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호]

정치와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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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태평양위원회 이사장)

“정치가 잘못돼 있으니 사업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정치가 썩는 것이 돈 때문인데 돈은 내가 벌어서 가지고 있습니다. 김 교수, 우리 의형제가 되어 손잡고 이 나라의 정치를 한번 바로잡아 봅시다”

1992년초의 어느 추운 겨울날,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평창동의 어느 산장에서 내 손을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한 말이다. 14대 총선을 두달 쯤 앞에 둔 절박한 시점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김 교수, 대통령 후보로는 인기가 좋은 사람이 나가야 하는데 인기야 김 교수를 당할 사람이 있나요. 우리 당의 대통령 후보는 김 교수가 돼야 합니다.”

나는 그 말에 대해 “그럽시다”라고 말한 적도 없고 “그렇게는 안됩니다”라고 대답한 적도 없고 다만 유구무언이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3김 낚시론’을 어느 일간지에 발표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본인이 어찌 감히 그런 허망한 생각을 하였겠는가. 그리고 그때 나이도 대학을 퇴직할 만큼 많이 먹었는데 나보다 젊은 후배를 밀어줄 뜻은 있었지만 나 자신이 대통령 후보가 되어 출세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처지였다.

그런데 그 해 3월의 총선에서 지역구에 27명이 당선되었고 거기에 전국구 7명을 합치니 원내에 34석을 차지하는 탄탄한 군소정당이 된 것 뿐 아니라 5월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무소속에서 그리고 여당이던 민자당에서도 여러 의원이 합류하여 정주영씨가 만든 통일국민당은 문자 그대로 깃발을 날리는 정당이 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 대표는 자신이 출마할 뜻을 굳혔을 것이다. 어쨌건 그런 어느 날 새벽 나와 단둘이 만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 교수, 이번 대통령 선거에는 내가 나가야겠어요. 나는 나이가 많아서 이번 밖에 기회가 없지만 김 교수야 다음 번에 출마해도 되지 않아요”하며 65세나 된 나를 밀치고 76세이던 그가 출마한 것이었다. 그 뒤의 일이 어떻게 됐다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인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14대 대선이 끝나고 정 대표와 통일국민당은 대통령 당선자인 김영삼씨로부터 호되게 당하는 불쌍한 노인이 되었는데, 그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럴 만한 과거가 있었던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김영삼씨가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 공천을 따내면 그를 밀어주겠다는 확약을 하고 나서 정 대표 자신이 출마를 했으니 김 대통령 당선자가 화가 났을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당국은 정 후보가 회사 비자금을 유용하여 선거 비용으로 충당한 것은 명백한 범법 행위라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검찰에 불려도 가고 일이 잘못되면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가 선거에 뿌린 수천억도 따지고 보면 자기가 번 돈인데 그는 제돈 쓰며 정치판을 누비다가 결국 남의 돈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밀려 그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어찌 보면 남의 돈으로 정치하는 사람들이 제 돈으로 정치를 해보겠다던 조국 정치사의 최초의 인물을 때려눕힌 것이었다. 모르긴 하지만 앞으로 통일국민당 같은 정당은 다시는 생겨나지 못할 것만 같다. 만일 집권을 했으면 정 대표도 마음이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지만…

오늘 우리가 아는 정치는 돈 없이 불가능하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일본이나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정치인은 어느 나라에서나 돈 때문에 성공도 하고 돈 때문에 실패도 한다.

정치판에 나서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려면 돈 없이는 안된다. 1백명을 모으려면 그만한 돈이 필요하고 2백명을 모으려면 또 그만한 돈이 든다. 교통비도 돈이고 식사대도 돈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인은 남의 돈으로 사는 사람들이라 돈을 잘 쓰는 것도 사실이다.

제가 피땀 흘려 번 돈을 마구 쓸 수는 없지만 남이 번 돈을 쓰는 사람은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

뇌물로 받은 돈이 헤프게 쓰이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오늘 금융계가 벤처기업가라는 젊은 친구들의 수천억, 수백억 부정대출로 술렁이고 있는데 그 배후에 정치인이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정치인이 끼여들지 않고는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질 수 없고 정치인들, 특히 여권의 정치인들이 개입된 금융사고는 대개 적당한 선에서 무마되게 마련이다. 제 돈으로 정치를 했다고 여겨지는 정치인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물론 소속 정당을 위해서는 모금도 하였겠지만 그는 연봉 10만달러를 고스란히 고아원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지난 7월에 작고한 일본의 사이또 에이자므로(劑藤堂三郞)라는 정치인은 경제신문의 기자로 출발하여 평론가로 맹활약을 하다가 정치에 입문, 자민당의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3번 당선, 참의원 의원으로 18년을 근무하면서 한때 과기처 장관 자리에 앉기도 하였다.

3회 선거에 자기 돈 14억엔(우리 돈으로 1백40억이나 될 것이다.), 사무실 유지비로 11억엔 합계 25억엔을 정치판에서 날렸다고 한다. 그는 평론가 시절에 입수했던 땅과 별장도 다 날렸다면서 “정치가의 수지결산(收支決算)”을 공표하여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그 돈 가지고 편하게 살지 왜 정치판에 뛰어들어 그 고생하며 그 돈 다 날렸는가. 정치에는 마약같은 중독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 결론을 내려보자. 돈 없이는 정치를 할 수 없는데, 제 돈으로 정치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고 남의 돈으로 정치하는 사람은 천당 가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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