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망각, 한국발전기여론 분통

한·일관계 머나먼 길
아베의 독주 어디까지…
과거사망각, 한국발전기여론 분통
6.25전쟁특수 일본경제 부흥 잊었나

한·일 관계 비정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고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조기에 관계 정상화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전문가 주장이 나오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도 양국관계 정상화를 희망하지만 과연 어떤 방식으로 민감 현안들을 풀어낼 수 있을까. 아베 수상이 우경화로 독주하는 확신 속에는 과거의 침략사를 밟고 올라설 수 있다고 자신하는 모습이니 말이다.

아베의 역사인식 임란시 사무라이 수준

아베 수상이 분명 믿고 기대는 든든한 배경이 있다는 모습이다. 아베 수상은 국내 극우세력의 열렬한 응원 속에 미국 상하 양원합동의회 연설무대에 사상 처음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그의 독주 행보에 ‘한국쯤이야’라고 우습게보고 있을지 모른다. 북의 핵과 미사일에 전전긍긍하는 한국이 미국과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SHAAD)도입 논란 빚고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 창립회원국으로 참여한 것도 ‘중국편향’이라 진단하는 모양이다.
아베는 아예 옛 식민지지배에 관한 역사인식이 소멸된 특유의 인물이 아닐까. 식민지배에 의한 조선 근대화론과 한일관계 정상화 이후 한국경제발전 기여론을 앞세운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인신매매 희생자로 깔아뭉개려 드니 무슨 수로 양국관계 정상화를 이야기 할 수 있겠는가.
이원홍 전 문화공보부장관은 경제풍월 4월호 기고에서 ‘아베가 미운 이유’라는 제목 하에 아베 수상의 과거사 역사인식이 임진왜란 당시의 사무라이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이 전 장관은 한국일보 주일특파원, 주일공사를 지낸 일본통으로 아베 수상의 정치노선에 관해 누구보다도 깊이 관찰한 전문가이다.

일왕의 과거사 유감표명 잊었나

오늘의 아베 수상이 옛 식민지배와 태평양전쟁의 피해국 국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독주행태를 보이는 배경에는 일본의 패전이후 미국에 의한 일본개조가 실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당시 일본정부의 항복을 받아낸 맥아더 사령부가 일왕의 전범에 관해 면책하고 영구히 전쟁을 포기하는 평화헌법을 제정했었으나 아베시대에 이르러 이를 몽땅 뒤집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식민시절을 겪은 세대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노역, 징용, 공출 등 온갖 수탈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일본군의 성노예처럼 끌려간 위안부 할머니 일부도 아직껏 생존하여 울분으로 증언한다. 그렇지만 아베는 당당한 자세로 기고만장한 모습이다.
메르켈 독일 수상이 위안부 문제해결을 촉구했지만 듣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일본 언론들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넘어갔다.
지난 84년 외교문서 26만 쪽이 비밀해제로 공개되어 전두환 대통령이 국빈으로 첫 방일했을 때 히로히토 일왕의 유감 만찬사 배경이 밝혀졌다. 당시 한국정부가 과거사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강력 요청한 결과 “금세기의 한 시기에 양국 간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요지의 만찬사가 나왔다.
그로부터 세월이 얼마나 흘렀다고 아베가 역사를 망각하고 식민지배 근대화론과 한국경제발전 기여론을 앞세운다는 말인가.
박정희의 5.16정부가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할 때 ‘대일굴욕외교’ 반대 시위가 극심했었다. 이때 대일 청구권 자금이라야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등 도합 5억달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자금이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할는지 모르지만 그로부터 양국교역에서 얼마나 많은 무역역조가 누적되어 왔는가.
일본은 35년간 식민지배를 통한 온갖 수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6.25 한국전쟁 특수 및 한국군이 피 흘린 베트남전쟁 때도 특수를 누리지 않았는가.

6.25전쟁 3년간 ‘가미카제’특수

일본 평론가가 집필한 ‘쇼와사’(昭和史)는 ‘일본이 말하는 일본 현대사’로 맥아더 사령부의 지배하의 일본이 6.25 한국전 특수로 경제부흥 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글 한도 가즈토시·박현미 번역, 루비박스 2010.8.15)
패전 증후에 시달리고 있던 1950년의 일본에게 6.25전쟁 특수는 ‘가미카제’(神風)로 불렸다. 유엔군의 병참기지로서 점령군 사령부가 전쟁물자를 발주하여 일본 전역에 쌓여 있던 2차대전 패전물자가 순식간에 군수용품 원료로 조달됐다.
일본 경제기획정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쇼와 25년 7월에서 이듬해 6월까지 물자와 서비스 공급 3억2,900만 달러, 쇼와 26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3억1,500만 달러, 쇼와 27년 7월부터 1년간 4억2,900만 달러 등 한국전쟁 3년간 11억3,600만 달러의 특수를 누렸다. 당시 달러당 360엔의 환율로 계산하면 4,089만 엔으로 패전경제의 부활 종자돈 구실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김일성이 남침하던 날 도요타자동차의 가미야 쇼타로 사장은 LA에 머물고 있다가 급거 귀국했다. 당시 트럭 주문량이 연간 총 300대에 불과했지만 한국전 군용트럭 주문량이 월 1,500대로 늘어나 오늘의 도요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소니는 1946년 젊은이 7~8명이 도쿄통신공업으로 참여했다가 6.25 전파탐지기 특수로 세계적인 전자업체로 성장했다. 혼다자동차는 1946년 조그마한 마을공장으로 창립되어 자전거에 소형엔진을 달아 오토바이를 거쳐 1953년 자동차로 발전하여 세계적인 자동차회사가 될 수 있었다.

패전 3일만에 미군 위안시설 설치

저자는 패전 당시 중학생의 눈으로 일본인들이 금방 고분고분해진 근성이 한심하다고 적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선언이 있은 다음 ‘1억 옥쇄’론이 ‘1억의 눈물바다’로 바뀌었다. 해외로부터 패잔병이 귀환하자 기아로 넋이 나간 꼴이었다. 식량난은 한국전 직전까지 계속됐다. 암시장과 노점상에는 군인들의 훈장까지 팔려 나왔다.
일본의 변신 책략이 내무성으로부터 나왔다. 패전 3일째인 8월 18일, 내무성이 “패전국 여성은 미군의 첩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재빠르게 ‘특수위안시설협회’(RAA)가 결성되고 경찰이 미군 접대부 모집에 나섰다.
내무성 경보국장의 지령 아래 각 경찰서장들이 기생, 창녀, 작부 등을 대상으로 “국가를 위해 매춘을 알선해 달라”고 호소했다. 어제까지 풍속사범을 단속하던 경찰이 오늘은 매춘알선으로 얼굴을 바꾼 것이다. 이 결과 점령군 제1진이 상륙한 8월 27일, 도쿄 오타구 오모리에 위안부 1,360명을 확보한 특수위안시설이 개업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히로히토, ‘교수형에 처해도 상관없다’

저자는 일본의 패전으로 학생들에 대한 군수공장 근로동원이 없어져 좋았다고 적었다. 등화관제와 음향관제가 해제되자 가로등이 켜지고 길거리에 음악소리가 퍼져 나왔다. 일왕이 전등과 창의 차폐막을 걷어내어 국민생활을 밝게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나오고 신문에도 날씨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는 전황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날씨보도를 금지했었다. 전보와 소포도 자유화되고 개인전화 개설이 허용되고 연극과 영화도 재개됐다. 저자는 이를 보고 평화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8월 30일,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아쓰키 비행장에 도착했다. 펑퍼짐한 허리에 선글라스와 콘 파이프를 물고 호위병 한명 없이 단신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에 놀랐다. 9월 2일, 일본의 항복식이 있고 9월 27일에는 히로히토 일왕이 미국 대사관으로 잠행하여 맥아더 장군을 만났다. 앞뒤 경호차 없이 가는 길에 빨간 신호등 앞에서는 정차해야만 했다.
맥아더를 만난 히로히토는 “내게 교수형을 처해도 상관없다”(you may hang me)고 말했다. 그 뒤 일왕은 ‘인간선언’으로 신격(神格)을 벗고 영원히 전쟁을 포기한다는 평화헌법으로 일본은 팔자를 고칠 수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국가개조를 위해 경제부흥을 한껏 지원했다. 6.25 한국사 특수를 바탕으로 1960년대 연간 10%의 고도 성장기를 맞아 자동차, 전기전자, 제철, 석유사업이 번창하고 IMF와 OECD에 가입하고 해외여행 자유화를 누렸다. 이어 1964년에는 신칸센을 개통하고 도쿄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옛 식민지 지배와 2차 세계대전 책임을 망각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지 궁금하다.

베트남전에도 일본의 김치, 라면 특수

일본은 한국군이 참전하여 많은 피를 흘린 베트남전에서도 한국에 앞서 특수를 누린바 있다.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 ‘베트남 전쟁과 나’(2006.6 팔복원 발행)

▲ 한국전 군용트럭 주문 특수로 오늘의 도요타가 탄생할 수 있었다. <사진=도요타 일본 홈페이지>

에 따르면 맹호사단 등 한국군의 군복을 비롯하여 김치와 라면 등도 일본산이 먼저 공급되고 있었다.
월남전이 격화되어 맹호사단이 파견된 초기, 사령부마저 아직 천막생활하고 전투부대는 각자 참호를 구축하고 있을 때 퀴논항의 시설부족으로 각종 군수물자를 실은 선박들이 하역을 위해 한 달 가량 대기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때 한국군에는 미군용 C-레이숀이 공급되어 병사들이 밥과 김치를 달라고 요청했다. 종일 뙤약볕 아래 작업했던 장병들이 C-레이숀으로는 기력을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채명신 장군이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 장군과 협의하여 미군 군수당국이 급히 밥과 김치가 들어있는 K-레이숀을 공급해 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맛이 달랐다. 알고 보니 하와이에 있는 일본인 김치공장에서 조달됐다.
이에 즉각 항의하자 미 군수당국자가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원조 받고 있는 나라에서 식량을 구매할 수 없다는 미 국방성의 규정을 제시했다. 그러나 채 사령관이 고국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농촌진흥청에 긴급 지시하여 한국산 김치통조림을 개발, 공급할 수 있었다고 한다.
라면 입찰에서도 번번이 일본산이 낙찰되어 삼양라면이 밀려나는 실정이었다. 이에 채 사령관이 앞장서서 삼양라면으로 교체할 수 있었다.
월남전 군수물자 공급에 일본이 참여한 것이 잘못됐다고 비판할 수는 없지만 일본은 한국군이 피 흘리는 전선마다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특수를 누리는 재주를 발휘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6.25전쟁 3년간 대한민국은 전 국토가 폐허로 바뀌고 수많은 인명이 피를 흘렸고 월남전에도 수천명의 장병이 전사했지만 일본은 경제적 이득을 최대한 누릴 수 있었지 않느냐는 말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9호 (2015년 5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