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정신으로 현대사 격동세월 일관

유도10단 유성(柔聖)
장경순장군 유도인생
유도정신으로 현대사 격동세월 일관
육군유도, 한국유도 세계화 기반조성

(사)자유수호국민운동을 이끌고 있는 올해 아흔다섯 노장군이 유도계의 최고 명예인 10단 유성(柔聖)으로 추대되어 지난 2일 하오 강남구 도곡동 군인공제회관에서 국내외 유도인들에 의해 축하연이 마련됐다. 이날 장경순(張坰淳) 장군 10단 승진 축하 행사는 세계한인유도동우회(회장 장민종)가 주최하고 한국유단자회(회장 정재영)의 후원으로 치러졌다.

▲ 장경순 장군(왼쪽에서 다섯번째) 10단 유성(柔聖) 추대 축하연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사진. <사진=(사)자유수호국민운동>

유성 축하연에 각계인사 300여명

이날 축하 행사에는 국내외 유도인들은 물론 대한민국헌정회, 자유수호국민운동의 관련자 및 문화예술계 인사 등 300여명이 참석했다.
축하연은 장경순 유성의 학창시절 수련기에서부터 군과 정·관계에서 활약하며 한국유도 발전에 헌신한 공적을 담은 동영상을 감상하고 ‘장경순과 한국유도’ 평전 및 앨범을 유성 추대 기념으로 증정했다.
행사를 주최한 세계한인유도동우회 장민종 회장은 개회사를 통해 장 장군이 6.25 참전유공, 5.16 혁명주체로서 정·관계로 진출하여 한국유도 발전에 획기적인 공적을 쌓아 유도강국의 위상을 확립했다고 찬양했다. 이어 나라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흔들릴 때 자유수호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여 지금껏 우국충정을 불태우는 솔선수범을 높이 추앙한다고 말하고 머지않아 장군의 백수(百壽) 축하연에 다시 만나기를 약속한다고 강조했다.
이학재 전 한양대 체육대학장이 집필한 장경순 장군 평전은 5.16 당시 유도 7단에 최고위원과 농림부장관을 겸직한 후 국회부의장으로 진출하여 1964년 12월 대한유도회 제3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유도계 내분을 수습하고 재정기반을 확충하여 오늘의 한국유도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기술했다.
축하 행사에 이어 장 장군은 답사를 통해 자신이 대한유도회장을 맡았던 1960~70년대는 대한민국이 약소국가에서 근대화를 위해 희망과 열정이 충천하던 시기라고 회고하고 유도계의 오랜 숙원이던 유도회관을 마련하여 한국유도가 질적이나 양적으로 세계적인 유도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장 장군은 유도는 기술(技術)이 아닌 도(道)로써 문무를 겸비한 신사도(紳士道)가 돼야 한다는 옛 스승의 가르침을 회상하며 오늘의 유도인들은 국내외 어디에 거주하든 한국유도의 주인으로서 나라사랑의 정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나는 아직도 멈출 수 없다’는 유도인생

장 장군은 일제 강점기 배재중학에서 유도에 입문하여 일본유학 시절 일본유도를 배우고 학도병과 광복군을 거쳐 육사 7기 특별반으로 임관되어 3성 장군으로 전역하기까지 줄곧 유도를 연마해온 전형적인 유도인이다.
1956년 3월 육군대령 시절 육군유도부장으로 군의 체력단련을 위해 유도를 가르치고 5.16 혁명 후에는 1964년 이후 1983년까지 20여 년간 대한유도회장, 세계유도연맹 부회장, 한국유도고단자회 명예회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4년 10단으로 승단, 유성(柔聖)으로 추대됐다.
장 장군의 유도인생은 2007년 5월 도서출판 오늘이 출간한 ‘나는 아직도 멈출 수 없다’는 자서전에 자세히 나온다.
장 장군은 1922년 3월, 전북 김제군 만경면에서 출생하여 만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유학, 배재중(5년제)에 입학하면서 유도를 만났다. 이때가 1936년 4월로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에 우승하던 해였다.
장경순 학생은 건장한 체구에 스포츠 만능선수로 럭비에서 권투, 검도, 농구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그렇지만 스스로 ‘싸움학생’, ‘문제학생’이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전북 김제에서 올라온 ‘전라도 사투리’를 조롱하던 학우들에게 분을 참지 못해 주먹을 자주 날려 피투성이 모습이 잦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배재중 유도사범 한병철 선생이 훈련 중인 장경순 학생을 보고 “너 유도를 해야 겠다”고 지시하여 조선연무관 수련생이 됐다. 이곳 연무관 이경석 사범이 바로 “유도는 문무(文武) 겸비 신사도”라고 가르쳐 평생 유도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일본 강도관에서 본격 유도수련

1943년 2월, 배재중 5학년 졸업을 앞두고 경북 문경 출신의 ‘김경동 군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구속되는 바람에 졸업시험을 못 봐 대학진학의 길이 막혔다. 김경동 군은 사회주의 클럽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활동에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그의 하숙집을 수색할 때 김경동 군이 빌려간 ‘장경순 용’이라고 표시된 소설책 ‘어머니’도 압수됐다.
이 때문에 장경순이 경찰서에 수감된 첫날 모진 물고문을 받고 유치장으로 돌아오자 감방 선임자인 대머리형 중년 신사가 형사들의 고문 수법을 설명하며 대응하는 요령까지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그가 바로 남로당 총책 박헌영(朴憲永)의 오른팔로 남로당 대변지인 해방일보 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정판사(精版社) 위폐사건을 일으킨 주범 권오직이었다. 권은 뒤에 월북하여 부수상까지 지냈지만 김일성이 박헌영을 미 제국주의 간첩이라며 숙청할 때 함께 처형됐다.
이 사건으로 김경동은 7년형을 선고 받고 장경순은 무혐의로 한 달 만에 석방됐다. 그 후 대학진학을 못한 장경순은 유도에 매진하다가 조선연무관 이경석 사범의 소개장을 들고 도쿄 강도관(講道館)의 도쿠산보 사범의 제자가 되어 본격적인 유도 수련을 시작했다. 이 무렵 일본 유도계의 거물로 꼽힌 도쿠산보 외에 미후네 규조 사범의 지도도 받을 수 있었다.
또 강도관 수련생 시절, 배재중 선배 김홍규 씨가 동양대학 학생회장을 맡고 있어 그를 통해 동양대학 척식과에 입학하여 대학입학 소망을 이루었다.
한편 사회주의 운동에 빠졌던 김경동은 그로부터 8년 뒤인 장경순이 육군 대위 시절 불쑥 나타나 “어쩌다가 공산당에 심취했다가 그곳에 들어가 보니 틀렸더라”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재봉사 공장을 세웠으나 사업자금이 모자라니 돈 좀 빌려달라고 졸라 전주에 있는 집 한 채를 팔아 그냥 주었지만 끝내 사업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뒤 6.25가 발발했을 때 김경동은 조선전업(한전의 전신) 노조위원장으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완장을 차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제 학병, 광복군, 국군의 군인 삶

동양대학을 졸업한 후 장경순은 유도사범 미후네 규조의 제자가 국장을 맡고 있는 내각 은급국(恩給局)에 취업하여 안정된 생활에 유도 수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정세가 불안하여 귀국을 준비하다 군수품 공장으로 옮겨 하오에는 유도에 전념하는 조건으로 입사했다.
어느 날 본국에서 ‘부친 위급 급거 귀국’ 전보를 받고 관부연락선 편으로 본가로 돌아오니 부친은 건강하게 계셨다. 전국(戰局)이 수상하여 본가로 불러들이기 위해 거짓 전보를 띄웠던 것이다. 그러나 귀국 소식을 듣고 매일 같이 일본형사들이 찾아와 졸라대어 학도병으로 지원했다. 중국 남경으로 끌려가 3개월 군사 기초훈련을 받고 다시 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하여 상하이에서 견습 사관으로 근무하다 8.15를 맞았다.
일본군이 무장해제 되자 장경순은 광복군에 편입됐다가 미군 LST 편으로 귀국하여 고향에서 토마토 농사를 통해 농촌부흥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이때 학도병 친구가 전주 북중교사로 근무하면서 교장과 상의하여 장경순을 훈육교사로 발령, 유도부를 창설하여 제자들을 길렀다.
중학교 교사로 자리를 잡고 있을 무렵 김백일 장군이 학교장을 맡고 있는 육사 7기 특별반 모집에 응모하여 육군소위로 임관되어 대한민국 장교의 길로 나섰다. 당시 중대장이 바로 박정희 대위였다. 그 뒤 1950년 장경순 소령이 대구 CIC 특무부대 차장일 때 박정희 중령을 다시 만나 특무대장 한웅진 중령과 셋이 술친구 사이가 됐다.
당시 박정희 중령 33세, 장경순 소령 28세에 한웅진 중령은 24세로 나이 차가 많았다. 그렇지만 형님, 아우님으로 호칭하며 격의 없이 어울렸다. 나중에 5.16 혁명주체에 가담하여 장경순 장군은 최고위원, 농림부장관을 거쳐 국회부의장으로 정치적 소통과 협상력을 발휘했다. 그러다가 10.26 사태 후 공직에서 은퇴하여 야인(野人)으로 돌아갔다.

호국위원회 구성, 자유수호국민운동

장 장군의 정치이력은 1963년 9월 중장으로 예편, 공화당 사무총장으로 출발하여 1979년까지 5선(選)의원에 6~8대 국회부의장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정계 은퇴 후 한국유도회 회장으로 유도계에서만 활동하다가 90년대에 대한민국 헌정회 부회장, 원로회의 의장 등 명예직을 맡았다.
그러나 좌파정권 아래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흔들리는 시국을 보고 2002년 4월부터 자유수호국민운동을 시작하여 상임의장으로 오늘에 이른다. 자유수호국민운동을 위해 7인의 호국위원회를 구성했다. 정래혁 전 국방부장관, 함명수 전 해군참모총장,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 김성은 전 해병대사령관 겸 전 국방부장관, 이대용 전 주월공사, 장동운 전 6.25참전 소대장회장 등.
호국위원회는 발족과 함께 김정일 정권을 반인륜적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주적(主敵)개념 재확인, 연방제 통일론 배제, DJ와 김정일 차중 밀담 공개 촉구, 한총련·민노총·전교조 등 불법 용공세력 규정 등을 담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곧이어 각계인사 100인이 참여한 자유수호국민운동을 발기하여 자유수호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여 왔다.

유도인생 속의 술 이야기들

장 장군의 유도인생 편에는 술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의 애주는 집안의 내력이라고 소개했다. 어릴 적에 배가 아프면 모친께서 매실주를 약주라며 마시게 했노라고 한다.
집안의 술 내력이 혁명정부 시절 호주가인 박정희 대통령과 민정시찰 길에 있었던 에피소드가 많고 농림부장관 시절에는 출입기자들과 술 시합을 벌이기도 했다. 1962년 ‘타이거 송’으로 불린 송요찬 장군이 내각수반일 때 부산 행사를 마치고 호텔에서 회식할 때 송 장군이 과일 유리그릇에 정종 한 병을 쏟아 붓고는 금방 벌컥벌컥 마신 후 잔을 돌렸다.
참석자들이 모두 기절했지만 장 장군이 대작하여 밤늦도록 정종 3병씩을 마신 기록을 세웠다.
장 장군의 술친구로는 단연 최두선 전 국무총리와 언론인 신상초 씨를 꼽는다. 최두선 총리는 일본 와세다 출신에 동아일보 사장을 맡고 있었고 신상초 씨는 동경제대 출신으로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국회의원을 지냈다.
혁명정부 시절 이들 셋이 명동에서 만취한 후 군용 지프 편으로 아현동 신상초 씨 댁에 다시 들려 밤새껏 술판을 계속하기도 했다. 1964년 4월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이 노환으로 별세하여 최두선 국무총리는 행정부의 조문사절, 장경순 국회부의장은 입법부의 조문사절로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두 분은 술 대작으로 태평양을 건너갔지만 말짱한 정신으로 맥아더 장군을 조문했노라고 기록했다.
유성 장경순 장군의 유도 10단 인생은 일제로부터 해방정국의 혼란과 6.25 참전, 5.16 거사를 거쳐 10.26 사태로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두주불사’의 호주가로 일관했다. 아흔이 넘은 지금도 장군은 술을 즐기지만 부인의 노환으로 극히 절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5호 (2015년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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