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4.19 학생혁명 50주년]

이승만 재평가와 반발

4월 혁명 주체도 납득할 공정한 평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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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남시욱(편집위원장, 전 문화일보 사장

4월혁명 50주년 맞아 이승만 재평가 작업

올해로 4·19 제50주년을 맞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미 수년전부터 연세대 유영익 석좌교수를 중심으로 그를 재평가하는 학술세미나가 개최된 바 있지만 올해 들어 이런 움직임이 더욱 확대되고 있다. 이 박사가 4월혁명으로 하야한지는 올해로 반세기가 되었고, 그가 하와이에서 별세한지는 45년이 흘렀으므로 그의 장기집권과 3·15부정선거로 인해 부정일변도로 되어있는 그에 대해 거시적인 안목에서 공정한 평가를 할 시기가 왔다고 할 것이다.

이 박사에게는 부산정치파동 때부터 정치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과오가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또 부인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1960년에 재출마하지 않았던들 건국대통령이 그처럼 불명예롭게 퇴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박사가 처음부터 3선을 하지 않고 8년간의 두 차례 임기를 마치고 1956년에 깨끗하게 물러났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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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1948년 8월 15일, 대한미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대통령. 따라서 8월 15일은 광복절과 함께 건국절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오른쪽)4.19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외치며 고교생 시위대>

독립운동과 건국의 공로는 위대한 업적

휴전 3년째를 맞은 1956년은 어느 정도 국내가 안정되고 시급한 전쟁피해 복구작업도 일단락될 무렵이었다. 물론 이 박사 스스로는 당시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자신이 손수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들이 많았겠지만 3선은 결국 종신집권의 시작이어서 일단 그 길로 들어감으로써 1960년의 비극을 예정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그가 젊은 시절부터 전 생애에 걸쳐 독립운동을 벌이고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 수립 및 6·25동란 때 망국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수호하는데 성공한 그의 빚 나는 업적은 제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공과를 균형 있게 재평가해서 우리 현대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올바르게 정리해야 한다.

그러나 이 박사에 대한 재평가작업에 강력하게 반발하는 측이 있다. 필자는 얼마 전 4·19혁명 관련 어떤 세미나석상에서 몇몇 인사들이 이 박사에 대하여 강한 혐오감과 증오감을 표시하는 것을 보고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참으로 험난한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점을 새삼스럽게 느낀 적이 있다. 하긴 아직도 병원에 입원중인 4·19부상자들이 있다고 하니 그들의 심정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6·25동란 때 서울사수를 다짐하던 정부가 비밀리에 남하하고 한강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많은 서울시민들이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공산치하에서 신음했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각계 지도자들은 북으로 납치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서울에 남았던 당사자들과 피납인사 가족들 중에는 이 박사에 대해 원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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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성루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

참고할 만 중국 공산당의 모택동 평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박사에 대한 재평가는 이제 균형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가 대한민국을 세운 초대 대통령이기 때문에 그에게 분단책임과 단독정부 수립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그 개인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노무현 같은 좌파지도자들은 대한민국이 분열세력이 통일세력을 누르고 세운 나라이며, 기회주의자가 득세한 사회가 대한민국이라고 공언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이제 우리는 이 같은 잘못된 역사관을 깨끗이 청산하고 그 바탕 위에서 21세기의 새 선진국가로 힘차게 출발해야 할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건국 이래의 당의 약간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결의’라는 문건을 채택했는데 이 것은 등소평이 주동이 된 것이다. 이 문건은 ‘모택동 동지의 역사적 지위와 모택동 사상’에 대해 “그가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전 생애를 놓고 보면 중국혁명에 대한 공적이 잘못을 훨씬 능가하고 있다. 그의 공적은 1차적이고 오류는 2차적“이라고 결론지었다. 모택동도 생전에 자신이 과오를 범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후에 과오는 30%, 공로는 70%라는 평가를 받으면 만족스럽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등소평도 이에 동조함으로써 모택동은 결국 ‘공 7, 과 3’의 지도자라는 결론이 났다. 물론 중국에서조차 각자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모택동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겠지만 최소한 등소평 당시의 중국공산당 안에서만은 그렇게 결론이 난 것이다. 등소평은 1980년 8월 이탈리아 기자와 회견한 자리에서 중국정부는 천안문 성루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를 영원히 보존할 것이라 밝혔다. 만약 모택동이 죽은 후 러시아에서 스탈린이 당한 것 같은 격하운동이 일어나 그의 동상이 헐렸더라면 오늘의 중국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등소평은 위대한 지도자이다. 우리도 이제 균형 잡힌 시각에서 이승만의 공과를 공정하게 살펴보아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이 박사의 공로가 과오보다 많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룩되면 그의 동상도 건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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