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기호품에서 중독성까지

담배 한담(閑談)

역사와 생활 속의 유죄와 무죄

담배한모금.jpg

<▲담배 한 개비, 담배 한모금은 전선의 삶과 죽음 길을 동반한 일종의 전쟁 상품이었다. 오른쪽 사진은 화랑담배>

서울 충무로 뒷골목에 단 하나 남아 있는 재래식 다방은 담배를 피워도 주인 마담이 야단치는 법이 없다. 이곳 희귀한 흡연다방을 수소문하여 찾아오는 애연가들의 담배 한담(閑談)이 끝이 없다.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

전쟁영웅 백선엽(白善燁) 장군의 ‘내가 겪은 6.25’ 시리즈에 나오는 화랑담배 이야기는 눈물이다. 대한민국 운명이 풍전등화이던 왜관 유학산 혈투때 갓 부임해온 소대장이 화랑담배갑 표지에 소대원들 명단을 작성하여 공격전투에 나섰다. 이튿날 병사들을 점검하니 신병들의 80~90%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구시를 사수한 다부동 전투는 이들 소모품 소위와 하루살이 신병들의 피로써 승리했다. 이 때문에 당시 군가는 “화랑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라고 읊었던 것이다.

담배 한 개비, 담배 한모금은 전선의 삶과 죽음 길을 동반한 일종의 전쟁 상품이었다. 담배의 유래가 임진왜란으로부터 시작됐다는 역사가 이를 말해 준다.

왜란 초기에 조선궁궐까지 유린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가 패퇴길에 들어서자 동래와 울산기지 안에서 하염없이 피워댄 담배가 조선병사에게로 전파된 모양이다. 그뒤 병자호란때도 청군진영에서 담배가 흘러나온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다가 6.25때 참전한 미군들이 양담배를 선보이고 국군의 화랑담배가 휴가병들에 의해 시중에도 알려졌으니 담배는 단순한 기호품을 넘어 최고로 긴장하고 흥분할 때 극한상황을 이겨내는 매개물이나 다름없었다.

노루모.jpg

<▲대한민국 산업화의 주역들은 과로와 피곤에 절어 위장약 노루모와 겔포스를 달고
다니고 88담배 피워가며 건설과 수출에 매진한 세대이다.>

GOP 전선에서 빌려 피운 화랑담배

1960년대 강원도 철의 삼각지 GOP 소대장으로 근무할 때 적막강산의 반려가 담배였다. 장교는 병사들과 침식을 같이 하지 말라는 규칙에 따라 당번병 한명과 따로 떨어져 생활했기에 밤이면 말상대 없는 벙어리신세로 담배만 피웠다. 당시 북한은 전력이나 후생복지가 우리보다 월등하다고 과시하며 밤낮없이 대남 비방선전을 하니 GOP 병사들은 부들부들 떨고 올챙이 소대장은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때 담배마저 떨어졌으니 병사들의 화랑담배를 빌려 피울 수밖에 없었다.

폭설이 쏟아지거나 장마가 계속되어 보급차가 들어오지 못하면 달리 구할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길이 뚫려 주문한 아리랑 담배가 도착하면 꼭 갚았지만 헌병대가 나와 정기적으로 병사들의 소원수리를 조사하면 “소대장이 병사들의 화랑담배를 뺏어 피웠다”는 지적이 나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비록 갚아주었다지만 병사들의 담배를 뺏어 피웠으니 규정위반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장교들에게는 화랑담배가 지급되지 않고 각자 개인 돈으로 사서 피우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절의 궁색했던 담배버릇이 사회에 나와서도 남아 있어 여기저기서 얻어 피울 때 “형편이 안되면 끊어라”는 핀잔도 받았지만 50여년간 원고지와 씨름하느라 금연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중노동 시절 노루모 · 겔포스와 담배

5.16 정부가 밀수단속과 국산품 애용을 철저히 강조할 때 양주와 양담배가 성가신 물품이었다. 무교동 맥주집에서 외상술을 마실 때 양담배 소년이 외상으로 피우라며 안겨 주면 못 이긴 채 받지만 나중에 단속에 걸려 벌금을 물게되니 속이 상했다.

1970년대 산업화 시절엔 새벽출근, 통금직전에 귀가하는 중노동이라 퇴근길은 대포집 담배연기 속에서 상관들의 흉을 안주로 삼는 것이 버릇이었다.

그러나 안목이 높은 친구들은 양주와 양담배가 죄가 되지 않고 통금이 없는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뒤 대한민국이 산업화에 성공하고 민주화를 이룩하자 이민갔던 친구들이 중년이 넘은 나이로 귀국하여 싹수가 없어보이던 조국이 크게 발전한 것이 신기하다고 감탄했다. 그들은 우리네가 과로와 피곤에 절어 위장약 노루모와 겔포스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소주 마시고 88담배 피워가며 건설과 수출에 매진했던 공적은 물어보지도 않고 노후 복지제도에만 관심이었다.

비록 담배 유해론을 반박하고 간접흡연 피해를 부인할 처지는 아니지만 우리의 생활 속의 ‘담배효과’를 부정할 수는 없다. 최근 흉악범 문제로 국가와 사회가 소란이지만 사회와 격리된 교도소 내에서는 담배 한갑에 수만원씩 은밀히 거래되고 있다는 고발이 끊이지 않는다. 고독과 회한 속에 자신과의 사투를 벌이는 교도소 안의 사람들에게는 담배 한모금으로부터 천금같은 위안을 받는 모양이다.

과거 유명 정치인이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가는 마지막 길에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담배 한모금”이라고 대답했던 일이 있었다. 중벌 혐의자가 묵비권을 고집할 때 형사가 “인간적으로 이야기 하자”면서 담배 한 개비를 권하자 눈물을 흘리며 고백했다는 심경변화도 자주 있었다.

이렇게 짚어 보면 담배의 유죄와 무죄 판결은 단독 판사가 맡는 것은 벅차고 노련한 경륜의 합의부에서나 맡아야할 중요사안이라고 볼수 있다.

독과 약효의 남령초, 담파고

담배는 남방에서 전해 왔다고 남령초(南靈草)로 불리었고 담파고(淡婆姑), 담파귀(膽破鬼) 또는 상사초(相思草), 정녀혼(貞女魂)에다 심지어 천금초(千金草)라고 불렀다고 한다.

대강 짐작하기로는 풀은 풀이지만 귀신과 같고 혼을 빼는 것 같고 약효가 있는 것 같다는 인식이 담배에 실려 있다는 느낌이다.

임진왜란 때 담배가 상륙한 지점인 동래, 울진의 ‘담방귀 타령’이 남아있다. “동래, 울산 담방귀야, 너희 나라 좋다더니, 어찌하여 왔느냐”는 타령이 담배유행을 확산시켰을 것이다.

담배에 관한 해독성과 약효성이 옛 선비들의 글속에 많이 전해온다.

“한번 빨면 세 번 재채기한다더라. 부인네가 피우면 임신할 수 없고 임신녀가 피우면 낙태한다더라”는 소문이 담배 유독성을 대표하지만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는 기록이 더욱 많다.

조선 인조때 장유(張維) 대감은 어전회의 때도 담배를 피웠다는데 그래도 신상이 무사했다면 임금도 알고 넘어 갔다는 말이다. 장대감 글에는 담배가 “폐를 상하지 않소”라고 물으니 “그러지 않소, 체기(滯氣)를 덜어주오”라고 답변했다니 약효가 있다고 믿은 모양이다.

이수광(李光)의 지봉유설(芝類說)에는 “병자가 죽통(竹筒)에 담아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뱉는다. 이때 담을 제거한다. 술을 깨게도 한다”고 적었으니 역시 약초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유곽잭웅.jpg

<▲신윤복의 ‘ 유곽쟁웅’ -기녀가 자신의 키만한 담뱃대를 물고 유곽앞 난동을 구경하고 있다>

광해군 ‘단영령’도 작심 3일

역사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했지만 이 시절 담배가 일종의 신약으로 인식되어 시중으로 널리 퍼졌다는 기록이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부시와 부싯돌로 담뱃불을 붙였다니 그 정경이 어떠했을까. 짐작가는 대목이 많다.

이때 곡식 대신에 담배를 심는 경작농가가 늘어 조정에서 단연운동을 벌였지만 ‘작심 3일’(作心三日)로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밀조나 밀수, 밀매 등 은밀한 거래는 예나 지금이나 권력으로서도 단속이 어려운 법이다.

조선초 내내 흉년이 들면 소 잡아먹지 말라는 우금령(牛禁令)이 내리지만 밀도살이 성행하고 쌀이 모자라면 주금령(酒禁令)이 내리지만 사대부 가정부터 밀조하다 들키면 약주(藥酒)나 제주(祭酒)를 빚었다고 변명했다. 또한 궁궐용 목재확보를 위해 전국 곳곳에 송금(松禁) 지역을 설정했지만 야금야금 도벌을 막아내지 못했으니 돈벌이가 되는 담배경작을 어명 한마디로 근절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조선 풍속화를 보면 선비나 기생이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긴 담뱃대가 유행이고 멋이다. 농민들과 상민들도 곰방대 담배로 땀을 씻고 잠시 휴식했다. 신윤복의 풍속화인 ‘유산행차’를 비롯하여 기방 ‘유곽쟁웅’이나 ‘야금모항’ 등에는 기녀들이 자신의 키만한 담뱃대를 물고 흥청이는 장면들이 빠지지 않는다.

청나라 ‘참형’에도 만주 밀수출 떼 돈

인조 18년 1640년, 임경업(林慶業)이 청나라로 세공미(歲貢米) 1만석을 싣고 갈 때 몰래 담배 한배를 끌고가 큰 이익을 봤다고 한다. 당시 청나라에는 담배 공급이 딸려 ‘한 웅큼에 100문(文)’ 값으로도 얼마든지 팔 수 있었다고 전해온다.

조선일보 큰 논객 고 이규태(李圭泰)씨의 ‘개화 100경’에는 서북지방의 ‘담바부자’이야기가 나온다. 만주지방에서는 담배를 ‘담바’라고 불러 만주로 담배를 밀수출하여 떼돈을 번 부자들을 ‘담바부자’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땅이 잎담배 경작에 최적이라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만주에서 조선담배 값은 10배를 넘고 20배에 달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에서 끌려간 포로가 10만 명을 헤아렸는데 청나라 관리들이 봉천성 앞에 인신 매매장을 열어 돈 받고 노비로 팔았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이를 만류할 힘이 없어 가족들이 몇백냥씩 준비해서 포로들을 귀환시켜야만 했다. 이때 조선 부녀자들이 은화 대신에 담배를 이고 지고 가서 흥정하여 남편들을 무사 귀환 시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소문이 퍼져 나오자 당태종이 진노하여 조선정부에 엄중 항의하고 만주지역에 금연령을 내렸다. 조선담배 금지령을 위반하면 참형으로 다스렸지만 조선 땅보다 20배나 비싸게 팔리는 담배 밀거래 시장을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서북지방 ‘담바부자’나 만주사람들이나 ‘죽을 각오로’ 담배 밀거래에 깊이 빠졌으니 담배의 마력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담배 하인 ‘연노’ 양반나들이 수행

조선조 말에 접어들면서 담배가 현실도피나 체제저항 운동으로 나타났다. 상민들이 양반댁 앞을 지나면서 긴 담뱃대를 물었다고 끌려가 가혹한 사형(私刑)을 당하고 양반마저 궁궐 앞에서 흡연했다고 정 3품 벼슬이 날아가기도 했다. 이 무렵 백정들이 인권운동을 벌이면서 “우리도 담뱃대로 피울수 있다”는 담배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개화기적 외국인 선교사들이 “조선에는 남녀평등이 철저하다”고 기록했다. 부녀자나 처자들을 막론하고 담뱃대를 물고 유유히 걷고 다니는 장면을 묘사한 글이다. 지체 높은 부녀자의 가마행차 뒤에는 담뱃대와 재떨이를 든 비녀(婢女)가 따르는 모습이 신기하게 비쳤다.

당시 양반가문의 나들이에는 담배 시중을 위한 연노(煙奴)가 수행하기 마련이었다. 일제하에 백범 김구에게 독립자금을 많이 헌납한 경주 부자 최준(崔浚)씨의 한양 출입때는 장손 최염(崔)씨가 요강과 재떨이를 들고 수행했었다고 들었다. 최부자가 광화문 거리에서 볼일을 볼때 장손이 요강을 내밀어 받아 내고 긴 장죽에 담뱃불을 붙여 드리고 재떨이로 재를 받아 버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배꼽을 쥐고 웃을 일이 아니라 친 장손을 연노(煙奴)처럼 수행케 한 경주 최부자의 인간존중이 시대를 얼마나 앞서 갔느냐고 평가해야 할 일이다.

대원군 시절에는 ‘담뱃대 사치’가 서원 철폐와 함께 개혁의 대상이었던 사실이 TV 드라마에도 나왔다. 평민들의 담뱃대는 기껏 놋쇠로 만들었지만 지체 높은 이들은 은이나 주석으로 만들어 멋을 내고 검은 오죽(烏竹)으로 담뱃대 길이가 석자 넘게 거드름을 피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담뱃대 사치가 쓸데없는 권세와 권위로 작용한다고 판단한 대원군이 품계에 따라 길이를 줄이도록 명하고 아무리 길어도 석자를 넘길 수 없다고 규제하니 선비 세계가 한동안 발칵 뒤집어졌었다.

이렇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담배이야기를 주섬주섬 붙여 모으니 끝도 없지만 처음 담배가 우리나라에 도래한 이후 숱한 곡절과 화제와 추억을 쌓아 담배 유죄와 무죄가 겹겹이라는 소감이 ‘담배 한담’ 속에 넘칠 지경이다. (烋)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