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진나라 여불위의 이야기
돈이면 천하도 살 수 있다

글 / 최수권 (사)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수필가

진나라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태어날 때 하남 일대는 한(韓)나라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여불위는 한나라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여불위의 여(呂)씨는 태공망 여상(呂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은(殷)나라 말기 낚시로 세월을 낚고 있었다는 강태공의 후손이다. 혈통으로 보면 낚시질로 재상자리를 낚은 여상의 DNA가 흐르고 있었다.
주나라 수도 낙양은 전국의 모든 장사꾼들이 몰려들고 정치인과 학자들이 모여 사상과 담론(談論)을 나누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북방의 연나라엔 담비 가죽이 많고, 초나라 수도에 가면 값싼 미인이 많다는 등 온갖 정보가 넘쳐흘렀다. 여불위는 그곳에서 천하를 보고, 읽고 타고난 장사꾼 기질로 열국을 다니며, 싼값에 물건을 매입하고 비싼값에 팔아 수천금의 재산을 모은 거상이 된다.
여불위가 이립(而立)의 나이 30대 시절, 기원전 262년은 전국시대 말기였다.
주나라는 왕이 간신히 이름만 왕위를 지키고 있었고, 진나라는 소왕이 즉위한지 45년이 된 시기였다. 진나라와 조나라가 벌인 전쟁에서 진이 대승을 거두며 조나라 4십만 명을 생매장한 사건(장평대전)이 있기도 한 시기였다. 이때 여불위는 대상(大商)으로 불릴 만큼 성공한 장사꾼이 되어 주 거래처로 점찍는 조나라 장삿길을 떠나게 된다.
상왕(商王)은 장사의 왕이라는 뜻이다. 대상(大商)이자 거상인 여불위를 칭하는 말이었다. 그는 장사로 번 돈을, 사람에게 투자했다. 바로 사람 장사를 한 것이다. 다분히 정치적인 거래의 달인이었다. 여불위는 조나라에 인질로 와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子楚)를 처음 보는 순간 ‘기화가거(奇貨可居:참으로 진기한 재화로 사둘만 하구나)’로 여기고 그는 천금을 투자한다.
자신의 애첩 조희로 하여금 자초를 유혹하게 하여 포섭한 뒤 진나라 태자 안국군과 그 부인을 회유하여 자초를 양자로 삼게 하는데 수천 금을 투자한다.
기원전 251년에 소왕이 죽고 안국군이 즉위했지만 1년 만에 죽고, 양자인 자초가 왕위에 오른다. 이가 곧 장양왕이다. 장양왕이 재위 3년 만에 죽고, 그들이 낳은 자식 정(政)이 왕위를 승계한다.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정은 여불위를 상국(相國)으로 삼고, 작은아버지라 불렀다. - 조희가 자초를 유혹할 당시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으므로 진왕 정의 생부가 곧 여불위가 되는 셈이다 - 진시황은 13세에 직위 했다. 태후 조희의 섭정, 여불위는 애첩인 태후와 같이, 한 시대를 풍미한다. 집안의 하인만도 1만 명이었다 하니, 천하에 그와 비견할만한 사람은 없었다. 천하 장사꾼 지위에서 왕을 제외하고, 일국에 천하의 통치권자였다.
상국(相國)여불위, 조나라에서 잡혀온 인질 자초를, 진시황에 오르게 하기까지 그는 수천 금, 아니 상상을 초월한 일생일대 도박을 벌인 끝에 마침내 대박이 터진 것이다. 이를 두고 후세의 역사에 회자된 말이 있다.
“돈이면 천하도 살 수 있다.” 그 중심에는 상왕(商王) 여불위가 있다.
19세기 초 조선후기 순조 때 ‘하늘이 낸 거부’로 불리는 임상옥이 있다. 호는 가포이고, 의주출생이다. 의주는 당시 대중국의 무역 중심지였다. 대대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의주 상인이 된다. 무지하고, 가난하여 신세 한탄만 하던 아버지와는 달리 그는 천재적인 상업능력과 상도를 깨우치고, 조선 최고의 거부가 된다.
그의 진가는 돈을 쓰는 방식이었다.
1834년(순조34년) 7월에 의주부의 수재로 민가가 피해가 1737호, 파손된 집이 2000채, 사망자가 16명에 이르렀다. 임상옥은 수만 석 곡식을 내놓아 수재민을 구했고, 순조32년 6월에는 2070냥이라는 거액을 희사해 수재민을 구제했다. 나라를 위해 배를 희사하고, 다리를 놓아주고, 병든 사람을 돌봐주고, 흉년에는 곡식을 내놓았다. 이러한 공로로 양인 출신이면서도 곽산군수를 지냈고, 종3품 귀성부사로 승진했지만, 비변사의 반대로 귀성부사 부임은 무산되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그의 신분을 문제 삼아 승진을 저지한 것이다. 양인신분의 한계였다.
의주군지에 의하면 야인으로 돌아온 임상옥은 빈민구제와 시주(詩酒)로 여생을 보냈다고 적고 있다. 문인들과 교류하며 시와 술로 여생을 보냈다. 시를 잘 지었으며, 저서로는 「가포집」이 있다.
그가 남긴 시, 이런 구절이 있다.
재물은 물처럼 평등해야 하고
/ 재상평여수(財上平如水)
사람은 저울처럼 정직해야 한다.
/ 인중직사형(人中直似衡)
여불위나 조선의 거상, 임상옥 역시 하늘이 낸 부자다. 여불위는 진왕 정을 왕으로 만드는 과정에 투자했고, 임상옥은 사회환원에 적극적이었다. 백성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임상옥은 가정적으로는 불우했다. 아우 둘을 잃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조차 일찍 죽어 무척 외로운 삶을 살았다. 절세의 상인이요, 시운도 따랐던 그도 일흔일곱의 나이로 삶을 마친다. 오늘날 임상옥의 그 많은 재산은 흔적도 없이 간 곳도 없고, 그가 지은 시 「가포집」이 전해질뿐이다.
하늘이 내린 부자, 임상옥 같은 경영자가 있으면 세상은 더 살맛나고, 따뜻할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9호 (2015년 5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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