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예산 3.2조원, 연구인력 4000명

20세기 초 일본에서 원자력은 미지를 일깨워줄 너무나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여 서양의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던 일본은, 1900년대에 들어서자 어느 한 인재를 통해 획기적인 과학기술 발전을 이룩할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당시 한국은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기술교육의 기회를 전혀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 초석은 일본 현대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 박사를 통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힘’ 원자력 기술 ②]

600만평의 인프라
나카소네 중위, 수상되어 원자력 선진화
연간예산 3.2조원, 연구인력 4000명


글/ 한필순 전 한국원자력연구소 소장

일본 현대물리학 아버지 요시오 박사

1918년 니시나 요시오(仁科 芳雄)라는 청년은 도쿄 제국대학의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이화학연구소(리켄, 理硏)에 연구생으로 입소를 하였고, 이후 유럽으로 유학길을 떠나게 된다. 그는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러더퍼드 교수)과 독일의 괴팅겐 대학을 거쳐 당시 막 노벨물리학상을 수상(1922년)한 닐스 보어(Niels Bohr)에게로 향했

▲ 니시나 요시오 박사

다. 닐스 보어는 양자역학 개념을 적용한 원자구조 모형을 제시한 세계적 석학으로서 20세기 가장 영향력이 있는 과학자 중의 한사람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닐스 보어의 제자로 보어연구소(공식 명칭 : Niels Bohr Institute)에서 수학한 니시나 요시오는 1928년 일본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31년에 이르러 니시나 요시오 박사는 이화학연구소 내에 ‘니시나(仁科) 연구실’을 설치하고 양자론, 원자핵 등에 관한 연구를 거듭하면서, 유카와 히데키, 도모나가 신이지로 등, 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인재들을 길러내었다.
한편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1941년, 니시나는 일본군의 의뢰를 받아 원자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을 검토하게 되었고, 다음 해인 1942년부터 일본 해군기술연구소의 원자폭탄 연구를 이끌어 나가게 되는데 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면서 그 연구도 중단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의 원자력연구기반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 상태였다.

나카소네 중위 “원자력 없어 망하는구나”

태평양 전쟁은 일본에 원자폭탄으로 인한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무조건 항복으로 끝나게 되었다.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을 우려하던 미국은 전쟁 후에 일본의 원폭개발 능력을 말살하기 위해 니시나(仁科) 박사가 개발한 사이클로트론(Cyclotron)을 동경만 · 시나가와(東京 · 品川) 앞 바다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이것으로 일본의 원자력개발이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 나카소네 히로아키 수상

전후 일본의 부흥을 위해 천황은 물론 당파를 초월한 정치인들이 미국의 환심을 사려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미국의 환심을 사게 된 일본은 여·야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부흥을 꾀하게 된다. 이들 정치인 중에 일본 정계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던 나카소네 히로아키(中根 康弘) 수상이 있었다.
1945년 8월 6일 젊은 청년 해군장교였던 나카소네(中根) 중위는 함상에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만들어낸 버섯모양 구름을 목격하고는 “일본이 원자력기술이 없어 패망하는구나.”라고 한탄하면서 장차 일본을 ‘원자력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슴에 새기게 된다. 그 후 29세의 젊은 나이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나카소네는 일본 최초의 원자력 예산 2억3,500만엔을 통과시키고 그 이후 반세기 동안에 최초예산의 수천배 이상으로 예산을 늘린다. 나카소네는 원자력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놀랍게도 어떤 전력이든(원자력, 화력, 풍력, 태양열 등) 전기요금의 일정 비율을 원자력 연구개발과 진흥 예산으로 쓸 수 있게 만들었다. 소위 전원3법이 설치되면서 일본은 마음껏 원자력연구개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처럼 원자력발전이 중단되더라도 매년 수조원의 원전 보조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된 것이다. 정말로 획기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나카소네 수상, 원자력기술 선진화 주도

나카소네(中根)는 안정적인 원자력예산 기반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원자력개발을 체계화하는 것에도 힘을 쏟았다. 1956년 이후 대략 5년마다 ‘원자력장기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여 체계적으로 원자력연구개발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후 일본은 수상이 바뀌었어도 나카소네가 입안했던 원자력 선진화는 줄기차게 추진되었고 이것이 현재의 원자력기술선진국으로서의 일본의 위상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리더십이 바탕이 되어 일본의 원자력연구개발을 수행하는 일본원자력개발기구의 예산은 2011년에 발생한 후쿠시마 사고로 원자력발전소들이 문을 닫았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에 전년 예산에 비해 오히려 늘어났다.(아래 표 참조)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원자력연구개발로 풀어가려는 것이 완연하다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원자력연구개발을 이끌었던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나카소네의 예지와 리더십이 무척이나 부럽기만 하다.

▲ 일본원자력개발기구(JAEA)의 원자력연구개발 예산과 인력 추이

에너지자원 없으면 두뇌로 에너지 만든다

태평양 전쟁 때 원자폭탄의 참상을 뼈저리게 경험한 일본원자력연구소(JAERI, 현 일본원자력개발기구; JAEA)의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기초연구에만 몰두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동력로, 재처리와 농축 등 핵연료주기기술, 중수 등 민감기술 개발에 굉장히 부정적인 의견들이 지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천연에너지자원이 너무나 부족한 자원빈국이다. 전후 국가의 부흥을 이끌어야할 에너지자원의 안정적 확보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결국 자원빈국인 일본은 ‘국가의 힘’을 키우기 위해 원자력기술개발을 포기할 수가 없었고, 일본원자력연구소 부지 내에 동력로개발사업단(PNC)을 창설하여 동력로와 핵연료주기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자원이 없으면 사람의 두뇌로 자원을 만들어 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원자력은 두뇌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박정희 대통령 시절, 태릉의 한국원자력연구소(현 KAERI)에서 연구를 시작하고 핵연료주기기술 개발을 위해 설립한 핵연료개발공단을 충남 대덕에 새로이 부지를 선정하고 창설한 것과 유사하다.

600만평의 원자력연구개발 인프라

현재 일본원자력연구소와 동력로개발사업단은 합쳐져서 일본원자력개발기구(JAEA)로 되었고, 총 300만평의 부지에 10여개의 연구소와 많은 실증시설을 보유한 매머드 원자력연구개발기관이 되었다. 일본처럼 협소한 국토면적을 가진 나라가 원자력연구개발기관만으로도 이렇게 방대한 부지면적을 갖고 있는 것은 일본이 원자력연구개발을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입증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재처리와 농축 등 민감기술 시설이 위치한 일본 혼슈의 최북단 아오모리현(靑森懸)의 관련 부지규모는 약 250만평에 이르고 있다. 또한 핵연료주기시설과 방사성폐기물처분장이 아모모리현의 무츠시 근처에 들어서 있는데 규모는 미상이다. 이것만 보아도 일본의 원자력 시설부지는 연구시설 약 300만평, 핵주기시설로 약 300만평을 합쳐 약 600만평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는 원자력발전소 부지를 제외한 값이다.
일본원자력개발기구는 예산만 해도 3조2천억원 정도이고 연구인력만도 4,000여명에 이른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1년 예산이 4,000억, 인력이 1,300여명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엄청나다. 우리나라가 원자력발전규모에서 세계 4위이며, 대용량 상용원전을 세계 5번째로 수출하였고, 연구로 수출은 3대국에 속하는 등 일본과 비교하여 원자력기술 선진화에 있어서 손색이 없는데 반해 그 인프라는 일본의 수분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나라가 ‘원자력기술강국’으로서 그 위상에 걸맞게 원자력연구개발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 절실해 보인다. 기초가 튼튼해야 무한 경쟁에 돌입하고 있는 원자력수출에서 기술경쟁력을 확보하기가 더 용이할 것이다.

일본의 원자력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앞서 말한 일본의 상황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원자력은 죽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을 듯하다. 원자력연구개발예산이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원자력은 첨단을 향해서 계속 항해할 것이라는 직감이 든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일본 원자력연구개발의 게임체인저(Game Changer)일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일본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여파로 원자력기술 선진화의 발걸음이 다소 더디어졌다고 여겨지긴 해도, 원자력연구개발 인프라가 여전히 세계적인 규모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위기에 강한 일본은 역시 일본일 것이다. 이를 전투기 성능발전에 비유하여 보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전투기들의 성능은 세계 제1차 대전 초기에 만들어진 전투기들에 그 차원을 달리하였고, 그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투기의 성능과 안전성은 놀라울 정도로 성능과 향상되었다. 일본의 원자력기술은 아마도 세계 제2차 대전을 치르고 있지 않나 싶다. 태평양전쟁의 패배를 껴안고 다시 일어난 일본은 위기에서 살아남는 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예로 일제 식민치하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필자의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외친 구호 중에 ‘기름 한 방울, 피 한 방울(油一滴, 血一滴)’ 라는 말이 있었다. 그 의미인 즉 ‘기름 한 방울의 가치가 우리의 목숨과 같다’는 외침이다. 위기에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자는 결심을 해 본 나라는 그 교훈을 쉽게 잊지 않는다.

일본을 보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뼈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원전의 문제점을 면밀하게 파악하여, 차후에 태어날 원전에 반영할 것으로 사료된다. 현재와 차원이 다른 안전성이 훨씬 향상된 차세대 원자로를 탄생시킬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다시 말해서 한국이 뒷짐 지고 있을 사이 이웃나라 경쟁국 일본은 우리보다 10배 이상의 부지와 연구예산으로 현재와는 차원이 다른 형태의 안전성이 뛰어난 신형 원자로를 탄생시킬 것으로 전망되는 것이다.
오랜 기간 일본의 원자력정책을 예의주시해 온 필자는 이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보다 안전하고 지속적인 에너지 공급원으로써 원자력의 역할을 위해 혼신을 바쳐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강력한 리더십 하에서 뜀걸음으로 일본을 앞질러 가야하지 않을까?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1호 (2014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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