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復(송복)교수, 류성룡 상소문 549건 분석

▲ 송복(宋復) 교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 전쟁인 임진왜란은 명(明)나라와 왜(倭)의 조선분할 전쟁이었다. 송복(宋復) 교수가 저술한 임진란 7년간 류성룡(柳成龍)의 상소문 549건을 분석한 ‘전하,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2014.5.가디언)에 따르면 조선분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랜 꿈이었고 명나라는 대동강 북쪽 조선땅을 할지(割地)로 삼아 왜의 침공을 막는 울타리로 삼으려 했던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의 임진왜란
明·倭(명·왜) 조선분할 전쟁
宋復(송복)교수, 류성룡 상소문 549건 분석
가짜 國書미스터리가 분할저지 결과

조선의 ‘샌드위치’, 오늘의 ‘호두까기 신세’

저자 송복 교수는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에서 한반도 분단의 원류가 400년이 훨씬 넘는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해석한다. 오늘의 남북 분단이 외형상 2차 대전 종전 시 미·소 양국군의 점령정책으로 이해되지만 그 뿌리는 명나라와 왜국의 조선분할 획책까지 닿는다는 주장이다.
당시 명은 조선을 속국(屬國)으로 인식하고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쪽 4개도의 분할을 요구한 것은 두 나라 이해가 접근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반면에 조선은 두 나라의 중간에 끼인 샌드위치 신세였으며 지금도 중국과 일본 사이의 ‘호두까기 신세’가 아니냐는 말이다.
이 같은 역사인식에서 송 교수는 임란 당시 서애(西涯) 류성룡이 이순신과 함께 자강(自强)독립정신을 펼치며 ‘국가재조지운’(再造之運)이라고 줄기차게 상소했었다는 분석이다. 이 국가재조지운은 오늘날 세월호 참사 이후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개조(國家改造)를 약속했다가 국가혁신(國家革新)으로 바꿔 ‘관피아’ 척결을 추진하는 역사의 반복과도 상통한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당시 류성룡의 자강주의(自强主義)는 종전 이후 명나라를 섬기는 의명파(依明派)에 밀려 탄핵으로 귀향(歸鄕)하고 말았으니 조선의 불운이기도 했다.

명과 왜의 조선분할 협상 3차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란 7년 전 1582년 관백으로 취임하면서 조선분할을 추진했다. 그의 공명심, 정복욕 외에 부하들에게 나눠 줄 영토 확보를 위해 명에게 속국(屬國)인 조선 남쪽 4개도를 떼어 달라 요구했다.

실제 조선분할 협상은 1592년 7월 16일, 명나라 원군 조승훈부대가 평양전투에서 패배하고 귀국한 후 일본통인 성유경을 유격장군으로 내보내 첫 강화회담 테이블에 올렸다. 이 제1차 강복산회담에서 성유경은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제시한 7개조를 모두 수락했다. 요지는 “조선 4도는 왜의 영토에 속하고 북으로는 대동강을 경계로 삼는다”는 내용이다.
제2차 회담은 1593년 4월 8일 한양의 용산에서 열렸으며 회담직후 왜군은 4월 20일 한양에서 철수했다. 이때 영의정 류성룡의 조선군이 추격하려하자 명군이 저지시켰다. 그 뒤 두 달 만인 6월 28일 규슈의 나고야에서 3차 회담이 열리고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등장하여 협상조건 7가지를 제시한다.

히데요시 7개항과 ‘가짜 국서’사건

①명나라 황제의 ‘현숙한 여인’을 왜의 후비(后妃)로 삼는다. 황가(皇家)의 여인이라면 명 황제의 딸이나 질녀를 뜻한다.
②감합(勘合)무역을 복구하고 관선(官船)과 상선(商船)을 내왕시킨다. 감합무역은 조공(朝貢)을 뜻하며 조공을 바치면 많은 답례품을 받는다. 일본은 1400년 이래 조공을 통해 많은 경제적 이득을 누렸다.
③명나라와 일본의 대신들은 화의 서약서를 교환한다. 당시 동아시아의 강화협상에는 이런 서약서가 조건이다.
④조선 8도를 분할한다. 조선 국왕에게는 함경, 평안, 황해, 강원 등 4개도와 수도 한양을 돌려준다.
⑤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볼모로 보내야 한다. ⑥생포한 조선의 두 왕자도 돌려준다. ⑦조선의 대신은 영원히 배반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 같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7개항은 명나라 황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기가 미리 짜고 7개항을 뺀 가짜 국서(國書)를 조작한다. 국서에는 “대명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封)한다”고 명시했다. 명나라 조정은 이 가짜 국서를 믿고 일본왕 책봉사를 보낸다.
정사 이종성, 부사 양방형, 수행원 심유경 등의 책봉사들은 1595년 1월 30일 북경을 출발한 지 열 달이 걸려 11월 22일 부산에 도착한다. 그러나 정사 이종성이 ‘야반도주’하여 행방을 감춘 괴변이 일어난다. 그는 히데요시가 명나라 황제로부터 국왕책봉을 받지 않을 것으로 알고 있기에 겁을 먹고 도주한 것이다.

“풍신수길이 국왕책봉 받고 사은”도 가짜

일본왕 책봉사절이 무대책으로 방황하다 해를 넘겨 1596년 9월에 정사 양방형, 부사 심유경으로 다시 조직하여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때 조선도 수행하라고 요구하여 정사 황신, 부사 박홍장이 동참하여 오사카성에 도착 후 몇 달을 기다리다가 히데요시와의 면담이 허락됐다.
책봉사가 명 황제가 보낸 봉왕(封王) 금인(金印)과 칙서를 제출했다. “너를 특별히 일본 국왕으로 봉한다”는 요지였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고 그가 진노했음은 물론이다.
책봉사들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1597년 2월 16일에야 북경으로 귀환했다. 이때 명 황제에게는 다시 가짜 국서로 보고한다. “수길(秀吉)이 국왕 책봉을 받고 사은(謝恩)했다”는 위조 ‘사은표문’을 제시하고 “일본국왕 수길이 공물(貢物)을 바쳤다”고 보고했다.
이 일이 탄로되어 정사 앙방형이 파직됐지만 극형은 면했으니 이상한 미스터리다. 저자 송복 교수는 이들의 허위보고 미스터리가 “조선 분할을 막아냈다”고 해석한다. 명과 왜의 강화 협상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만 4년여 동안 협상이 늦어지면서 히데요시가 죽었기 때문에 조선분할이 저지됐다는 뜻이다.
저자는 조선분할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복욕으로 시작됐지만 명과 왜의 협상 테이블에 이를 올린 것은 명나라 조정이 아니라 명군 지휘부였다고 해석한다. 명군이 임란이 끝나고도 1600년까지 조선에 주둔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지적이다.

조선임금 꾸짖으며 ‘구해줄 책임없다’

명나라는 일본과 조선분할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 별도로 조선직할통치를 획책했다. 명의 호부상서 위학증(魏學曾)이 황제에게 올린 글속에 조선직할통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있다.
“조선이 왜적을 막지 못해 명에 근심이 된다. 조선을 2~3개로 나눠 왜적을 막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 울타리로 삼아야 한다”는 요지였다.
1593년 11월 명나라 조정이 사신(使臣) 사헌을 보내 황제의 칙서를 제시했다. 칙서는 조선임금을 꾸짖으며 “짐이 조선왕을 구해줄 책임이 없노라”고 했다. “임금이 오락에 빠지고 소인(小人)배를 신임하고 백성을 돌보지 않고 군비에 소홀했다. 앞으로는 주색(酒色)에 빠지지 말고 놀음에 미치지 말고 한쪽 말만 듣지 말고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맡기지 말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지 말도록 하라”.
당시 선조 26년, 1593년 10월로 임금이 중신들과 함께 의주로 피난했다가 1년 반 만에 환궁하여 명 황제의 칙서를 받았다. 사신 사헌의 오만 무례한 위세를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사신이 남면 높은 쪽에 앉고 선조가 북면 낮은 쪽에 앉아 마치 임금이 신하인양 칙서를 받았다.
선조가 칙서를 받고 그날 저녁 대궐로 류성룡 대감을 불러 “내일 사신을 다시 만나 선위(禪位)하려 한다. 그러니 경을 만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라며 술 한 잔을 따라 “이 술로 경과 영결하려 한다”고 말했다.
류성룡이 놀라 “당치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신이 죽을 각오로 청하오니 내일 사신 앞에서 양위하시겠다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읍소했다. 그렇지만 이튿날 선조가 사신을 만나 친필로 쓴 글을 소매 끝에서 꺼내어 선위의 뜻을 전했다. 이번에는 사신이 “황제에게 이를 주달한 후 조치를 기다려야 한다”고 대꾸했다.
그날 저녁 류성룡이 명나라 유격장군 척금(戚金)의 임시 거소를 찾아가 단독 대좌했다. 그의 숙소는 명나라와 조선문제를 논의하는 장소였다. 류성룡이 통역관마저 물리친 대좌석에는 탁자 위에 촛불 두 개와 붓과 벼루 및 종이만 놓여있었다.
척금이 먼저 “조선왕이 빨리 선위해야 한다”고 필담(筆談)을 시작했다. 류성룡이 붓을 들어 “조선 신하로 차마 들을 수 없다. 그대도 책 만권을 읽었을 테니 고금(古今)에 없는 일이다. 조선이 위태로울 때 선위는 나라의 재앙을 가중시킨다”고 응수했다.
이에 척금이 “그 말은 옳다”는 뜻으로 시시(是是) 시시(是是)라고 응대하여 그 자리에서 필담기록을 불태우고 일어섰다.

류성룡 충성심 모두들 칭송한다

류성룡이 백관을 인솔하여 사신 사헌 앞에 나아가 “왜의 침공은 조선이 아닌 명나라 침공 길을 열고자 하는 목적이다. 우리 임금이 왕위에 오른 후 지성으로 황제를 섬겼다”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날 밤 유격장군 척금이 사헌의 뜻이라며 “국왕은 염려마시라”는 언질을 보내왔다.

▲ 서애 류성룡의 ‘ 징비록’ 과 친필로 쓰인 내용

사헌이 조선을 떠나면서 선조에게 “류성룡은 남다른 굳은 충성심이다. 그의 인의(仁義)는 명나라 문무백관과 장수들이 모두 칭송한다. 왕이 현명한 재상을 얻었다”고 좋은 말을 했다. 이어 류성룡에게는 “왜적이 해를 끼친 것은 ‘얼레빗’(성긴 빗) 같고 명군이 해친 것은 ‘참빗’(촘촘한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명군이 왜적보다 지독한 피해를 입혔다는 말이니 놀라운 지적이다. 당시 기록물에도 “침략자인 왜군이 오면 조선백성이 모이고 구원군인 명군이 오면 조선백성들이 달아난다는 말이 있다”고 지적되어 있다.
이 말에 류성룡은 “옛말에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는 가시나무가 자란다”는 말로 작은 소란과 침해가 하나도 없을 수는 없다고 달래었다. 류성룡의 외교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2호 (2014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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