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의지의 행동인
‘바른경제’ 의 선구자
朴鐘圭 회장, 바른경제 구상에서 창립까지
바른경제동인회 창시자인 박종규(朴鐘圭) ㈜KSS해운 고문은 백발에 하얀 턱수염마저 깎지 않은 자연산 모습이다. 외양은 노쇠해 보이지만 중병을 수술한 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 제주도 서귀포 산중에서 자연요법으로 건강을 회복하여 우렁찬 목소리가 예전 그대로이다.
88올림픽 후 모두들 ‘노조 때문에…’
박 회장은 올 들어 자신이 창립한 바른경제동인회 회장으로 복귀하여 토론회와 세미나를 열정적으로 주도하며 최근에는 ‘이익공유제’(利益共有制)를 열심히 강조, 전파하려 애쓴다.
박 회장이 바른경제동인회를 구상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노동계의 거리투쟁이 심화되고 있을 무렵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유보됐던 노동권이 노태우 6.29 선언 이후 거리투쟁으로 나왔다가 서울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다시 격화되어 경제계에서는 모두들 “노조 때문에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쏟아졌다.
서울올림픽으로 대한민국의 위상이 소련과 동구권으로 확산되어 한껏 국위가 높아졌다고 자부할 때 노조의 거리투쟁은 국가 이미지에도 타격이었다.
이 무렵 정부는 ‘행정개혁’, 경영계에서는 ‘정도(正道)경영’, ‘고객만족경영’ 등을 논의하고 실천하려 했지만 노동계의 투쟁구호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럴 때 해운업에 오래 몸담고 있던 박종규 회장의 ‘바른경제’ 제창이 뜻밖이자 이색적인 구호로 들렸다.
박 회장의 이름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막강한 위세를 떨친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과 똑같아 ‘행여나’ 하고 쳐다본 경우가 있었다. 알고 보니 바른경제 박 회장은 대한해운공사 공채사원 출신으로 화학물질을 운송하는 ㈜KSS해운 창업자로서 전문 영역을 개척해온 중견 기업인이었다.
박 회장이 어떤 계기로 바른경제동인회를 창안했는지에 관해 지난 99년 12월 KSS해운 우리사주조합이 간행한 ‘손해 봐도 차라리 원칙을 지킨다’는 책 속에 자세히 나온다.
일본 춘투 극복과정 보고 동인회 구상
박 회장은 맥아더사령부 지배하의 일본 개조기(改造期)의 춘투(春鬪) 몸살에 주목했다. 매년 춘투에 쫓기던 일본이 어찌하여 노사 간 동반자 관계를 조성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던 중에 ‘경제동우회’ 조직을 발견했다.
이 단체를 통해 일본의 노사관계 발전을 위한 대화와 토론을 거쳐 각종 정책안을 발굴하고 동반자적 노사관계를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박 회장이 즉시 인간개발원 장만기(張萬基) 원장에게 경영문화 투명화와 합리적인 노사관계 조성을 위한 기업인 모임을 주선토록 부탁했지만 현실적으로 벅찬 과제라는 답변이었다. 이에 박 회장은 경실련 후원을 통해 바른경제실천 운동을 추진키로 했다.
이 와중에 KSS해운 사무직 노조가 결성됐다가 해산하는 곡절을 겪었다. 해운업 30년간 리베이트 없애고 밀수거래를 추방한 KSS해운의 바른경제에 시비가 제기된 것이 못마땅했다. 이 무렵 박 회장의 모친상에 서경석 경실련 사무총장이 조문 와서 바른경제단체 결성을 적극 권장하자 다시 용기를 얻었다.
1992년 12월, 박 회장이 서경석 총장, 도재영, 김종수, 오수관 사장 등과 준비모임을 가진 후 이듬해 3월 30여 명의 기업인 중심으로 발기인 행사를 갖고 3월 30일자로 ‘바른경제동인회’ 창립총회를 가졌다.
한국유리 최태섭 회장,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 김정문 알로에 회장, 광림기계 윤창의 회장, 베가물산 김종수 사장 등 이름 있는 기업인들이 다수 참여하고 KSS해운 설립을 지원했던 이맹기 대한해운 회장도 동참했다.
창립 취지 따른 기업인 6개 실천과제 채택
바른경제동인회는 1993년 6월 17일, 강남 반도아카데미에서 창립기념 세미나 및 기업인 신생활운동 선언식을 가졌다. 기업인 신생활운동이란 천민자본주의의 오랜 악습을 타파하고 시대정신에 맞게 경영풍토 혁신에 앞장선다는 요지였다.
“지난 세월 산업사회 건설 및 경제발전으로 자산을 이룩했지만 환경오염, 사회적 부패, 정경유착, 불공정거래, 촌지(寸志)풍조 등 사회 곳곳에 타락의 물결이 범람한다. 그동안 이윤추구만이 기업의 목적인 양 생각하고 남을 돌아보지 않고 눈 가린 야생마처럼 ‘확대’ ‘확대’를 위해 달려오면서 ‘가족경영’, ‘이면거래’, ‘탈세’ 등 온갖 불미스런 관행이 생겨나 이들 암세포를 수술하지 않고는 21세기 정보화 사회로 넘어갈 수 없다”
이 같은 창립 취지에 따라 기업인의 실천과제 6개항을 채택, 발표했다.
①기업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공기(公器)임을 재확인하고 기업인은 사회로부터 수탁된 ‘선량한 관리자’로서 책임을 다한다.
②정경유착, 배경이용, 부정로비에 의한 이권획득과 불공정거래를 과감히 배격하고 기술개발, 품질향상, 비용절감에 의한 실력배양으로 무한경쟁에 대비한다.
③기업은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하나 사회적 공익과 환경보호가 기업이익에 우선한다.
④노사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공동체임을 확인한다.
⑤기업의 과실(果實)은 재투자를 위한 비축량을 제외하고 주주, 경영자, 종업원에게 공평 분배한다.
⑥일국의 제품 질은 그 나라 소비수준에 좌우됨을 확인하고 ‘소비자 주권’을 적극 옹호하며 최고의 제품생산과 최고의 서비스를 창출한다.
강한 의지로 치병 후 회장직 맡아
바른경제동인회의 창립 목소리가 언론의 평가를 받으면서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재계는 선단식 경영, 족벌경영, 오너에 대한 충성경영 등 다각적인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경영계에서는 경실련과 같은 압력단체로서 또 하나의 시민단체가 나온 것이 아니냐고 의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른경제동인회의 성격과 운동방향은 달랐다. 경영계 내부에서 우러나온 신경영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바른경제동인회 주최 세미나와 강연회가 연속되면서 경영계가 우호적인 시각으로 돌아섰다.
바른경제동인회 발족 이후 박종규 회장이 노사관계 개혁위원회 사용자측 위원으로 참석하여 노사 간 신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노사관계 정립을 강조했다. 그 뒤 규제개혁위원회 등을 통해 바른경제를 줄곧 역설했다. 이를 계기로 바른경제동인회 회원 수가 급증하여 새로운 경제단체의 위상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중견, 대기업 관계자는 물론 학계와 관료 출신들도 다수 참여했다.
이 무렵 동인회를 사단법인으로 전환하여 초대회장에 전 경제부총리 조순(趙淳) 박사를 추대하고 이사장에는 이우영(李愚榮) 전 중소기업청장이 취임했다. 조 박사는 동인회 창립 초기부터 적극 성원해 왔지만 고위공직을 자주 맡아 뒤늦게 회장으로 추대됐다. 또 이우영 이사장도 한은 부총재, 중소기업은행장, 중소기업청장 등 고위공직을 끝마친 후에야 바른경제에 공식으로 참여했다.
바른경제동인회 창설자로서 박 회장은 1995년부터 회사경영을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고문으로 물러났으며 동인회도 부회장직만 맡아왔다. 그 뒤 2005년 8월 위암 수술을 받고 제주 서귀포로 낙향하여 자연요법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의지를 보였다. 박 회장은 서귀포 생활 중에도 바른경제동인회 행사 때는 상경하여 줄곧 참석하는 열성을 보여 주었다.
올 들어 조순 박사가 연로를 이유로 사임을 적극 주장하자 박 회장이 주위의 뜻을 받들어 바른경제동인회 회장직을 맡았다. 단체 창설자로서 처음 회장직을 맡아 자신의 주주제안으로 KSS해운에 채택된 임직원 이익공유제 확산을 위해 목청을 높이고 있다.
박 회장은 투병과 치병과정을 통해 다소 야윈 모습이지만 스스로 건강을 자신할 만큼 활기를 회복했다. 이는 곧 바른경제 선구자로서 의지와 신념의 표현이라고 믿어진다.
박 회장이 전면에 나서자 바른경제동인회 활동이 새삼 활기 띤 모습이다. 동인회 창설정신에 채찍을 가해 대한상의, 전경련 등 5대 경제단체에 이어 제6의 경제단체로서 확고한 위상을 정립하겠다는 열의가 넘치고 있는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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