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사조직 ‘하나회’ 대부
윤필용 장군 5주기
실형선고 재심청구 없이 별세


글/박민식 (예)육군대령

▲ 윤필용 장군의 5주기를 맞아 7월 24일, 옛 부하들이 모여 추모식을 올렸다. <사진=박민식 (예)육군대령>

군 내 하나회의 대부로 알려진 윤필용 장군의 5주기를 맞아 지난 7월 24일, 경기도 성남시 사설 메모리얼 파크에서 옛 부하들이 모여 추모식을 올렸다. 고인이 수도경비사령관 시절,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과 함께 3대 세도가로 불린 고인의 추모식은 쓸쓸했다.

베트남전 사단장과 전투중대장 사이

윤필용 장군은 1968년 후반기, 베트남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에 주월 맹호부대 전투사단장(소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필자는 당시 윤 장군 휘하에서 모두가 기피의 대상으로 꼽는 혜산진 연대 4중대장을 맡았다.
푸엔성 동수완군 하방부락에 소재한 중대 전술기지에서 중대원 200여명과 함께 약 450㎢의 작전책임지역의 평정 및 군사작전을 맡아 24시간 지역을 통제해야만 했다.

▲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 <사진제공=농협중앙회>

윤 장군은 파월 전 육군 방첩부대장으로 명성이 자자했기에 사단장으로 취임하면 과감한 공세작전으로 부대를 지휘할 것으로 예상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소대장, 중대장들은 전투작전에 따른 부하들의 희생을 각별히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윤 장군은 공명심이 앞선 어느 지휘관들과는 달리 부하 장병들의 희생을 최소화하려는데 역점을 두고 지휘했다. 장군은 무리한 작전은 철저히 배제하고 작전책임지역을 평정, 통제하는데 주력하여 사단장 재임기간 중 대·소 작전에서 비교적 아군의 희생이 적었다. 윤 장군 재임 중 대규모 작전은 1969년 10월 ‘창군기념 작전’ 단 한 번뿐이었다.
필자는 중대장 재임 중 10회 이상 작전에 참가했지만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최대의 전과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사단 내 위관급 장교로는 유일하게 을지무공훈장을 추천하여 수훈했고 ‘강재구 모범 중대장 상’ 수상으로 귀국 후에는 수도경비사(현 수도방위사)로 배치되어 2년여 근무할 수 있었다.

하나회의 결속력과 승진, 전보특혜

윤 장군의 수도경비사령관(1970~1973) 시절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특히 정치권과 군 고위층 간의 접촉이 잦았던 시기에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 경제 통치철학에 충성했다고 믿어진다.
윤 장군은 박 대통령의 사단장 시절 참모였고 5.16 혁명 후 최고회의 비서실장을 거쳐 군으로 복귀한 뒤 육군방첩부대장(현 기무사령관)으로 제3공화국의 정치적 안정을 측면 지원했다. 윤 장군이 육사 정규 4년제 출신 11기부터 15기까지 정예장교를 선발하여 ‘하나회’를 조직한 것도 박 대통령의 승인을 받은 행위였다.
하나회는 그로부터 육사 30기 이후까지 매 기별로 10명 내외를 선발하여 진급과 보직 등의 특혜속에 군 내부의 저항세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아 특권 집단화 되었다는 사실이다. 육사 출신들은 전국 고교에서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여 국비로 4년간 전문 군사 지식과 교양 교육을 받고 임관되어 초급장교 시절에는 경쟁이 없었지만 고급장교로 진급하는 과정에는 동기생들의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하나회는 특유의 결속력에다 밀어주고 이끌어주는 진급과 보직의 특혜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1979년 10.26 국변사태 이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12.12 군사정변에 의한 집권도 하나회의 조직력이 결정적인 배경으로 드러난 바 있었다.

실형선고 수용, 재심청구 않고 별세

윤필용 장군이 수경사령관으로 위세를 떨칠 때 박 대통령의 정권 안정을 뒷받침하려는 충성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사석에서 박 대통령의 연로화와 후계자 양성을 걱정하는 우국충정 심정이 잘못 유출되어 윤 장군의 몰락을 가져 왔으니 뜻밖의 불운이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윤 장군과 육사 8기 동기생인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수사를 지시하여 윤 장군이 구속되어 군사재판에 의해 사형구형, 무기징역 언도, 15년형으로 감형 및 2년여 수형생활 끝에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윤 장군은 실형 선고 후 육군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직업군인으로서 군인연금도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렇지만 고인은 옛 주군인 박 대통령에 대한 원망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고 주어진 형벌을 감수했다.
윤 장군과 함께 구속형을 받은 손영길 준장, 김성배 준장, 신재기 대령 등 사후에 상급 법원에 상고하여 무죄를 선고 받고 복권됐다. 그러나 윤 장군은 가족과 주변인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재심을 청구하지 않은 채 2010년 7월 84세의 일생을 마쳤다.
이에 대해 윤 장군의 옛 부하들이 중심이 되어 뒤늦게나마 재심을 청구하여 현재 대법원의 최종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윤 장군이 재심을 거쳐 복권된다면 무명의 사설 메모리얼 파크에 잠들고 있는 장군의 영혼이나마 국립 현충원 묘역으로 이장될 수 있지 않겠느냐 기대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3호 (2015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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