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문인의 고장 장흥
“말례길에서”


글 / 최수권 (사)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수필가

고향의 “문화, 예술인 대회”에 참석했다. 각 장르별 알만한 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고향사랑은 차치 하더라도 1년에 한번, 문화원에서 주최한 행사라, 서로 안부를 나누는 것이 의미가 있을 듯 싶어 고향을 찾았다.
고향 장흥은 국내 유일한 「문학특구」여서인지, 향인은 물론 출향인들에게까지 고향은 늘 남다른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문림의향」이라는 타이틀답게, 서편제의 이청준 소설가, 한승원, 송기숙, 김석중, 이승우 같은 유명세의 작가들이 배출된 곳이며, 문단엔 현재 90여명의 문학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언젠가 어느 문인모임에서, 크리스천 문인 회장을 역임한 최은하 교수(중견시인)가 “당신 고향 장흥은 웬 문인이 그렇게 많아” 천관산 문학공원의 문학비를 돌아보고 군민들의 문학 열정에 극찬을 하기도 했다.
“그래요, 먹고 살기 어렵고, 빈한 곳이라, 그렇게 세상을 향해 나가기 위한 방편이겠죠. 그래 지망생이 많은지도 모른다”고 하여 좌중을 웃긴 적이 있기도 하지만, 고향은 한(恨), 정(情), 예(禮)의 기질이 넘치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의례적인 행사를 마치고, 다음날 장흥의 명소인 말례길 탐방에 나섰다.
산을 오르며 부산에서 온 최 시인이 「말례」의 뜻이 뭐냐는 질문을 해왔다.
나도 궁금하던 차였다.
이태리의 어느 순례길에서 따온 것 아닐까? 스위스의 산책코스는 아닐까?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산천의 어느 길….
나의 상상은 완전히 무너졌다.
「말례」는 마루라는 전라도 방언이고, 방과 방사이의 대청마루를 말례라고 했다. 지금도 전라도 지역에서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을 더듬어 보니, 나의 유년엔 일상으로 사용하는 명사였다.
말례길은 정상까지 500m의 산책로를 방부목으로 마루처럼 깔아, 노약자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길섶의 풀과 나무를 그대로 살려 자연환경과 잘 조화된 명품의 산책로였다. 편백나무가 뿜어낸 피톤치드, 청정하고 상큼한 공기와 산림이 가져온 싱그러운 초가을의 싱그러운 냄새가 어울려, 마치 천상의 길을 걷는 듯한 싱그러움에 젖어 보기도 했다. 그렇게 여유로운 한가함을 만끽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숲길을 걸으며 일상의 것들을 덜어내 보면서, 천천히 그렇게 내가 지내온 세월을 반추해 보기도 했다. 그것이 고향길이었기에 감흥이 더 달랐을지 모른다.
정상 부근에서 아주 실하고, 탐스러운 가을 산국화(구절초?) 무리를 만나보면서, 아주 묘한 기분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 꽃들은 누구도 돌보지 않았고, 가꾸지도 않았을 텐데,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피워 있었다. 세상의 어떤 꽃보다 아름답게….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 않고 돌보지도 길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 6.28~29). -들에 핀 꽃, 그 꽃은 수많은 시중을 받고 있는 솔로몬 왕보다 더 아름답게 차려입고 있다.-
문득 이런 구절이 떠오르게 된 것은 왜일까?
사는데 허덕이며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마치 전쟁을 치르듯이 비장한 각오의 날을 세우면서, 그렇게 살아가면서, 내 노력으로 이루어 내는 내 삶의 결과가 얼마나 대단한 쟁취이고, 승리였을까?
사실 우리는 오늘도 노력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밀려날까, 불안해하고, 하루 종일 일에 매몰되어 산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삶의 태도가 이 시대를 잘 살아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부와 명예, 풍요로운 여유, 이런 것들이 오늘을 사는 이들의, 성공일지도 모른다.
사실 일이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재능, 창조성을 드러내는 수단에 불과하다. 일은 우리의 삶에 속할 뿐 인생을 지배하지 못한다.
삶은 일하는 것 이상의, 어떤 가치가 필요하다. 삶은 현실이란 거친 들판에서 행하는 육신의 것들과, 나의 영혼의 밭에서 성장해 가는 영적인 것들이 조화 될 때,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물이 맑으면 하늘이 비치듯이 마음(영혼)이 맑으면 세상의 이치가 드러나고, 비친다고 한다.
말례길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지친 내 육심을 정화해 보았다. 가을이 깊어간다. 무성한 여름을 떨쳐낸 나목의 말례길을 다시 오르는 상상으로 즐거운 하루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3호(2014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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