끄러운 존재였다.
한쪽 발에는 고무신을 신고 다른 한 쪽 발에는 굽 높은 구두를 신은 듯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작은 어머니들과 친 자매처럼 지내는 어머니의 처신도 못 마땅했고 필자와 동갑인 여동생과 같은 고등학교 같은 학년이라는 사실도 어처구니없었다. 어른들의 일이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 투성이였다.

9남매 호적 들통나 입사꿈 산산조각

애증이 엇갈리는 생활이었다. 대학을 졸업했다. 절실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과 동기들과 의기투합해 ㅇㅇ항공사의 계열사인 ㅇㅇ개발에 입사시험을 치렀었다. 운이 따라주었음인지 최종합격했다. 남은 건 서류였다. 신입사원이 갖추어야 서류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호적등본이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호적등본이 내심 걸렸다. 본적지인 용산구청에 뛰어가서 호적등본 한 통을 떼어 확인해 보았다. 부모 란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함자가 그대로 쓰여 있었다. 그런데 자녀 란에는 필자의 어머니가 낳은 삼남매 사이사이에 딸 다섯에 아들 넷, 구남매가 앞 다투어 끼어 있었다. 7남매 8남매도 흔한 시절이었으니 하나 더 많다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치자, 다만 아쉬운 대로 1년씩이라도 정상적 터울을 유지해 주었으면 좀 좋았으련만 6개월 차이인 필자와 여동생, 몇 년 밑에 또 같은 해인 남동생들 둘이 곧이곧대로 올라 있었다. 치욕적인 가계도를 여지없이 들통 내는 서류였다.
구남매의 이름자 위로 심사하는 임원진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호적등본에 기재되어있는 자녀들의 수를 헤아려보다 혹은 눈여겨보다 서로 돌려보며 웃음거리가 될 것을 생각하니 참을 수 없었다.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는 상상만으로 소름끼쳤다. 툭툭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로 얼룩진 호적등본을 갈가리 찢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세월이 흘러 용서 빌며 보고싶어

꿈이 있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참 많았었다. 그러나 어디어디에 입사해서 이러저러하게 활동해 보겠다던 야심찬 꿈이 무너져 내렸다. 어이없고 허무한 순간이었다. 호적등본이 가져다준 악연은 필자를 죽음직전까지 내몰았고 그 뒤로 다시는 헛꿈을 꾸지 않았다.
아버지로 인해 연좌(連坐)의 희생양이 되었다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그럴 즈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바람에 몰려 초목이 쓰러지듯 파란만장한 일생을 굵고 짧게 마무리한 아버지의 나이 59세였다. 아무런 준비 없는 이별이었다.
아버지와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외국어도 아니고 어려운 받침이 있는 말도 아니었던 아버지... 여태까지

▲ 필자 김숙

가장 발음하기 힘들었고 마음으로부터 허락되지 않았던 아버지...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불러 본 적 없었던 아버지를 절실하게 불러봄으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싶다. 어떤 아버지였음은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족하고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다 된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 미워했던 만큼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꿈길 밖에 길이 없다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노랫말에서처럼 꿈일망정 아버지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내일이 아버지의 기일이다.
기타를 메고 아버지를 찾아 가 아버지의 가장 가까이에 앉아서 옛날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임성훈의 시골길”이라는 노래를 목청껏 불러드리다 와야겠다.
그래, 꽃도 사야지······.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0호(2014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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