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호]

북한, 중국 비밀협정?

백두산은 무사한가

‘장백산 공정’보며 역사공부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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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황원갑(소설가, 역사연구가)

살아오는 동안 명산을 많이 찾아보았지만 정작 정상까지 오른 적은 드물었다. 산행을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대체로 답사를 하러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명산들은 모두가 뜻 깊은 역사의 현장이다.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봉우리와 골짜기마다 갖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유서 깊은 고찰(古刹)을 품은 명산도 있고, 그 언저리에 역사를 바꾼 전쟁터가 펼쳐진 산도 있다. 그래서 나는 길을 떠날 때마다 관광객의 눈으로 경치를 보지 않고 순례자의 눈으로 역사를 읽으려고 애쓴다.

백두산과 금강산은 우리나라가 세계에 자랑하는 명산 중의 명산이다. 젊은 시절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예전에는 중국과는 국교가 없었고, 북한과도 왕래가 없었기에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백두산을 처음 찾은 것이 15년 전.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 7월이었는데, 그해에 내 나이도 50세였다. 그때 어느 대학원 사학과 답사반과 동행하여 15일간 고구려와 발해 유적을 답사하는 기회에 백두산에도 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겨레의 어머니 산 백두산에 올라보고, 또 2000년 봄에는 금강산도 찾아가봤으니 이는 내 한 생(生)의 행운이며 보람이라고 생각한다.

백두산과 장백산 사이

그해 1995년 7월 4일 중국 쪽 백두산 산행의 들머리인 이도백하(二道白河)에 도착, 호텔에 여장을 풀고 몸부터 씻었다. 심양(瀋陽) 도선국제공항을 통해 중국에 입국한 뒤 3일간 답사에 강행군을 한 데다 밤새 기차여행에 시달렸으므로 온몸이 땀에 절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어머니 산의 품에 안길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그토록 대망하던 백두산 산행을 시작했다. 산문(山門)을 들어서자마자 먼발치로 백두산 영봉들이 눈에 찼다. 가슴이 뭉클했다. 중국 땅을 거쳐서 찾아온 못난 자식이지만 백두산 영봉들은 어머니의 무한한 자애로 용서하며 반겨주는 듯했다.

백두산 정상부는 한여름의 멀쩡하게 맑은 날이라도 갑자기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안개와 구름이 사방에서 자욱하게 몰려오고, 비바람 모래바람 우박이 사납게 몰아치는 등 기상상태가 예측불허로 천변만화, 변화무상하다. 가까스로 정상부에 올라도 천지 일대의 온전하고 맑은 장관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풍자와 해학으로 35년간 주유천하한 방랑시인 김삿갓도 ‘금강산은 여러 번 올랐고 묘향산도 두 번이나 올랐지만 백두산은 멀리서만 보았지 단 한 차례도 오르지 못했다’고 탄식했는지 모른다.

산문을 지나면 곧 악화(嶽樺)삼거리. 여기서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은 천문봉(2,650m)으로 오르는 자동차길이다. 지프로 흑풍구(黑風口)를 지나 천문봉까지 오르는 데는 20분도 안 걸렸다. 차에서 내려 천문봉으로 올라가 천지를 둘러보는 데도 10분 정도면 충분했다. 이래서야 백두산에 올랐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악화삼거리까지 되돌아 내려온 다음, 이번에는 제대로 된 백두산 산행에 나섰다.

악화삼거리에서 오른쪽 천지길(장백폭포길)을 택해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다. 곧 가파른 너덜길에 들어섰다. 왼쪽으로 장백폭포에서 쏟아지는 송화강 원류 이도백하를 내려다보면서 힘겹게 올랐다. 길은 오른쪽으로 천인단애의 바위 절벽을 따라서 실낱같이 이어진 아슬아슬한 벼랑길이다. 젊은이들에게 자주 뒤처지자 연길(延吉)에서부터 안내를 맡아준 이민3세 동포 처녀 한옥희(韓玉喜) 양이 길동무 겸 말동무를 해주었다.

중국은 지금 ‘장백산 공정’ 한창

마침내 넓은 천지(天池)가 별유천지(別有天地)인 양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졌다. 현재 천지는 북한과 중국의 비밀협정에 따라 양측 국경선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이에 따라 천지를 둘러싼 2,500m이상 16개의 고봉 중 7개는 북한 측에, 9개는 중국 측에 속해 있다고 한다.

천지 맑은 물을 배부르게 마셨지만 하산하는 마음이 무거운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해 우리 땅을 밟고 백두산을 찾지 못했고, 최고봉인 장군봉 정상에도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큰 탓이었다.

중국이 중국사의 상한선을 천년 이상 끌어올리는 역사개조작업인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한 것은 내가 백두산과 만주 답사를 마치고 돌아온 뒤인 1996년부터,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국 변방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였다. 그런데 나는 만주를 답사하면서 곳곳에서 이미 그 조짐을 보았다.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 안내판마다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 통치기구였다’느니,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이라느니 하는 헛소리로 도배를 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모자라 최근 중국은 ‘백두산은 창바이산(長白山), 창바이산은 중국산’이라고 주장하며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까지 빼앗아가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니 참으로 속이 터진다. 중국은 ‘장백산공정’을 구체화하기 위해 창바이산 생수와 창바이산 인삼 브랜드를 개발하고, 최근에는 백두산 인근 지역의 학교마다 앞에 창바이산을 붙여 교명까지 바꿨다고 한다. 청소년들의 머릿속에서 백두산을 지워 없애는 대신 창바이산을 주입시키려는 고도의 교활 음흉한 교육방침이다.

역사교육 홀대는 망국의 위기

중국이 이처럼 백두산을 창바이산으로 둔갑시키려는 저의 역시 동북공정과 마찬가지로 중화패권주의의 발로라고 할 수밖에 없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국들은 모두 오랑캐라는 오만무례한 중화제국주의 사상과 시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사의 영역이 압록강·두만강 이남에 국한된다.’느니, ‘한국사의 뿌리는 신라’라느니, ‘고구려사는 희미한 추억이고 발해는 말갈족의 역사’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사학자가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고 매우 개탄스럽다. 심지어는 ‘고조선과 고구려사를 중국사 한국사 구분하지 말고 요동사로 부르자.’는 얼빠진 사학자도 있다. 여전히 중화제국주의 사대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학문에는 국경이 없지만 학자에게는 국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고구려·발해사에 이어 고조선·부여사까지 빼앗기고 나면 우리 역사에 무엇이 남겠는가.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자초할 정도로 어리석고 극단적인 국수주의는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국가적 자존심과 민족적 주체성까지 망각해서야 될 일인가. 통렬한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리민복과 부국강병은 외면하고, 역사교육을 홀대하면 망국의 위기는 언제든지 찾아오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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